‘대중이 진정으로 사랑한 한 여배우가 죽었다. 그녀가 저 세상에서는 진심으로 행복하길.’
온갖 추측과 소문이 무성한 이은주의 자살이 있던 날 우연히 다시 읽게 된 일기장에 적혀 있는 그 글을 보고, 또 1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팬들의 흔적을 느끼며, 제대로 된 추모식을 영화로나마 올려야겠단 생각이 든건 불과 며칠전 이었다.
사실, 황망한 이은주의 죽음 뒤에는 ‘우리 사이는 레옹과 마틸타 였다.’고 밝힌 모가수 때문에 영화 <레옹>과 이은주를 두 번 죽이는 어이없는 일도 있었고, 영화 흥행과 별개로 그녀가 영화 속에서 부른 ‘Only When I sleep’이 뒤늦게 핸드폰 벨소리로 큰 인기를 끄는 기현상도 일어났다. 이은주와 죽음은 유독 스크린에서 질긴 인연을 보여왔고 되려 그 사실이 그녀의 자살소식을 더 극적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영혼의 사랑을 운명으로 승화시킨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부터, <연애소설>,<하늘공원>에 이어 유작이 된 <주홍글씨>까지. 천만 관객을 동원한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조연이지만 인상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이은주의 모습은 우리에게 그녀의 죽음을 너무 ‘익숙’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데뷔 9년, 그리고 우리에게 남겨진 9편의 영화.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기 보단 이른 성숙함으로 세상을 관망해 불행했던 이은주의 영화 속 모습을 보면서 좋아했던 배우의 죽음이 아닌 좋은 배우의 죽음을 다시 한번 애도하려 한다. 영원히 스물 다섯 살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을 그녀를 다시 한번 추억하면서.
● 오! 수정(2000)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기도 한 <오!수정>은 53회 깐느 국제 영화제 공식부문 '주목할만한 시선' 초청되기도 했다. TV드라마 <카이스트>가 인기를 얻으면서 브라운관 안착에 성공한 이은주는 이 영화로 38회 대종상 신인상을 받기도 했다.
● 번지점프를 하다 (2000)
젊은 시절 사랑했던 연인이 17년 만에 남자 제자의 몸으로 환생해 사랑의 기억을 떠올린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번지 점프를 하다>는 연출을 맡은 김대승 감독이 “ 이은주를 보자마자 5분만에 매료 됐다”고 밝혔을 만큼 자신의 나이에 맞는 가장 발랄한 연기를 펼쳐 보인 이은주의 열연이 돋보인다.
● 연애소설 (2002)
차태현, 손예진과 더불어 5년간의 숨바꼭질 같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연애소설>속 ‘경희’의 대사는 지금의 이은주를 기억하는 많은 팬들에게 가장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작품.
남녀간의 우정과 사랑의 줄타기를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오해와 이별, 사랑을 통해 어쩌면 ‘용기’가 없어 표현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이뤄지지 않았던 수많은 사랑을 대변하는 가장 솔직한 영화로 많은 공감을 일으켰다.
● 안녕, 유에프오 (2004)
개봉 당시 평론가들로부터 “너무 착하기만 한 영화”라는 혹평과 달리 뒤늦게 보게 된 일반관객들로부터 “이제서야 보게 되어 안타깝다”는 재 평가를 받고 있는 <안녕! UFO>는 극중시각장애인으로 나온 이은주의 발랄한 연기가 돋보인 작품이다.
어린 시절 UFO를 본적이 있는 시각 장애인 ‘경우’와 버스운전사이자 DJ인 ‘상현(이범수)’가 주고받는 말들은 유치한 것 같으면서도 남자와 여자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는 명쾌한 대사로 남녀간의 연애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 주홍글씨 (2004)
혼신을 다해 찍은 정사 장면이 '정서(emotion)'의 표현이 아닌 '섹스'로 비춰지는 현실과 촬영 당시 마지막 트렁크신의 충격은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혀 왔다고 한다. 그녀의 죽음 이후 마지막 엔딩신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주홍글씨>는 그녀의 마지막 작품으로 우리에게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