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X>때 만나고, 3개월 만이다. 그 사이 당신은 <베를린>이라는 새로운 작품을 들고 왔는데, 나는 그대로네. 이럴 땐 배우가 참 부럽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또 다르다. 내가 배우를 대변하긴 그렇고. 내 경우엔 작품이 없으면 마냥 백수다. 그럴 때는 “내가 과연 잘 살고 있는 건가?”, “이게 맞는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어떤 배우가 그러더라. 배우는 자기최면에 걸리기 쉽다고. 작품을 안 하면 이 시장에서 도태되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서 성급한 판단을 하게 될 때가 있다고 했다.
그럴 수 있다. 이 시장이 냉혹해지고 상업화될수록 더 그럴 거다. 수많은 엔터테이너들이 하루에도 엄청나게 쏟아지지 않나. 지금도 엄청난 배우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고. 그러다보니, 그런 강박관념이 생길 수 있다. 반대로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강박관념이 생기기도 한다. 결국 이건 배우의 숙명인 것 같다.
<베를린> 언론시사회가 다음 주다. 완성된 영화는 봤나?
아직. A편집본만 봤다. 영화가 현장에서 잘 찍혀 나와서 크게 손댈 게 없다고 듣긴 했는데, 어쨌든 후반 작업을 통해 조금은 달라졌겠지. 어떻게 완성됐을지, 기대된다. <용의자X> 때처럼 단독주연이 아니라 여러 배우들이 분량을 나눠가진 영화인지라, 편한 마음도 있다. 출연배우지만, 나도 관람하고 싶은 영화다.
멀티캐스팅이 배우들의 심적 부담을 덜어준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가 보다.
그건 때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이번 같은 경우는 소위말해 슈퍼캐스팅 이잖나. 한 사람에게 쏠리는 짐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그렇기에 부담도 따랐다.
부담이 따랐다는 건 역시 연기적이 부분에서인가.
맞다. 특히 밸런스 적인 면에서. <주먹이 운다>에서 최민식 선배와 작업할 때도, <부당거래>에서 (황)정민이 형과 작업할 때도 그랬는데, ‘지지 말아야지’하는 느낌보다는 ‘밸런스를 무너뜨리지 말자’라는 마음이 컸다. 워낙 연기의 대가들이기 때문에, 괜히 더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그리고 또 궁금한 거지. 그들 각자의 연기 방식이. <베를린>의 경우, 한석규 선배님은 어떻게 작품을 해석하시는지, (하)정우 형은 어떻게 작품에 임하는지 궁금했다. 같은 배우니까 오히려 더 궁금할 수 있잖나.
‘밸런스를 무너뜨리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걸로 봐서, 여간해서는 주눅 들지 않는 스타일 같다.
내가 잘 쫄지 않는다. 그게 뭐냐면, 거부감이 별로 없는 거다. 선배들과도 쉽게 친해진다.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만큼, 마음을 많이 오픈하기도 하나?
내가 평소 낯가림이 있는데, 작품 할 때는 조금 다르다. 작품은 미션을 함께 수행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 개인적인 성향을 조금은 버려둬야 할 필요가 있는 거지. 가령 당신과 나는 지금 인터뷰로 만나고 있기에 이렇게 편하게 대화하는 거다. 그렇지 않고 커피숍에서 사적으로 만났다면 어색했을 수 있다. 영화작업도 비슷하다. 작업으로 만났을 땐 주어진 시간 안에 인간적인 교류도 나누고, 서로가 서로를 아는 게 필요하다. 그래야 터치감도 좋아지니까. 빠른 시간 내에 목적한 뭔가를 해야 할 때는, 마음을 조금 더 열게 된다.
난 류승룡이 아니라, 류승범인데.(웃음)
아, 이런 큰 실수를!
확실히 류승룡 선배가 대세는 대세다!(좌중폭소) 인터넷만 봐도 느껴진다. 인터넷 검색창에 이름을 치면, 그러니까 ‘류’를 치면 제일 위에 나오는 게, 류승룡. 그 다음이 야구선수 류현진이다. 나는 그 다음. 하.지.만 나도 위에 있을 때가 있었다. 하하하.
진심으로 미안하다. 류.승.범,씨!(웃음)
괜찮다. 본인은 대세에 따르는 사람이다. 대세와 항상 같이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오픈마인드의 사람이다. 그런 거에 자존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럼 어디에 자존심을 부리나?
아, 그거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 굉장히 자존심을 부리는 것 같다. 스스로에게 엄격하다. 자가 반성도 많이 하고. 그 누구보다 나에게 떳떳하고 싶고. 남의 이목보다는 내 이목에 더 신경 쓰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이제는 나에게 있어서도 자유롭고 싶다. 뭐냐면, 예전에는 스스로를 엄격하게 단련하는 게,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위로라든지, 칭찬이라든지, 하는 것들로. 이젠 편하게 ‘이지 고잉(Easy Going)’ 하려 한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바뀐 건가? 아니면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가.
한국사회에 있다 보니, 괄약근에 힘을 바짝 쪼이고 살았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내 고민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던져졌을 땐,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거라는 생각이. 고민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있는 건데, 괜히 혼자만 대단한 걸 짊어진 것 마냥 하는 게 소모적이란 생각이 든 거다. 그리고 조금 건방질 수 있는 얘긴데, 우리는 내일 죽을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젊음에 취해 삶이 영원할 거라 착각하지만, 죽음에는 순서가 없지 않나. ‘내가 당장 죽는다면, 나는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나’라고 생각해 보니, ‘아, 스트레스만 안고 사는 삶은 너무 허무하지 않나’ 싶더라. 그리고 내가 삶에 화두를 던지는 철학자도 아닌데, 물론 배우로서의 철학은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지 고잉’ 해도 되겠다 싶었다. ‘노 스트레스(No Stress)!’ 이후로 마음이 편해졌다. 괄약근에도 힘도 풀리고.
평상시에는 그렇다 치고. 작품에 임하는 마음도 편해졌나? 영화 찍을 때, 스스로를 외롭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걸고 알고 있는데.
작품 할 때의 나는 내가 아닌 것 같다. 그건 또 다른 나다. 일상에 쓰이지 않는 작용들이 일어나다 보니, 안 그러려고 해도 나 자신을 100% 컨트롤 하지 못한다. 괜히 예민해 지고, 그로인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보다 유연해지길 바라는데… 사실 잘 모르겠다. 딜레마인 것 같다. 과연 무엇이 맞는지. 아직 찾아가는 중이다.
캐릭터에 몰입해서 현장을 바라보니까 예민해지는 건가, 아니면 영화 현장에 있다는 것 자체가 당신을 흥분시키는 건가.
때에 따라 다르다. 캐릭터에 너무 몰입해서 그렇게 나오는 경우가 있고, 이 시간은 배우의 시간이라는 것 때문에 예민해지는 경우도 있다.
<베를린>은 여러 가지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외국 로케이션 촬영인데다가, 다른 언어(그는 영화에서 영어, 독일어, 북한 사투리는 물론 아랍어까지 구사한다)를 사용해야 해서 배우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이나 터치감이 훨씬 덜했다. 하다못해 먹는 것도 문제였고.(웃음)
먹는 거, 너무 중요하지.
그리고 나는 후시녹음에 굉장히 약한 배우인데, <베를린>은 후시녹음을 약속하고 들어간 영화였다. 동시녹음으로 현장을 통제하다보면 촬영시간이 한없이 길어지는지라 후시녹음을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심적으로 엄청난 압박이 있었다. 게다가 촬영이 끝나면 내게 안정을 줄 수 있는 공간들, 이를테면 집이라든지 친구라든지, 내가 쉼표를 찍을 수 있는 것들과도 차단된 상태여서 고생이 심했다. 그런데 뭐. 류승완 감독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이 영화가 잘 되고 못 되고를 떠나서 감독님에게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 현장에 있어 보지 않은 사람은 뭐라고 얘기할 수 없는, 기나긴 고통과 외로움의 시간을 감독님이 뚫고 나오셨다. 배우는 사실 엄살 피울 곳이라도 있잖나. 매니저라든지, 휴식시간이라든지. 그런데 감독님은 혼자서 정말. 어우~ 이번 영화를 통해 또 한 번 감독님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도 그걸 알기에 류승완 감독님에게 존중을 품었던 것 같고.
개인적으로 <부당거래> 이후의 작품이라 <베를린>이 더 궁금하다. <부당거래>때 쏟아진 평단의 호평이 감독님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텐데,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반대로 부정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감독님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부담이 엄청났을 거다. 이번 영화가 어떤 현장이었냐면, 한 번은 그런 일이 있었다. 배정남이라고 아는 후배가 <베를린>에 잠깐 나온다.
모델, 배정남?
맞다. 그에게 “모니터 쪽으로 와. 여기에 와서 앉아있어”라고 했는데, “모니터 근처에도 못가겠다”고 하더라. “그쪽 기운이 장난 아니”라고. 그러니까 류승완 한석규 하정우 전지현 류승범이 모여 있는 걸 보기만 해도 쌍코피가 난다는 게 아닌가. 우리야 모르지. 다들 비슷한 기운을 공유하고 있고, 잠시 다른 세상에 가 있으니, 타인 눈에 어떻게 비춰지는지 모르지. 그런 기운 한 가운데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감독이다. 그 어마어마한 군단을 이끌고 가야 하는 사람이 결국 감독인건데, 나라면 중도 포기했을 거다. 당신이 말한 전작에 대한 부담감을 떠나서, 이 현장은 그 자체로 감독에게 지옥 같은 공간이었다.
영화 현장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어떤 현장은 유쾌하고, 어떤 현장은 부산스럽고, 어떤 현장은 무겁다. 제작보고회 때 들은 걸로 유추하자면 <베를린>은 배우들이 신나게 즐기면서 찍은 현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배우와 감독 모두가 일정한 긴장감을 쭉 가지고 일한 느낌이랄까.
맞다. 사적인 쾌락을 느낄 수 있는 현장이 아니었다. 다들 완성도에 엄청 집중했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는 사실 ‘와, 재미있겠다. 이런 배우들을 또 언제 만나! 게다가 베를린? 그림 죽이겠네!’ 이랬다. ‘돈 받고 놀라는 거네!’라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리고 류승완 감독님에게 나를 던졌을 땐, 항상 얻어지는 게 있었으니 망설일 게 없었다. ‘와이 낫’ 이었던 거지. 그런데 오산이었다. 이건 뭐… 정말, 다들 지옥을 경험했을 거다. 작품들어가기 전에 얕잡아봐서 더욱 그랬을 거다. ‘빡세겠다!’ 했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웃음)
아까 배우들의 기운 얘기를 했는데, 사실 모든 배우들의 기운에 센 건 아니다. 그걸 아우라라고 하지.
그런 게 있었다. 다들 프로페셔널하게 움직인다는 느낌? 이런 얘기하면 우스울 수 있는데, 다들 선수들이잖나.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몫을 얄미우리만큼 놓치지 않고 ‘탁탁탁’ 하는데, 그걸 보면서 ‘저런 건 내가 배워야겠다’ 싶더라. 나는 프로의 세계에서 일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프로페셔널한 사람은 아니거든. 어떤 지점에서는 프로페셔널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고. 그래서 그런 걸 보면서, ‘이 사람들이 이러니까 대세가 됐구나’ 했던 것 같다. 이러니까 전지현이구나, 이러니까 한석규구나, 이러니까 하정우구나, 또 그러니까 나는 류승범이구나를 느꼈다.
정우 형이랑은 작품하기 전에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동네에서 만나 커피도 마시고 얘기도 나누다 보니, 연기적으로도 그렇고 인간적으로도 그렇고 서로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베를린>을 함께 하게 돼서 좋았지. 그런데 영화를 하면서 나와는 굉장히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좋다/나쁘다’를 떠나서 성향이나 모든 것들이 많이 달랐다. 그래서 사실, 생각보다 많이 친해지지 못했다. 서로가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은 컸으나, 성향자체가 워낙 달랐던 거지. 정우형도 그렇게 느껴서 내심 놀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달라서 더욱 흥미롭기도 했다.
서로의 개성에 나를 끼워 맞추려하기 보다, ‘다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 것 같다.
정우 형은 굉장히 유연한 사람이더라고.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물 같다. 마치 그의 연기처럼. 그의 곁에는 늘 유머가 있고, 늘 웃음이 있다. 그에 반해 나는 굉장히 날이 서 있다. 안 그럴 것 같이 생겼는데, 오히려 더 그렇다. 어둡고. 내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걸 아니까, 혼자 있는 편이고. 그런 면에서 서로가 다른 거지. 연기적인 면에서도 정우 형은 아주 프로페셔널하다. ‘이 씬에서 힘을 10정도 써야겠다’ 마음먹으면 정말 딱 그 정도로 컨트롤을 한다. 굉장히 정확하다. 그런데 내 경우엔 “작게요!” 하면 너무 작아지고, “많게요!”하면 너무 많아진다.(웃음) 그래서 후시녹음도 힘든 거다.
한석규 배우는 어떻던가. 80년대 생인 당신에게 <접속> <쉬리>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는 로망이자 추억이기도 할 텐데.
아우, 그럼.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연 분인데.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큰 행운이었다. 한석규 선배님은 평상시에는 힘을 빼고 있다가, 컷이 들어가면 “팍!” 하는 스타일이다. 연기할 때의 눈빛이 평소와는 아주 다르다. 신들린 것 같은 눈빛이랄까. 섬뜩하고. 그런 눈빛을 <주먹이 운다> 때 최민식 선배님에게서 본 적이 있다. 최민식 선배님도 그러시거든. 촬영 전에는 설렁설렁 계시다가 슛만 들어가면 눈빛이 달라지신다. 눈 모양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눈의 공간을 채우는 기 자체가 변한다. 사람의 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영적세계를 보는 기분이다.
당신이 <베를린>에서 맡은 북한고위간부의 아들, 동명수. 사전정보에 따르면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이다. 악연이 처음은 아니다. <용서는 없다>에서 서늘한 악역을, <사생결단>에서 비열한 악역을, <부당거래>에서는 얄미운 악역을 보여줬는데, 당신이 연기한 악역들은 얄밉지 않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짐 캐리 같은 배우를 좋아한다. <이터널 선샤인>을 보면서 그 배우에게 감동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때쯤의 짐 캐리라면 어깨에 힘을 잔뜩 넣고 “나, 이런 것도 할 줄 아는 배우야” 할 수 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힘을 뺐다. 전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지만 자신이 가진 향기를 놓지 않았다. 그냥 짐 캐리를 보여준 거지. 그런 게 느껴지니까, 존경이 생기더라. ‘와, 내가 너에겐 졌다. 넌, 평가 이상의 단계로 가는구나. 넌, 아티스트구나’ 했다. 그래서 “류승범은 어떤 옷을 입어도 저러네?”라는 평가가 배우로서의 긴 행보로 봤을 때, 나쁘지 않다. 재미있고. <용의자X>에서 “류승범이 이런 것도 해?”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는데, 이미 행함을 끝낸 사람이기에 평가에 대해서는 어떤 것이든 모두 받아들이는 편이다. ‘아이 돈 케어(I don't care)!’
(웃음) 예상대로 후시녹음은 힘들던가?
고생 많이 했다. 잘 안 되더라고.
현장에서 당신이 발휘한 게 100이라면, 후시녹음에서는 몇 정도가 나오나?
반이다, 반! <방자전> 때도 거의 후시였다. 후시녹음 하는 첫 날, 김대우 감독님이 그랬다. “에이, 승범씨 이제 장난하지 마~” 아니, 나는 진중하게 한 건데. 내가 무슨 영화에 거부감이 있는 줄 아셨을 거다. 굉장히 부끄러웠다. ‘내가 이렇게 훈련이 안 돼 있구나’하는 생각에.
많아지는 추세다. 영화들이 스케일도 커지고, 점점 상업화 되다보니까. 그 규격이라는 게 있잖나. 그러다보니, 현장성이라는 게 위협받는 게 사실이다.
아쉽겠다.
극복해 나가야지. 나에게 맞춰 시스템이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요즘의 나를 가리켜 사람들이 그런다. “류승범 애가 점점 언더그라운드 해 진다”고. 그런데 그걸 자세하게 관찰해보면 시스템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거다. 내가 발맞추기엔 시스템이 너무 급변하고 있고, 그 시스템과 나의 터치감이 잘 안 이루어지고 있는 거지. 그리고 내가, 완전히 숙지가 안 되면 잘 행하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느린 거다. 시스템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는 내가 조금 느린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는 시스템을 빨리 따라가야지’라는 조바심을 내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려고 노력한다. 삶에 있어 내 중심을 잃으면 큰일 나니까. 좋은 것만 따라가다 보면 내가 없어져 버리니까. 환경에 적응하려고는 하나, ‘퉤’하는 식으로 나를 뱉어버리려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확고한 자아를 잃지 않으면서 맞춰가는 건 유연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마냥 모험을 하는 건 위험한 행동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세상이라는 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잖나.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지만, 너무 환경에 맞춰서 사는 건 아닌 거 같다. 인간의 가치라는 게 있는데, 인간만의 살아가는 스텝이 있는데… 이게 참, 복잡한 얘기다.
복잡한 동시에 예민할 수 있는 얘기다. 특히 배우라는 건, 환경에 쉽게 노출되는 존재니까. 점점 상업화되는 환경에서 배우로서의 초심을 지키는 게 쉽지만은 않을 테니까.
<부당거래>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대사.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 사회에서 ‘존중’이라는 것들이 자본에게까지 깔아뭉개지는 게 아쉽다. 이런 말, 되게 위험할 수 있는데 “저 배우는 돈 만들어내잖아. 그러니까 (돈) 더 줘!”. “쟤는 그런 거 잘 못 하잖아. (돈) 덜 줘!” 이런 말들이 오간다. 배우라는 것이 돈을 창출해 내거나 상품을 찍어내는 직업이 아닌데, 결국엔 기업인들과 다를 바 없게 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렇게 되면, 배우가 가지고 있는 무형의 존중받아야 하는 것들이 자본에 지는 거잖나.
같은 배우라도, 배우라는 개념에 대해 지니고 있는 생각이 다 다르다. 배우에 대해 당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런 것들이 부딪히는 거지.
최근에 알게 된 건데, 과도기라는 말 자체가 본질적으로는 모순이란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계속되는 과도기에 놓여있다는 거지. 내가 배우를 한지 이제 10년이 조금 넘는다. 처음 시작할 때 내가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동경과 지금 바라보는 동경은 많이 다르다. 그렇다면 내가 배우를 시작했던 나이, 20대의 청년배우가 현재 배우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떨까 생각해봤을 때 무서워진다. 내가 최민식 한석규 송경호 설경구… 르네상스를 연 배우들을 봤을 때 가졌던 그 대단한 동경을 과연 지금 20대 배우가 받을 수 있을까? 이 시스템에서? 그 생각을 하면 참 슬퍼진다.
어디 배우에 대한 동경뿐인가. 관객이 극장이라는 공간에 대해 느끼는 동경도 이전과는 많이 다르다. 제작보고회 때 류승완 감독님이 “요즘 멀티플렉스 극장은 영화를 보고 나올 때 출구가 쇼핑센터로 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방금 본 영화를 순식간에 잊게 만든다”고 했다. 그 말이 참 인상 깊었다.
나는 정치를 잘 모른다. 그쪽 분야에는 무지한 사람이다. 그래도 이런 건 있다. <남영동1985>라는 영화를 얼마 전에 봤다. 보면서 이제는 누군가에게 바랄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이 우민정책에서 탈피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프랑스 사람들에겐 스스로가 귀족사회를 없앴다는 자부심이 있단다. 스스로가 귀족사회를 질책하고, 스스로가 각성하고,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시스템이 되고, 그게 개혁이 되고, 사회가 바뀌었다는, 그 엄청난 개개인의 프라이드들이 있다고 하더라.
계몽주의자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닌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우스울 수 있지만, 나 스스로는 바뀌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TV를 틀면 광고에서 배우들이 상품을 팔아대고 있다. 섹시스타가 햄을 팔고 김치냉장고를 판다. 그런데 그거에 대해 여론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이상한 아이러니 아닌가. 섹시스타가 햄을 판다는 게 과연 어떤 느낌인가. 그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나에게는 너무 이상한 느낌이 든다는 거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이렇게 많은 상품 광고에 엔터테이너들이 나오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그게 바로, 자본이 이상하다는 걸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이런 우민정책에서 스스로가 깨어나야 하지 않을까. 이런 얘기를 하면 우리나라가 과도기에 있다는 이유를 들며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 있는데, 적어도 발전돼 가는 과정 안에서 자가 반성이나 각성이 없으면 문제가 있는 거잖나. 글쎄.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우리 일을 하는 사람들은 조금 더 ‘쿨’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프랑스는 이런 생각을 공유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개혁이 가능했다. 그래서 궁금하다. 이런 얘기를 나눌 사람들이 당신 주위에 많나?
서울에서는 고독하다. 서울에서 이런 얘기하면 “병신, 배부른 소리하고 있네.” 이럴 거다. 그래서 외롭다. 굉장히. 자본이라는 것이 사람을 굉장히 외롭게 만든다. 인터뷰에서나 이런 얘기하지, 어디 가서 하겠나.
이런 말들이 인터뷰를 통해 활자화되는 건 괜찮나?
위험하긴 하지. 나는 잘난 게 없는 사람이고, 잘난 척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는 사람이다. 그냥 느끼는 걸 얘기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라는 게, 너무 근엄함을 요구한다. 어떤 얘기를 잘못하면 “너 잘났다”가 돼 버린다. 불손한 의도로 한 말이 아닌데도 말이다. 안타깝다. 개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가령, 방송인 OOO와 ###. 개인의 생각을 얘기한 것뿐인데, 그 사람들은 생업까지도 위협받았다. 너무 이상하지 않나?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 봐라. 술 마시면서 내 생각을 얘기한 것뿐인데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해보니 내 책상이 없어. 이 얼마나 살벌한 사회인가. “그래? 나는 반대! 너 생각은 그렇겠지만, 내 생각도 존중해 줬으면 좋겠어.” 이러면 끝인 것을. 조금만 존중해 주면 되는 문제인 것을.
듣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내게 주어진 인터뷰 시간이 끝나간다. 아쉽네. 마지막 질문이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신 얼굴. 나이가 들수록 ‘배우의 얼굴’이 돼 간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의 얼굴이 마음에 드나?
얼굴을 떠나서 요즘은 그냥 편안해지고 있는 것 같다. 눈빛도 그렇고 행색도 그렇고. 힘이 풀리고 있다고 할까?
사람의 인생이나 마인드가 얼굴에 나타난다고 믿나?
그럼. 속일 수 없다고 본다. 특히 우리 같은 배우들은 더욱 더. 행동과 말투 등 모든 걸 드러내야 하니, 숨길 수가 없다. 물론 이목구비가 바뀌진 않겠지. 성형을 하지 않는 이상. 하지만 마음에 따라 그 사람의 기운이 바뀌고, 그로 인해 얼굴도 달라 보인다고 믿는다. 올해의 내 목표는 긍정이다. 그래서 요즘 많이 웃는다. 내가 또 웃는 모습이 예쁘잖아. 하하하하하.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2013년 1월 29일 화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