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이하‘박’): 미국에서 영화를 완성한 후 한국에 오니까 후배 감독들이 “할리우드는 감독이 편집실에 못 들어간다면서요?”라고 묻더라. “어디서 그런 황당한 소리를 들었냐?”고 도리어 물어봤다. 반대다. 편집이 시작되고 10주 동안은 감독만 편집실에 들어갈 수 있다. 단 미국 감독 조합 멤버만 편집권이 주어진다. 10주가 지나야 제작사 관계자들이 편집된 영화를 보고 감독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교차편집은 시나리오를 각색했을 때 제작사와 미리 합의를 본 거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 편집이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건 실력이 뛰어난 편집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드 토스라는 편집자였는데, 공교롭게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할리우드 감독 앙드레 드 토스의 아들이었다. 사실 니콜라스 드 토스의 필모그래피를 봤을 때 내 연출 스타일과 부합되는 영화는 없었다. 그는 주로 <다이 하드 4.0> <엑스맨 탄생: 울버린>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를 편집했다. 우려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초반 편집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편집이 끝난 후에는 최고의 동료가 됐다. 진짜 헤어질 때 눈물이 날 만큼 친해졌다. 교차편집의 미학을 극한까지 연출 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그 친구 덕분이다.
영화를 보니 엄마 이블린 역을 맡은 니콜 키드먼이 조연급이더라. 주로 주연을 맡아 온 니콜 키드먼을 캐스팅하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나?
박: 캐스팅 관련해서 니콜 키드먼과 미팅을 가졌다. 서로 탐색전을 펼쳤다. 아마 니콜 키드먼은 영화의 연출자로서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지, 같이 일할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보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머릿속에 있는 ‘이블린’과 니콜 키드먼이 잘 맞는지를 봤다. 그날 나는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종합적인 설계도를 보여줬다.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출연을 결정하더라.
박찬욱 감독과 작업을 한 소감은 어떤가? 촬영 단계에서 박찬욱 감독과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면서 캐릭터를 구체화시켰는지 궁금하다.
미아 바시코브스카(이하‘미’): 처음에는 언어가 달라서 커뮤니케이션에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작업했다. 촬영 단계에서 스크립트를 여러 번 읽고 분석했다. 촬영 전 박찬욱 감독님과 이메일을 통해 인디아라는 인물을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디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나 사진을 서로 공유하면서 신체적 특징이나 정서적인 감정을 잡아나갔다.
미: 박찬욱 감독만의 차이점은 영화 전체를 이미지화시킨 스토리북을 제작해 사용했다는 점이다. 물론 찍으면서 수정된 부분들이 있었지만 핵심적인 부분은 스토리북을 활용했다. 인디아를 연기하면서 외로움이나 욕망, 갈망 등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어렵지 않게 표현해냈다. 하지만 살인 본능이나 야수성 등 독특한 정서는 이해가 안 되더라. 스토리북을 읽으면서 상상력을 동원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연기했다. 스토리북이 없었다면 연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원래 찰리 역은 매튜 구드가 아닌 콜린 퍼스가 하기로 했다. 만약 콜린 퍼스가 찰리 역을 맡았다면 지금의 찰리와 어떤 점이 달라졌을까?
박: 각본은 바뀌지 않고, 스토리 보드만 바뀌었을 거다. 연기 스타일도 변형이 있었을 거다. 매튜 구드가 연기한 찰리는 인디아에게 연인이기도 하고 아버지이기도 하다. 콜린 퍼스가 했다면 아버지의 느낌이 더 강했을 거다.
기자간담회 때 할리우드 촬영 현장이 급박하게 진행되다 보니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연출의 중심을 잡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했는지 궁금하다.
박: 한국은 촬영현장에서 배우들, 촬영 감독, 미술 감독, 프로듀서와 회의를 한다. 더 좋은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서로 의견을 조율한다. <스토커>는 촬영기간이 짧아 기존 한국에서 했던 촬영방식을 고수하지 못했다. 불안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더라. 그러다 감독으로 데뷔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 때는 현장 편집은 말할 것도 없고, 모니터도 없었다. 당시 촬영감독들은 신인 감독에게 뷰파인더도 안 보여줬던 시절이었다. 내가 데뷔 때로 돌아가면 할리우드에서의 촬영을 잘 마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갔다.
한국과 할리우드에서 모두 영화 작업을 해 봤다. 할리우드 시스템의 장점을 꼽자면 무엇인가?
박: 한 편 밖에 경험을 못해봐서 뭐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웃음) 둘 다 장단점이 있다. 그냥 감독입장은 촬영, 편집을 오래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돈이 많이 든다. 제작비가 올라가면 영화가 흥행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더 커진다. 무조건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좋은 건 아니다. 옆에서 내 결과물에 대해 질타하는 사람이 있어야 내 생각이 정리되고 정교해진다. <스토커>를 촬영하면서 또 한 번 느꼈다. 특히 조감독이 나를 많이 괴롭혔다.(웃음)황제처럼 내 마음대로 아무 간섭 없이 작업한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나오는 게 아니다. 참 어렵다. 상업영화의 룰 안에서는 결국 적당한 선을 찾아야 한다.
배우들과 이야기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을 것 같다. 촬영하면서 과거 함께 작업했던 국내 배우들이 생각났을 것 같다.
박:촬영현장에서는 배우들과 대화를 하지 못해 아쉬웠다. 대신 프리 프로덕션 기간에 많이 했다. 촬영 전 의견 조율을 다 해서 그런지 현장에서는 다툼이 없었다. 촬영하면서 송강호, 신하균이 가장 보고 싶더라.(웃음) 강호와 하균이는 일하는 동료보다는 친구, 형제 같은 사이라서. 사실 그들과 술 마시고 노는 게 그리웠다.(웃음)
박: 한국에서도 <공동경비구역 JSA>나 <올드보이>도 원작소설과 만화가 있었다. <박쥐>도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을 기본 콘셉트로 잡아 작업했다. <스토커>도 그동안 해왔던 작업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제인 에어> 등 전작과 비교했을 때 <스토커>는 가장 어둡고 센 영화다.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
미: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이전 작품들과 확연히 다른 인물 때문이었다. 이번 영화를 통해 색다른 연기에 도전했다.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나 영화 관계자들이 나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해줬으면 한다.
인디아는 생일 때마다 신발을 선물로 받는다. 그건 나중에 하이힐을 등장시키기 위한 복선이었나? 선물로 신발은 선택한 이유가 있나?
박: 시나리오에 인디아가 새들 슈즈(Saddle shoes, 안장형의 다른 가죽을 붙인 끈매기식의 단화)를 신는다고 쓰여 있었다. 엄마는 인디아가 매일 신는 새들 슈즈를 아주 싫어한다고도 적혀 있었다. 호기심이 생기더라. ‘왜 인디아는 이 신발만을 고집할까? 이게 엄마가 모르는 낯선 이에게 받은 선물이라면? 그 사람이 키다리 아저씨 같은 사람이라면?’ 생각을 정립하고 찰리가 인디아의 생일 때마다 은밀히 신발을 보냈다는 설정을 잡았다. 소녀의 성장 드라마라고 봤을 때 한 단계 도약하는 이미지가 필요했다. 하이힐이 적합했다. 처음에는 찰리와 인디아가 맹수와 포식자라는 비유를 돋보이기 위해서 표범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찾았다. 하지만 표범 무늬로 만들어진 고상한 디자인의 구두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악어가죽 하이힐을 선택했다. 악어도 포식자니까.
엔딩장면을 보니 속편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이더라.
박: 웬트워스 밀러는 후속작을 염두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결말은 관객이 앞으로 인디아가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상상을 하도록 구성했다. 각색 초고 결말은 인디아 아빠(더모트 멀로니)가 찰리를 위해 마련해 놓은 뉴욕 아파트에서 벌어진다. 인디아는 그곳에 살면서 뉴욕 맨하탄 거리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고립된 동네에서 살다가 많은 사람들을 흥미롭게 보는 그의 표정으로 마무리 되는 거였다. 이밖에도 많은 엔딩이 있었다. 인디아가 식당이나 회사에 취직해 사람들 속에서 일하는 거다. 많은 인파속에서 인디아가 어떤 짓을 할 것인지 궁금하게 만들고 싶었다. 후속작은 없다. 이게 완결이라 생각한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사진작가다. 딸의 출연작이나 딸의 얼굴이 크게 나온 영화 포스터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하다.
미: 부모님이니까 좋은 말만 해준다.(웃음) 두 분 다 <스토커>는 아직 안 봤는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아마 이번 영화 포스터는 부모님이 마음에 드실 거다. 특히 엄마가 좋아할 것 같다. <스토커> 포스터를 찍은 메리 앨런 마크는 엄마가 존경하는 작가다. 나 또한 학교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프로젝트를 발표한 적이 있다. (뒤에 있는 포스터를 바라보며)정말 마음에 든다.
박: 티저 포스터를 촬영해준 메리 앨런 마크 또한 사진작가로서 존경하는 분이었는데, 현장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너무 좋았다.(웃음)
어렸을 때부터 사진작가 부모님 밑에서 교육을 받았으니 남다른 시각을 가졌을 것 같다. 실제로 그런 시각이 연기를 하는데 도움이 되나?
미: 그렇게 생각한다. 사진은 피사체의 관찰을 통해 결과물을 얻는 것처럼 연기도 인물을 오랜 시간동안 관찰해서 온 몸으로 표현해낸다.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도움이 많이 된다.
미: 사실 연기 전에는 발레를 했다. 개인적인 표현 도구로 발레를 좋아한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신체적인 조건이 맞아야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처음엔 좋아서 시작했지만 점점 절망감이 느껴지더라.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아서 그만 뒀다. 당시 연기에 관심이 많았다. 몸으로 표현하는 면에서 발레나 연기나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연기를 시작했다.
<제인 에어>에 이어 2013년 <마담 보바리>에 출연하는 걸로 알고 있다. 계속해서 고전 문학을 리메이크한 영화에 출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 의식적으로 고전문학에 출연하는 건 아니다. <마담 보바리> 같은 작품 제의가 들어왔을 때 단번에 거절하는 배우는 없을 것이다. 두려움도 있었지만 너무 하고 싶었다. 고전 소설이 계속해서 리메이크 되는 이유는 원작의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는 언제나 끌린다.
<스토커>는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작품인가?
박: <스토커>를 연출하기 위해 미국에 갔을 때 겁이 났었다. 낯선 사람들과 영화를 완성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영화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나에게 두려움을 안겨줬던 사람들이 영화적 동지가 됐고, 가족이 됐다. <스토커>는 영화나 인생에 있어서 큰 자산을 안겨준 고마운 작품이다.
미: <스토커>는 지금까지 했던 영화 중 가장 특별한 작품이 될 것 같다. 인디아는 연기 생활에 있어서 터닝 포인트가 되는 인물이다. 박찬욱 감독의 할리우드 첫 영화에 참여하게 되어 영광이다. 관객들이 <스토커>라는 기이한 세계에 빠져들어서 마음껏 즐겼으면 한다.
2013년 3월 7일 목요일 | 글_김한규 기자(무비스트)
사진제공_올댓시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