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아이돌 보이그룹 HOT와 젝스키스는 나란히 스크린에 진출했다. 당시 엄청난 ‘팬덤’을 양산한 두 팀의 스크린 데뷔작 <세븐틴>과 <평화의 시대>는 사이좋게 참패했다. 애초에 아이돌의 인기에 편승한 기획영화였고, 아이돌의 첫 스크린 진출이었던 만큼 실패는 예상된 일이었다. 앞선 보이그룹의 전례를 참고한 걸까. 보이그룹 못지 않은 인기를 끈 당대 걸그룹들은 전략을 바꾸었다. 팬덤을 등에 업은 기획영화 출연이 아닌, 진짜 배우로 인정받길 원했던 것이다.
S.E.S, 핑클, 베이비복스 등 1세대 여자 아이돌 대다수가 나이를 먹으며 배우로 전향했다. 걸그룹 SES에서는 유진이, 핑클에서는 성유리와 이진이 배우로 전업했다. 성유리는 현재 KBS 드라마 <로맨스 타운>에 주연으로 출연하고 있다. 베이비복스의 막내 윤은혜는 MBC 드라마 <궁> <커피프린스 1호점>을 거쳐 최근 SBS 드라마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서 활약중이다. 샤크라 멤버 정려원은 아침드라마 <색소폰과 찹쌀떡> 출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배우 활동을 전개했다. 현재는 권상우와 함께한 영화 <통증> 개봉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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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 시작된 한류는, 음악을 하는 아이돌 스타에게로 이어졌다.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부는 K-pop 열풍이 그것을 증명한다. 아이돌이 한류열풍의 주역이 된 만큼 그들의 위상은 높아졌다. 그러나 아이돌은 여전히 ‘배우’라는 수식어에 갈급하다. 이유는 그들이 ‘아이돌(teen idol)’이기 때문이다. 아이돌은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장점으로 내세운 연예인이기에 연예활동의 수명이 짧은 경우가 많다. 그룹이 해체되고 나이가 들면 인기가 사그라지고, 더는 아이돌로 활동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여러 명으로 이루어진 아이돌 그룹에서 보컬 담당이 아닐 경우에는, 향후 솔로로 가수활동을 지속하기에도 어려움이 있다. ‘배우’가 되어 ‘연기’를 하는 것은 아이돌이 연예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 셈이다. 아이돌의 한계를 인정했기 때문일까. 소속사는 철저한 시스템을 통해 아이돌을 훈련시킨다. 노래·춤·연기 모든 게 가능한 ‘멀티 연예인’을 염두에 두고 아이돌을 양성하는 것이다. 것이다. 소속사는 연습생 수업 시간표에 연기 과목을 넣기도 하고, 연기 학원과 계약을 맺거나 중견 배우를 섭외해 1대1 교육을 하기도 한다. 가수활동을 하다가 어느 틈에 배우가 되어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한 아이돌 스타의 연기력을 두고 수용자들이 전처럼 ‘발연기’ 운운하며 질타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가히 러시라고 할 만큼 아이돌의 브라운관 및 스크린 진출이 활발하다. 빅뱅의 탑, 최승현은 드라마 <아이 엠 샘> <아이리스>에 조연으로 등장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영화 <포화 속으로>에서는 김승우, 권상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제31회 청룡영화상 신인 남우상의 영예를 안았다.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에 출연한 원더걸스 소희는 자연스런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내 사랑 내 곁에>에 조연으로 출연해 눈 화장을 지우고 청초한 민낯을 드러낸 브라운아이드걸스 가인도 마찬가지다.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한동안 맘고생 하던 씨야의 전 멤버 남규리는 2008년 영화 <고사: 피의 중간고사>,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49일>을 통해 배우로 거듭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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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의 연기가 향상되고 그들의 출연작이 시청률 및 일정 수익을 보장하자, 아예 아이돌을 소재로 한 작품도 생겨났다. ‘배용준(키이스트)과 박진영(JYP 엔터테인먼트)이 손잡고 만든’ KBS 드라마 <드림하이>에는 아이유, 2PM, 티아라, 미쓰에이 등 소위 ‘잘 나가는’ 아이돌이 총출동했다. 연습생 시절부터 아이돌 스타가 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실제 아이돌들이 연기해서일까. <드림하이>는 높은 수익을 올리며 성공적으로 전파를 탔다. 티아라 멤버 함은정이 출연한 최근 개봉작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 역시 걸그룹을 소재로 한 호러영화다. 7월에 개봉하는 <Mr. 아이돌>에는 박재범과 지현우 등이 출연해 ‘국민 아이돌’을 꿈꾸는 연습생을 연기한다. 한편, ‘띵똥’ 신드롬을 일으키며 전파를 타고 있는 MBC 드라마 <최고의 사랑> 속 주요 코드 중 하나는 ‘과거 아이돌의 부활’이다. 한때 인기 있었던 걸그룹 멤버의 후일담을 그린 드라마의 인기는 아이돌의 ‘아이돌 이후’를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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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아이돌의 영역 확장(혹은 전환)은 아이돌 개인의 자질, 포부, 전략, 시스템 등 다양한 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더불어 수용자도 관대해졌다. 물론 아이돌 스타가 배우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아직 존재한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아이돌 스타가 배우로 활동할 수 있는 통로가 많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아이돌에게 ‘기회’다. 아이돌이 아이돌을 넘어 성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기회 말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잡는 것은 현재의 연예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는 아이돌들의 몫이다.
2011년 6월 20일 월요일 | 글_유다연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