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피터팬을 사랑하던 관객들은 나이를 먹어갔다. 피터팬을 둘러싼 환경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순정남 대신 짐승남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로맨틱 코미디 대신 남자 투톱을 내세운 스릴러가 충무로를 장악했다. 당연히 피터팬의 성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엽기적인 그녀>로 인기 정점을 찍은 후, 기다리는 건 내리막길이었다. <연애소설>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는 흥행엔 흥했지만, 평가에선 망했다.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투가이즈>는 영광도 없는 상처만 줬다. 절치부심한 <복면달호>는 170만명으로 본전치기는 했지만, 이경규의 영화에 출연했다는 선입견과 싸우느라 차태현은 또 지쳤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응원하던, 차태현표 연기와 그의 순정에서 식상함을 얘기했다. 자기복제, 매너리즘 따위의 수식어가 따라 붙었다. 언제부터인가 차태현은 ‘연기변신은 언제 할 것이냐?’는 질문과 싸워야 했다.
차태현은 많은 인터뷰에서 진담을 농담 빌어 말했다. “13년을 비슷한 연기를 버티면서 하는 것도 인정해줘야 하지 않아요?” 지겹게 따라붙는 ‘연기 변신’ 논란에 대한 답이었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배우의 숙명을 타고난 이들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캐릭터보다, 뭔가 비밀이 있어 보이는 독특한 이웃을 연기하고 싶어 한다. 특히 인기가 올라가고 배우의 자의식이 강해지면 변신에 대한 욕구는 더 강해진다. 여기에서 배우는 ‘보여 준 것’ 이상의 ‘보여 줄 것’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작품 선정 기준은 까다로워지고, 작가주의 감독 영화에 한번쯤 출연하는 게 배우의 자질이라 여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대개가 그렇다는 거다. 대개가 그런 상황 속에서 차태현의 행보는 유독 남달랐다. 그는 “변신에 대한 생각도 하지만, 자신에게 맞는 길을 택하는 게 관객이나 스스로에게 잘 맞는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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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태현의 코미디는 평범한데 특이한 구석이 있다. 그의 코미디는 한때 충무로에 바이러스처럼 번진 조폭 코미디와는 다르다. 사람 냄새나는 일상의 코미디를 구상한다는 점에서 언뜻 임창정이 떠오르나, ‘컷’만 들어가면 온몸으로 “나, 연기 중이에요”를 드러내는 임청정과 달리, 프레임 안팎의 모습이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니까, 그의 코미디는 집에서 학교에서 술자리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생활밀착형 코미디다. 그에겐 연기가 너무 뛰어나서 보는 사람이 오히려 벅차다거나, 얼굴이 조각 같아서 바라보기 눈부실 거란 부담이 없다. 일상의 잔재미를 습자지처럼 빨아들이고, 그 재미를 인공적이지 않게 일반화하는데 최적의 배우인 것이다. 하지만 작품선택 때문인지, 연출 때문인지, 시나리오 때문인지 그의 이러한 면모는 <과속스캔들>을 만나기 전까지 종종 의심받았다.
모두가 알고 있듯 차태현을 다시 주목하게 만든 건, 전국 820만 관객을 동원한 <과속스캔들>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흥행이었다. 사람들은 차태현 제2의 전성기가 왔다,고 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건, 단순히 ‘흥행을 했다’가 아니다. 그 흥행을 스스로가 그토록 말하던,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걸 가지고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과속스캔들>에서 차태현은 흡사 전문 주치의 같다. 자신에 대한 파악을 이미 끝낸 이 배우는, 상대 배우 상황에 따라 처방도 달리한다. 구사하는 무기는 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조금 더 노련해졌다는 의미다. 게다가 의미심장하게도 그를 다시 일으킨 <과속스캔들> 속 남현수는 차태현과 닮았다. 한물간 스타 남현수와 스타 왕좌에서 일찍이 내려 온 차태현. 미키 루크 개인의 파란만장한 삶이 포개져 더한 감동을 준 <레슬러>와 비교하는 건 조금 거창하지만, 남현수의 배경이 차태현의 상황과 맞물려 차태현 특유의 편안한 연기를 돋보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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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효과는 <헬로우 고스트>를 통해 생각보다 빨리 현실로 나타났다. <헬로우 고스트>는 잘 만든 영화가 아니다. 귀신 캐릭터는 밋밋하고, 결말을 제외한 에피소드는 졸업 단편영화 모음 수준이다. 물론, 이 영화에는 한국영화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막강한 반전이 있다. 하지만 그 반전 때문에 이 영화가 기대작 <황해> <라스트 갓파더>를 제치고 올 겨울 최고 흥행작으로 등극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기엔 차태현이 있다. 현빈이 하지원과의 영혼 체인지로 달달한 사랑을 속삭일 때, 차태현은 허락 없이 빙의된 영혼들 소원 들어 주느라 발품을 팔았다. 1인 5역을 연기하는 그는 이번에도 크게 오버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가진 카드 안에서 보폭을 넓힐 뿐이다.
그가 앞으로 선택할 영화들이 작품적으로 얼마나 뛰어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관객은 그의 영화가 가족들이 함께 즐기기에 따뜻한 영화일 거란 확신은 가진다. 비슷한 연기를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차태현을 찾는 다는 건, 한 번 쓴 제품을 재구매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재구매는 보통 물건에 대한 신뢰가 생겼을 때, 발생한다. 그것이 마음에 드니, 다시 사용해 보겠다는 구매자의 능동적인 권리가 반영된 것이다. 차태현이라는 배우는 업계 1위의 히트 상품은 아닐지라도,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새우깡’ 같은 배우로는 남을 수 있다. 어느새 차태현표 라는 것이, 또 하나의 장르를 형성했다. 그것이 차태현 가는 길에 기죽지 말라고 말하는 이유다 .
2011년 1월 20일 목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