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해 보인다. 릴레이 인터뷰에 지친건가.
죽겠다.(웃음) 영화 찍는 순간이 너무 좋아서 그렇지, 이것(인터뷰)만 생각하면 영화하기 싫을 거다.
첫 촬영 들어가긴 전날은 어떤가? 배우는 관객 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에게도 관찰의 대상이 되는 존재다. 촬영 첫 날은 특히나 스태프들의 시선이 적지 않게 신경 쓰일 것 같다.
아무래도. 팀장급 분들이야 프리프로덕션할 때 봐서 어느 정도 아는데, 다른 팀원들은 촬영장에서 처음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살짝 어색한 게 있다. 하지만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듯한 설렘도 든다. 어떤 분들은 그런 표현을 쓰시더라. 전우? ‘새로운 전우들과 호흡이 잘 맞을까’하는 설렘 반 두려움 반 하는 마음으로 첫 촬영장에 간다.
<용의자X>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분위기인데, 어떻게 봤나?
시간이 갈수록 내 작품에 대한 객관성을 잃어가는 것 같다. 감도가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이번 작품의 경우에도 시사회가 끝나고 ‘아, 또 이렇게 한 작품이 마무리 돼 가는 구나’를 가장 크게 느꼈다.
스스로에 대한 객관성을 잃어간다고 했는데, 대신 주위에서 당신의 연기를 객관적으로 봐 주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들은 뭐라고 하던가.
단점일 수도 장점일 수도 있는데, 내 주위에는 나를 영화배우로 보는 친구가 별로 없다.(웃음) 연기를 그냥 ‘류승범의 잡(job)’으로 보고, “수고했다” 해 주는 정도다. 대중적인 시선에서 “이번 영화는 재미있다/별로다”라고 솔직한 얘기도 해주고 말이다. 평가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대신 외부의 객관적인 평가에 취약한 면이 없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건, 류승완 감독님이라든지 최민식·황정민 선배님처럼 좋은 분들이 계신다는 거다. 그 분들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는 편이다. 그런데 내가 남의 말을 워낙 안 듣는 성격이라.(웃음) 내 인생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려는 경향이 강하다.
석고는 기존 당신이 보여줬던 캐릭터들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면이 있다. 대중들이 모르는 당신의 새로운 면을 선보이게 된 셈인데, 어떤가. 기대가 큰가, 걱정이 큰가.
성격상, 엎질러진 물에 대해서 신경 쓰거나 주워 담지 않는 편이다. 새로운 영화를 선보일 때 설렘과 걱정이 있기야 있지. 하지만 그게 ‘내가 어떻게 보여 질까?’에서 오는 감정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작품이 사랑받을 수 있을까’에서 걱정과 기대가 앞선다.
그동안 본능적으로 연기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면, <용의자X>에서는 감정을 누르고 있다는 인상이 크다. 변화에 어떤 계기나 플랜이 있었던 건가?
계기라기보다 작품에 맞춰서 가는 거겠지. 내가 사람 말을 잘 안 듣는데, 작품 할 때는 꽤 잘 듣는 편이다.(웃음) 특히 이번 작품에는 방은진 감독님이 원하는 정확한 코드가 있었다. 의견을 조율하는데 있어 감독님이 계속 ‘겐·…’ 아, 미안. 습관이 돼서 은어를 쓰게 되는데, 이해해 달라.(웃음) 감독님이 ‘겐또’를 잡으시기에, ‘이번 작품은 감독님 의견을 따르는 게 세계평화에 공헌하는 일이겠다’ 싶었다. 감독님이 내주시는 숙제도 충실히 해 가면서, 지시에 따라 연기했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웃음)
방은진 감독님이 내줬다는 숙제는 어떤 건가?
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나는 카메라 앵글 안에서 잘 걷는 배우가 좋다. 그런데 잘 걷는 배우가 흔치 않다”고. 그러면서 “내가 보기에 류승범은 잘 걷는 배우인데, 이번에는 기존 프레임에서 걷던 방법 말고 석고의 걸음걸이를 연구해 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걸음걸이라든지 여러 자세를 연구해 갔다. 그걸 가지고 또 감독님과 의견 조율하고. 방은진 감독님이 디렉션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주시는 편이다. 예를 들어 대사 하나에도 여기에서 ‘쉼표’, 여기서는 ‘느낌표!’ 그런 것들이 음계처럼 계산돼 있다. 감독님도 작품마다 다르시겠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본인의 페르소나를 원하셨던 것 같다. 배우들 연기가 마음에 안 들면, “컷!” 하고 들어와서는 직접 시연을 보여주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류승범이 생각하는 석고보다, 방은진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석고에 집중했다. 그런 지점에서 나를 버렸다고 하는 거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기도 하니, 온전히 나를 내어드리자’ 하면서 중심을 잡아갔다.
잘 걷는 배우 얘기가 나왔는데, 안 그래도 이번 영화에서 당신의 걸음걸이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꾸부정하게 걸으면서 설핏설핏 주위를 살피는. 그런 모습이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어렵잖나. 뭔가 리듬을 타야 어색해 보이지도 않고 말이다.
나는 틀에 갇히는 걸 본능적으로 못 견뎌 하는 스타일이다. 그에 비해 석고는 프레임이라든지 콘티에 굉장히 갇혀 있었던 것 같다. 당연히 힘들 수밖에. 그런 것들을 감독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그때 감독님이 해 주신 말 중 어떤 부분에서 설득을 당했냐면, “내가 그리고 싶은 석고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모습”이라는 거였다. 인생 자체도 그렇고, 동선이나 움직임도 그렇고. 김석고라는 인물을 내세워서 프레임의 틀 같은 걸 표현하고 싶으셨던 거지. 그래서 영화를 디테일하게 보면 석고가 거의 콘티스럽게 걷는다. 정지하는 것도 그렇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도 그렇고, 굉장히 콘티스럽게 연기한다. 작은 움직임 하나도 스태프들과 미리 계산해서 정확히 연기하려 했다.
여자 감독님과의 작업은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년)의 임순례 감독님 이후 처음이다. 남자 감독들이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여성 감독들이 당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 영화인들이 나에게 갖는 이미지가 조금 색다르긴 한 것 같다. 신보경 이사님은 내 손이 너무 섹시하다고 하시고.(웃음)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 일을 해서 그럴까? 다소 굴곡진 인생을 살아서 그럴까. 감싸주고 싶은 보호본능을 느끼시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다. 특히 성숙한 여자 분들에게.(웃음) 남자 여자를 떠나서 외부인들이 많이 얘기하는 류승범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이다. 야생에서 온 인물이기에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용의자X> 시사회 끝나고 이정범 감독님과 술을 마셨는데, 감독님도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그래서 말씀 드렸지. “그러면 나를 방생시켜 줘라! 놔 줘라!”라고.(좌중 폭소)
아직도 길들여지지 않은 것 같나? 한동안 많은 인터뷰에서 신앙 애기를 하던데, 뭔가 초탈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내가 자기 갈등을 많이 하는 편이다. 예민한 성격이기도 하다. 혹자는 에고이스트나 나르시스트에 가깝다고도 하는데 나에 대한 검열을 굉장히 심하게 한다. 스스로를 괴롭힐 정도로. 그 에너지가 외부로 적당히 표출되면 괜찮은데, 밸런스가 어긋날 때가 있다. 밸런스가 한 번 무너지면 예민하기 때문에 끝까지 가는 거지. 요즘은 그런 것들에서 조금 편해지고 싶어서인지, ‘이게 나구나’ 라고 그냥 인정을 해버린 것 같다.
굉장히 슬픈 건데, 결국은 내가 진다.
‘진다’라는 건?
우리가 사는 이곳은 개성을 온전히 존중하는 사회가 아니다. 어린이 되어 간다는 핑계로 자기 개성을 죽이는 사회다. 안타까운 건 그런 것들이 나이가 들수록 자연스러워 진다는 거다. 왜? 싸워도 진다는 걸, 아니까. 내가 원래 지향했던 건, 록스타의 삶이다. 때려 부수고 부셔지는 삶 말이다. 그런데 갈수록 용기가 없어진다. 괜히 미래를 생각하게 되고. 그런 것들이 결국은 타협이 아닌가 싶다. 그걸 타협이 아니라고 주장하면 오히려 더 깨는 거다.
석호는 숫자의 세계를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당신에게도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세계가 있나?
전혀 없다. 미세한 차이인데, 완벽주의자와 예민한 사람은 다르다고 본다. 나는 예민한 사람에 가까울 뿐, 완벽한 걸 추구하는 쪽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방의 성향을 보면, 자기 성향을 알 수 있잖나. 나는 너무 완벽한 사람에게 별로 매력을 못 느낀다. 소위 말하는, 엄친아? 그런 것들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웃음) 부러움의 대상이긴 하나, 리얼한 느낌이 아니라고 할까?
영화를 보면 수학적인 기호가 엄청 많이 나온다. 어렵지 않던가?
당연한 말씀을. 으하하. 충격을 받아서 스태프들에게 물어봤다. “정말 고등학생들이 이걸 배우냐”고. 더 놀랐던 건, “배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일동 웃음) 고등학생들 수준에 놀라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걸, 왜 배우지?’ 라는 생각도 들더라.(좌중 다시 폭소)
칠판의 수학 기호들은 직접 쓴 건가?
썼다기보다는 그냥 그린 거지.(일동 웃음)
석고의 사랑은 기묘한 부분이 있다. 그런 기묘한 사랑을 보면서, <페스티발>(2010년)에서 인형과 사랑에 빠진 상두(류승범)가 떠오르기도 했다. 비현실적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배우가 자신이 맡은 인물을 믿지 못하면 제대로 된 감정을 전달할 수 없다. 특히 사랑에 빠진 남자의 감정은 대사나 행동보다 표정과 느낌으로 전달되잖나. 그런 면에서 석고라는, 어쩌면 비현실적일 수 있는 캐릭터는 당신에게 숙제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용의자X>를 하기로 한 후에 일본영화 <용의자 X의 헌신>(2008년)을 봤다. 보면서 씁쓸했다. 이시가미(원작에서의 ‘석고’이름)라는 이 인물이 현대 도시의 아이콘처럼 보였거든. 어렸을 때 천재소리 듣던 사람이 지금은 루저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사람이 우리 주위 어딘가에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회 시스템에 들어가면서 자기 개성과 재능을 버려두고 살아가게 되는 사람 말이다. 내 주위에도 그런 친구가 몇 명 있다. 어렸을 때 홍대에서 천재라 불렸던 음악가인데, 40대가 된 지금은 루저가 돼 있다. 자기가 왜 루저가 됐는지도 모르다. 믿는 걸 하며 살았을 뿐인데, 빠르게 변하는 사회 트랜드 안에서 그 믿음이 가치를 잃고 말았다. 그런 걸 보면 씁쓸한 동시에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석고가 화선(이요원)에게 보여 준 사랑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사랑이라고 보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쉽지는 않겠지.
그게 칭찬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예민한 사람이어서 항상 주는 대로 받지 않는 편이거든.(웃음) 그 얘기를 듣고, 가시가 없는 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작자가 그리고자 했던 이미지를 잘 담아내지 못했다는 뼈있는 말일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용의자 X의 헌신>에서 이시가미를 맡은 쓰쓰미 신이치는 사실 굉장히 멋진 배우다. 어릴 때 ‘맨즈논노’라는 잡지를 즐겨봤는데, 거기에서 수트하면 그 배우였다. 아주 멋있는! 아주 젠틀한! 우리로 따지면 다니엘 헤니 같은 이미지의 배우였다. 그런 배우가 이시가미 역을 소화하기 위해 원작에 가까운 이미지로 외모를 바꿨다. 그런 면에서 원작자가 내 실제 모습이 ‘잘 생겼다/못 생겼다’를 얘기한 게 아니라, 본인이 이 영화를 보는 시각을 밝힌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자의 짧은 한마디에 그런 깊은 생각을!
내가 이래서 단점이다~ 피곤하다. 사는 게 피곤해.(웃음) 원작자가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의미로 말한 거라면 좋겠다.
조금 상충되는 지점이 있는 게 초반 인터뷰를 복기해 보면, 외부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부분에서는 또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까지 캐치해 낸다.
그게 뭐냐면! 아까 말했듯 나는 내 검열을 굉장히 심하게 하는 편이다. 나르시스트 일수도 에고이스트 일수도 있는데, 내 주제파악을 잘 한다.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도 하는 편이다. 주는 그대로 받지 않는다는 것은, 들어온 것을 내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없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영향을 주는 요소가 많을 뿐이다. 볼을 던져도 나에게는 그게 스트라이크가 될 수 있다. 스트라이크를 던졌는데 아웃이 될 수도 있고 말이다.
반대로 당신은 상대에게 스트라이크를 던졌는데, 상대가 볼로 받을 수도 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인생에 감사한 게, 내가 친구 복이 있다. 주위 사람들은 내 성격을 너무 잘 이해해 준다. 내가 어떻게 하든 크게 개의치 않고, 냅두고.(웃음) 오해가 생기면 소통을 통해 풀면 된다.
당신의 사생활까지 알려고 드는 주위의 시선은 어떤가.
큰 관심 없다. 관심이 없는데 너무 그쪽으로 치우치는 게 안타깝고 불편할 뿐이다. 개인적으로 쇼비즈니스 하는 걸 안 좋아한다.
이제까지 여배우보다, 남자배우와 많이 호흡을 맞춰왔다. 남자배우와 연기할 때 조금 더 강한 에너지가 나오는 인상인데, 이번 현장에서는 어땠나?
일단, 여자배우에 대해 울렁증이 있다. 여배우 앞에만 서면, 뭔가 자연스럽지가 않다. 그런 면에서 (이)요원씨에게 고맙다. 요원씨는 상대를 편하게 하는 사람이다. 털털하고 소탈하고 씩씩하다. 여배우라는 생각보다 동료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일종의 선입견인 것 같다. 류승범은 까칠할 것 같다,는 선입견을 가진 분들이 있다. 그게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는데, 사실 ‘케이스 바이 케이스’거든. 누구나 그렇지 않나. 그럴 때도 있고, 안 그럴 때도 있는 거다. 그런데 작업할 때는 워낙 예민하니까 스태프나 주위에서 그런 소문이 돌았던 것 같다. 스스로 통제가 안 될 때가 있으니까.
이런 선입견은 굳이 깨지지 않아도 괜찮겠다, 싶은 게 있나?
글쎄. 나에게 어떤 선입견들을 가지고 있는지 모두 알지 못해서.
‘타고난 연기자’라는 선입견?
하하. 그런 선입견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있다면야 정말 버리기 싫은 선입견이다. 아, 정말 잃고 싶지 않은데?(웃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부담이 과중되기도 한다. 내 입으로 이런 얘기 하는 게 조금 그렇지만, 내가 처음부터 잘 한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힘이 쌓여버렸다. 자신감이 지나쳤다고 해야 하나. (황)정민이 형도 그러더라. “가지려고 하면 더 잃는다”고. 연기라는 게 자신감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그게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한다. 아, 그리고. 얘기하면서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그런 선입견도 있는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나는 흥행작이 없다.
어? 그런가?
봐봐! 다 이런 반응이다.(웃음)
<부당거래>(2010년)는 잘 되지 않았나.
<부당거래>도 스코어를 들으면 깜짝 놀랄 거다. 바로, 이런 이미지. 사실 안 된 작품도 많고 크게 터진 작품도 없는데, 아닌 것 같은 이상한 이미지가 있다.
정말 그러네. 나쁘지 않은 이미지다.(웃음)
연기를 시작할 때, 막연하게 꾼 꿈이 있다. 영화배우로 불리고 싶다는 꿈. ‘유명인, 탤런트, 연기자’ 이런 거 말고 ‘영화배우!’ 상징적인 의미의 영화배우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등산을 갔다가 굉장히 기분 좋게 내려 온 적이 있다. 등산객들로부터 “영화배우 류승범씨!”, “영화배우 류승범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 괜히 뿌듯했다.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이나 대중매체들이 활성화되면, 영화배우만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움이라든지 유형의 이미지들이 많이 바뀐 것 같다. 예전처럼 영화배우는 보기 힘든 존재, 보려면 극장에 가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아주 밀접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 됐다. 내가 가지고 있던 영화배우의 이미지가 바뀌는 것 같아서 조금 아쉽다.
영화배우에 대한 동경이, 오래전부터 있었나 보다.
그 느낌을 <와이키키 브라더스>할 때 받았다. 그때 무명의 배우들과 연기했다. 지금이야 모두 엄청난 배우들이 됐지. 황정민, 박해일, 오광록, 박원상… 그런데 당시만 해도 모두 무명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냐면, ‘영화배우가 뭐길래 미쳐서 이러나. 돈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면서 뭐가 좋다고 그 인정받는 대학로 바닥을 버리고 와서 힘들게 이러나’ 했다. 당시 영화판에서는 무명이지만 연극무대에서는 인정받는 배우들이었거든. 우리 형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다시 또 그런 것들이 들어오니까 영화라는 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되더라. 뭔가 일루전(illusion)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거다. 메커니즘마다 다른데, 어떤 메커니즘은 자기를 위해서 한다. 자기가 더 돋보이고, 그 작품이 끝나면 자기가 얻는 부수익이 크고. 그에 비해 영화는 나누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우 혼자 모든 걸 가져가지 않는다. 영화가 잘 되면 감독도 잘 되고, 촬영과 조명 스태프들도 인정받는다. 영화가 안 됐는데, 배우만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 그래서 영화는 공동의 작업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함께 머리 맞대고 창작을 한다는 점에서 아티스트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런 부분에서 사람들이 영화배우에게 환상을 갖는 게 아닌가란 생각을 해 본다. 왜 조금 거지처럼 하고 다녀도 뭔가 스페셜 해 보이는 게 있지 않나. ‘아, 작업하고 있나보다’ 이러면서.(웃음)
그건 분야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예능을 존중한다. 왜냐하면 나는 못하는 거니까. 그건 그 분들만이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자. 예능에서 날고 기던 분들이 가끔 영화에 카메오로 나오는데, 그때는 또 예능에서 한 것만큼 못한다. 그러니까 이건 메커니즘의 차이인 거다. 이 쪽 그라운드에서 그 쪽 그라운드를 뭐라 할 필요도 없고, 그 쪽에서 이쪽을 뭐라 할 필요도 없는 거지. 얼마 전에 어떤 기자님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 “어떤 배우들은 이런 시기를 빌어 팬 서비스 차원에서 팬들과 교감 한다”고. 그래서 내 성향을 말씀드렸다. “축구선수가 팬서비스 하려고 야구장 가서 방망이를 휘두를 필요는 없다”고.
비유가 절묘하다.
팬들이 영화배우에게 원하는 최소의 팬서비스는 연기라고 생각한다. 극장에서 좋은 감동을 주는 것보다 더 한 팬서비스가 어디 있나. 내가 예능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다. 디제잉(Djing)처럼 내가 즐기는 게 자연스럽게 팬서비스로 이어지면 너무 좋지. 그런데 그게 아닌데, 굳이. 굳이 상대를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실제로 내가 방송국에 가면 사람들이 불편해 한다. 나 역시 편하지 않다. 아마, 시청자들도 류승범이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느낄 거다. 그러면 시청자들도 불편하게 되는 거다. 오히려 내가 분위기를 해치게 되는 거지.
디제잉할 때의 류승범과 연기할 때의 류승범 사이엔 얼마나 큰 격차가 있나?
많이 다르다. 디제잉 할 때는 무아지경이다. 영화 현장에서는 계산을 해야 하고 상황을 컨트롤해야 하니까, 날이 계속 서 있다. 그런데 클럽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완벽하게 무장 해제된다. 어떻게 보면 디제잉은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배설의 의미도 있고. 그 순간만큼은 통제를 안 하려고 한다.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 디제잉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여행! 내가 이 직업을 놓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간을 계획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주위에 회사 다니는 지인들이 많다. 그들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게, 시간을 마음대로 못 쓴다는 거다. 이 사람들도 여행을 굉장히 가고 싶어 하거든. 머릿속으로는 아마 만 번도 넘게 다녀왔을 거다. 그런데 상황상 그러지 못한다. 우리가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노동한 만큼 즐길 시간은 주어져야 하다고 본다. 가끔 또래 친구들이 휴가 받은 걸 보면 깜짝 놀란다. 기간도 그렇고 보너스도 그렇고. 이건 뭐, 휴가 가지 말라는 거지. 우리 사회가 너무 야속한 게 아닌가 싶다.
언론매체 사장님들에게 그 말 좀 해 달라.
해 드릴까?(웃음)
차기작은 류승완 감독님과 함께 한 <베를린>이다. 형이랑 작업하면, 보너스는 조금 챙겨주나?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건 형의 영역이 아니니까.(웃음)
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