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축학개론>,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 등 최근 90년대를 추억하는 영화와 드라마들이 많이 나온다. 지금 20대 후반~30대 중반들에겐 당신의 음악도 9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강한 촉매제다. 어떤가? 누군가가 과거를 추억할 때 그 시간에 당신이 머물고 있는 느낌이.
좋다. 그래서 콘서트를 한 번 하려고 한다. 나를 좋아했던 팬들이 이제 30대가 되고 남편이 생기고 아내도 생겼을 텐데, 그들과 함께 하는 콘서트를 하고 싶다. 소리 지르는 콘서트 말고 차분한 분위기의 콘서트를 말이다.
당신에게 90년대는 어떤 시대로 기억되고 있나.
그땐 너무 정신없었다. 삶 자체가 그랬다. 일어나면 현장에 나가 있고, 일어나면 노래 부르고 있고. 삶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런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여유를 찾고 살고 있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로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시절이 있다면?
나는 지나간 일에 연연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오늘이 제일 좋은 것 같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옛날을 그리워해봤자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지난날을 추억하기엔 내가 아직 너무 어리지 않나? 100살까지 살아야 하는데.(웃음)
100살 까지나?
우리 시대에 100살이면 그렇게 오래 사는 게 아니다.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
굵게 산 순간들도 많다.
굵게 살 순간들이 앞으로 더 있을 거라 생각하다. 그 순간은 70에 올 수도 있고, 80에 올 수도 있다.
같이 먹으면서 얘기 하자.(웃음) 내가 떡볶이를 굉장히 좋아한다. 초등학교 때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어서 신문 배달도 했었다. 그때 받은 돈이 1만 2,000원이었을 거다. 그거 받아서 아버지 내복 한 벌 사 드리고, 나머지 5,000원을 모두 떡볶이 사 먹는데 썼다. 그러고 나서 몇 년 동안 못 먹었다. 질려서.(웃음) 그런데 또, 시간이 지나니까 먹게 되더라고. (떡볶이를 한 입 가득 넣고 오물거리며) 음~ 맛있다~
떡볶이 말고 또 뭔가를 얻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게 있나?
많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용인자연농원(지금의 용인애버랜드)을 가는 게 꿈이었다. 거기에 가기 위해 빈 병을 주웠다. 빈 병 주워서 번 돈으로 옷도 샀다. 청 반바지에 하얀 스타킹, OB베어스 티셔츠.(웃음) 그걸 입고 5월 5일에 자연농원에 갔다. 그 날 놀이기구란 놀이기구는 정말 다 탔을 거다. 누구랑 갔냐고? 혼자. 우리 부모님은 나를 놀이공원에 데려갈 입장이 아니었다. 부모님 손잡고 다니는 애들 피해 다니면서, 혼자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난다.
짠할 수 있는 이야기를 왜 이리 천진난만하게 하나.(웃음)
어렸을 때부터 생활력이 강했다. 아버지가 “돈을 벌어 와라”가 아니라,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신문 배달도 하고,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사실 신문을 돌린 가장 큰 이유는 아빠에게 내의를 사 드리고 싶어서였다. 사 드리고 남은 돈으로 떡볶이를 먹은 거였다.
아이들에게 아빠의 이런 어린 시절 얘기를 해 주나?
아니. 말 해 줘도 아직은 못 알아듣는다.
아이들이 원하는 걸 다 해 주는 아빠인가?
다 해 준다. 대신 조건을 둔다. 피자가 먹고 싶다, 초콜릿이 먹고 싶다, 이런 모든 게 결국은 자기가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거잖나. 그래서 나도 아이들에게 행복을 요구한다. “너희가 밥 먹는 걸 보는 게 내 행복이니, 군것질 하는 대신 밥 한 그릇을 다 비워라.” 하는 식으로 말이다. 또 하나. 실수에 대해선 용납을 하는데, 머리 굴리다가 걸리면 응징을 한다. 예를 들어 형하고 동생이 싸웠어. 그러면 무릎 꿇고 손들게 한 다음, 10분 간격으로 계속 물어본다. “왜 싸운 거야?” 처음엔 서로의 탓만 하던 애들이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오줌을 지리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제가 잘못 했어요” 울면서 용서를 빈다. 그러면 나는 또 “너희가 왜 잘못했는지 알지? 잘못한 행동에 대해서는 처벌을 받아야해.” 하면서 손바닥을 때린다. 대신 착한 일을 하면 스티커를 하나씩 붙여준다. 스티커를 다 붙이면 장난감 가게로 데려가서 “너희가 가지고 싶은 거 다 가져” 이런다. 뭐든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내가 그렇게 컸다. 우리 엄마가 엄청 엄했었거든. 용돈을 받고 싶다? 그러면 심부름을 꼭 해야 했다. 그냥 주는 법이 없었다. 뭐든 그에 상응하는 일을 했어야 했다.
영화 얘기를 해보자. <공모자들> 보다 먼저 찍은 영화가 <창수>다. <창수>가 작년 말에 개봉할 예정이었는데 연기됐고, <비처럼 음악처럼>도 개봉일이 연기…
(질문을 가르며) <비처럼 음악처럼>은 영화가 아니다. 그건 온라인 드라마로 찍은 거였다. 온라인에만 공개한다고 해서 출연한 거지, 영화라고 했다면 안했을 거다. <창수>의 경우, 개봉일 연기는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공모자들> 촬영하고 있을 때 이 영화를 제작하는 타임스토리 대표님이 큰 결정을 했다. <창수>도 그렇고 <공모자들>도 그렇고 둘 다 내가 코미디가 아닌 진지한 연기를 선보이는 작품인데, 그 변화의 폭이 <창수>가 조금 약하다. 어중간한 걸 먼저 보여주고 <공모자들>을 하면 손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 대표님이 <창수>를 아예 사 버리셨다. <창수>를 사서 <공모자들> 뒤로 붙이기로 한 거지. 그렇게 해서 <창수>의 개봉일이 미뤄지게 된 거다.
당신에겐 좋은 기회인 거네.
그렇다. 나에게는 너무 좋은 상황이 된 거다.
타임스토리 대표의 정체가 궁금하다. 도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사실, 그 분이 내 ‘빠’다.(웃음) 14년 전인가? <엑스트라>(1998년)라는 작품을 찍을 때, 내 뒤에서 포졸 1을 하고 있던 연기자 지망생이었다. 듣자하니, 당시 대표님 꿈이 ‘임창정처럼 되는 거’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연기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연출로 진로를 바꾸셨다. 그러고 나서 내가 <해적, 디스코왕 되다>(2002년) 할 때 연출부 막내로 들어왔다. 마침 그 영화로 오달수 선배님이 데뷔를 하셨고. 그때 이 친구가 ‘언젠가 내가 임창정과 오달수가 주연하는 작품을 꼭 만들겠다’고 다짐을 했다더라.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이 일을 밟아온 거다.
굉장히 드라마틱한 사연이다.
신기한 일이다. 원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으니까.
<창수> <비처럼 음악처럼> 이번 <공모자들>까지. 모두 임창정 기존의 이미지와 거리를 둔 작품들이다. 연달아 세 작품이 그러니까 ‘임창정이 변신하려고 독하게 마음먹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변신은 늘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일단 코미디 외의 시나리오가 잘 안 들어왔다. 들어와도 감독과 투자자가 나를 못미더워했다. 그들이 나에게 원하는 건 ‘남을 웃기는 재능’이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이 너무 고맙다. 감독님과 투자자들 모두 나를 믿어준 거니까. 이 영화로 인해 앞으로 다른 스타일의 연기도 할 수 있게 됐다.
‘때가되면’이 빠졌다. ‘때가되면’ 변하겠다는 거였다. 변신에 대한 갈망은 늘 있었다. 하지만 마음먹는다고 해서 당장 변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시간이 흘러서 때가 되면, 변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때를 기다린 거다.
절묘한 타이밍에 변신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나.
그런 것 같다. 38세에 그 기회가 왔으니까. 아, 내가 올해부터 한국 나이를 안 쓰기로 했다. 만 나이를 쓰려고. 하하하.
(웃음) <공모자들> 포스터를 보면 당신의 표정에서 묘한 긴장감이 풍긴다. 처음이지 않나 싶다. 과거의 많은 포스터에서 당신은 늘 과장되게 웃거나 망가지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이번 포스터를 보고 굉장히 만족했다. 찍으면서도 굉장히 신났다. 멋있는 척을 해도 되니까.(웃음) 새로운 경험이었다.
<공모자들> 완성본은 봤나?(임창정과의 인터뷰는 언론시사회 전에 진행됐다.)
내일 기술시사회로 볼 예정이다. 60-70% 완성된 건 봤는데, 그때보다 더 좋아졌을 거라 생각한다. 60-70% 본 걸로 얘기하자면… 내가… 내가 참 잘 생기게 나왔더라고.(웃음) 여러 가지로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내일 기술시사회가 더욱 기대된다.
감이 잘 맞는 편인가?
거의 맞는 편이다. 촬영하다보면 마음에 탁 걸리는 영화들이 있다. <색즉시공> 때가 그랬다. 찍으면서 ‘빨리 개봉만 해 봐라’ 이랬다. 느낌이 좋았다. 이번 영화도 그런 기분이 든다.
이번 영화에서 부산 사투리를 구사했는데, 사투리 연기가 처음은 아니다. <만남의 광장>에서도 경상도 사투리를 했었다. 그때 현지인들에게 반응이 아주 좋지는 않았던 걸로 안다.
그때 사투리는 억지였다.(웃음) 그런데 사실 그 지역 사람이 아니고서는 완벽한 사투리를 구사하기 힘들다. 어떤 배우든 겉핥기라고 보면 된다. 사투리엔 그 지역 사람 특유의 정서가 담겨 있다. 그건 한두 달 연습한다고 되는 게 절대 아니다. 하지만 어색한 사투리라고 해서, 그 배우가 대충 연습한 건 아니라고 본다. 분명 피나는 노력을 했을 거다. 그리고 우리가 그 지역 사람만 보여주려고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잖나. 조금 여유 있게 봐 주면 좋겠다.
그래서 걱정을 많이 했다. 부산에 내려가서 사투리 특훈도 받았다. 그런데 웃긴 게, 부산에 사는 사람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사투리를 구사한다는 거다. 부산 출신들도 지들끼리 싸운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B에게 사투리 사사를 받은 다음 날 A를 만나. 그러면 A가 그래. “니, 그거 사투리 아니다. 오데 그렇게 쓰는데. 아이다.” 이런다. 그런 다음에 C를 만나. 그러면 이번엔 C가 그런다. “뭐하노? 그런 사투리는 읍따” 내가 보기엔 다 같은 사투리인데, 뭐가 다르다는 건지. 혼동스러웠다.
정말 막막했겠다.
촬영할 때는 더 심했다. 촬영장에 부산 토박이가 세 명 있었다. 붐 드는 친구가 부산 토박이. 슬레이터 치는 애도 부산 토박이. 오퍼레이터도 부산 토박이였다. 내가 “준식아, 입에 단 게 몸에 좋다 카드나” 대사를 하면, 붐 들고 있던 애가 “감독님 좋습니더~” 이런다. 그런데 슬레이터 치는 애가 “그거 아닌데예?” 말하면서 막아서. 옆에 오퍼레이터는 또 “둘 다 아닌데~”하면서 지들끼리 싸운다. 이건 도대체 사투리를 어떻게 하라는 건지. 감독님도 혼동이 되셨는지 나중에는 “슬레이트 치는 은용이 너만 얘기 해. 다른 애들은 신경 쓰지 마”이러셨다. 이후부터 감독님이 “레디 액션!”하면 - 내가 대사 하고 - 슬레이트 치는 애가 “맞습니다.” 이런 식으로 촬영이 진행됐다. 문제는 감독님이 오케이해도 옆에서 붐 드는 애가 계속 갸우뚱갸우뚱~ 영화 찍는 내내! 어찌나 신경 쓰이던지, 환장할 뻔 했다.
예민한 촬영현장에서 신경 쓸 게 한 두 개가 아니었겠다.
정말 그랬다. 감독님이 “컷! 은용아 괜찮아?” 물어볼 때마다 나는 처분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있어야 했다. 이건 신인도 아니고. 기분이 정말… 으하하하.
현장에서 김홍선 감독님이 엄청 독했다고 들었다. 많이 괴롭혔다고.
일부러 괴롭혔겠나. 영화를 조금이라도 잘 찍으려고 그러신 거다. 그런데 너무 하니까~ 고집이 너무 강하시니까~(웃음) 하루는 왔다 갔다 500미터를 17번 정도 뛰었다. 숨차서 헉헉대고 있는데 감독님이 와서 “선배님 100미터 정도 지점에서 오른발이 살짝 틀어졌던 것 같은데요” 이런다. 그렇게 얘기하는데 내가 어쩌겠나. “다시 뛸게요” 이렇게 되는 거지.
사장이 깐깐하면 부하직원들이 의기투합하기 마련인데.
거의 그런 분위기였다고 보면 된다. 달수 형이 불평불만 없이 모범을 보이시는 분이다. 3일 밤을 꼬박 새는 씬도 아무 말 없이 하신다. 선배가 그렇게 하는데, 어쩌나. 그 밑으로는 다 죽어야지. 그런데 그런 오달수 선배조차도 중국 촬영 때 “(오달수 말투로)쩝… 뭐, 저런 게 다 있노? 창정아, 우리가 앞으로 10-20년 연기를 더 할 텐데 저런 감독은 다시 안 만나겠재?”하셨다.(일동 웃음)
영화판에는 이런 경우가 많다. 감독과 배우가 영화 찍을 때 뜯고 싸워도 흥행 성적이 좋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호형호제하고, 반대로 좋았다가도 흥행에 실패하면 서로 머쓱해져서 멀어지고.
맞다. 그런 경우가 많다. 우리는 호형호제가 돼야지.(웃음)
이번에는 전혀. 일단 감독님이 관여를 아예 못하게 했다. 애드리브도 허용되지 않았다. 디렉팅 이외의 것을 하면 “그건 임창정같다”며 하지 말라고 했다. 처음에는 너무 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감독님이 옳았다고 본다. 덕분에 이번 작품에서는 임창정이 확실히 덜 보인다. 작품 하면서 감독님의 센스와 열정을 많이 배웠다.
영화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인터뷰 하려니, 내용적인 부분을 건드리지 못해 아쉽다. 그래서 묻는데 만약 영화를 본 기자라면 어떤 질문을 할 것 같나?
“평소 본인이 잘 생겼다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 하하하
하하. 잘생겼다고 생각하나?
이번 작품엔 잘 생기게 나왔더라고.(웃음) 영화적으로 질문을 한다면 “이런 일(불법 장기밀매)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거라 생각하세요?”라고 물어볼 것 같다. 그에 대한 답은 “안 봐서 모르겠다”일 거고. 그런데 취재한 감독님 말에 따르면 현실에서 적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없으니까, 불법적인 행태가 많이 오고 간다고 들었다.
당신 성격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점은 뭔가?
웃으려고 하는 거. 웃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려는는 거.
반대로 고치기 힘든 단점이라면?
분위기 파악 못하고, 또 웃는 거. 하하하.
임창정 인생을 영화로 만든다면, 가족 외에 꼭 등장해야 할 주요 인물이 누가 있을까?
매니저들. 매니저들이 자기 배우나 가수를 어떻게 생각 하는지, 자기 보물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그것만으로도 모든 이들을 울릴 수 있을 것 같다. 또 연예인과 매니저는 부부보다 가깝게 지내다가 때가 되면 헤어져야 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매니저와 스타 사이엔 좋지 않은 일도 종종 일어나지 않나.
나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다.
올해로 40대에 접어든 임창정 인생의 화두는 뭔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을까’가 아닐까 싶다. 이제 그럴 나이다. 가족을 지켜야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돈을 너무 쫓겠다는 건 아니다. 가치 있게 벌어서, 가치 있게 쓰고 싶다. 넘쳐나면 기부도 하고 주위 사람들이랑 나눠서 쓰고도 싶다.
지금은 같이 안 산다. 혼자 나가서 살아 보라고 방을 얻어줬다.
ZED와 6년 넘게 함께 산 걸로 알고 있다. 심지어 결혼 후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당신도 힘들 때 누군가에 집에 얹혀 산 적이 있는데, 그런 기억들이 작용한 건가.
별 다른 의도는 없다. ZED 뿐 아니라 누군가 나에게 기대면 마음은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는 거고 말이다.
당신은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굉장히 잘 챙기는 스타일 같다. 뮤지컬 <빨래>에 무보수로 출연했던 것도 제작자 김희원과의 16년 전 약속 때문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자기 사람에게 의리가 있는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반면 아군과 적군이 확실할 것 같다는 예감도 살짝 드는데.
맞다. 그래서 욕도 많이 먹는다. 내 생각은 그렇다. ‘열심히 살거나, 착하거나.’ 둘 중에 하나만 있으면 세상 사는데 아무 문제없다고 본다. 그런데 두 개 다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실하지 않으면서 착하지도 않은 사람들 말이다. 예를 들어 요리 실력이 형편없는데 친절하지도 않은 음식점에 가면 화가 난다. 자기 책임을 다 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다. 그런 것만 아니면 나는 사람을 잘 믿는 편이다. 그래서 상처도 많이 받는다. 믿었던 사람이 아픔으로 다가오면… 상처를 받는다.
그럴 때도 웃으려 하나?
인정을 하려한다. 그럴만한 사정과 환경이 있으니까 저러겠지 한다. 나 또한 소위 잘 나간다고 했던 시절에 변했다는 말을 들었었다. 누군가가 손가락질 하며 “임창정 싸가지 없어졌어” 라고 얘기 했다.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지라도, 내가 은연중에 변한 모습을 보였으니까 상대방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본다. 그런데 생각해 봐라. 환경이 바뀐 거잖나. 주위에서 자꾸 “임창정! 임창정!” 해주는데 변하지 않으면, 그건 신이거나 안 바뀐 척 가면을 쓰고 있는 거다. 내가 그런 경험이 있다보니, 옛날에 친절했던 사람이 인기 얻은 후에 와서 어깨에 힘주고 다녀도 인정해 준다. 당연한 거니까. 그 사람이라고 매일 굽히며 살 수는 없지 않나.
‘임창정식 코미디’라는 말이 있다. 세간의 평가를 차치하고 어떤 배우가 자신의 스타일을 입는다는 건 대단하다고 본다. 당분간 ‘임창정식 코미디’를 볼 수 없을 텐데, 임창정식 코미디 대신 어떤 수식어로 새롭게 불렸으면 좋겠나.
배우. 코믹 전문 배우가 아니라, 그냥 배우 임창정이라 불리고 싶다.
2012년 8월 29일 수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2012년 8월 29일 수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