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별 지구. 우주의 입장에서 보자면 다른 별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겠지만 수많은 지구 중심적인 SF 작품에서 지구의 아름다움과 풍부함에 대한 예찬은 익숙하다. 얼마나 자부심이 대단한지, 지구는 항상 위험한 외계인들의 목표가 되었고 위협은 항상 치명적이었다.
대개 지구를 노리는 외계인들은 논리가 빈약하며 엉성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혹은 영화에서 이유 자체가 모호한 경우도 부지기수. 지구를 노리는 외계인이란, 치밀한 SF적 상상력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가공할 적의 배역이 필요한 작가의 안이한 선택이기 쉽기 때문이다. 무작정 적이 필요한 상황에서 편하게 가져다 놓은 외계인에게 앙상한 이유를 붙이는 정도. 여하간 키아누 리브스의 <지구가 멈추는 날> 개봉차, 대관절 왜!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공하며 이 땅에 자꾸 들락날락하는지 그 이유를 함 살펴봤다.
지구를 노리는데 이유가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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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아예 이유 자체가 필요없다. 외계인이 지구를 노리는 이유는 어쨌거나 심오하고 판단하기 힘들며, 그래서 더 무섭고 암울하다. 살기 위해서 도망칠 뿐이다. 원작을 거의 그대로 옮겨왔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5년도 영화 〈우주전쟁〉이 꼭 그렇다. 지구에 인류가 문명을 이루기 전부터 수백미터 아래 지하에 잠들어있던 외계인의 무기가 난데없는 번개를 맞고 깨어난다. 엄청난 힘을 갖추고 있고, 지구인의 온갖 무기도 통하지 않는 위협적인 삼발이(트라이포드)는 무차별 살육을 감행하고, 어떤 이유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은 그저 도망칠 뿐이다. 의도를 열심히 짐작할 만한 장면이 없지는 않지만, 영화가 관심있는 것은 외계인의 습격이라는 이름으로 형상화한 전인류적 재앙이다. 대규모 살상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와중에 살아남는 것, 다큐멘터리적 재난영화의 표피에 외계인을 씌운 영화 〈우주전쟁〉은 허무한 마무리마저도 원작과 같다. 이미 100년이 지난 원작의 엔딩을 그대로 가져온 덕분에 자극적이고 극적인 현대 SF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의 원성을 들었지만, 무차별 재난의 위력은 여전하다.
지구 공격에 딱히 이유가 없기는 전투 벌레들의 습격을 다룬 <스타쉽 트루퍼즈>도 마찬가지다. 원작 소설과 영화는 많은 면에서 다른 작품이지만, 갑작스러운 벌레들의 공격으로 대도시가 박살나고, 인간과 벌레들이 전면전으로 맞부딛치는 이야기는 같다. 영화의 흥행실패와 영화 개봉 이듬해 발매한 국민게임 〈스타크래프트〉의 테란 에피소드와 특정 장면이 닮은 까닭에 가려졌지만, 냉정하게 벌레들이 지구를 공격한 이유를 따져보면 … 글쎄. 마땅치 않다. 물리적으로 압도적인 〈우주전쟁〉이나 위협적인 〈스타쉽 트루퍼즈〉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도 세 번에 걸쳐 영화화된 SF소설 〈신체강탈자의 침입〉 역시 외계인들이 지구에 들어와 인류를 대체하려는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하루 밤 새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순식간에 모르는 괴물로 바뀌는 설정도 으스스하지만 그 이유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공포가 더한다. 영화 제작자는 이유를 설명해야할 강박이 사라져 더 자유분방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기도 하다. 오히려 외계인이 지구인을 대체하려한 이유를 설득력있게 제시하려 시도한 최신작 〈인베이젼〉이 리메이크 사상 가장 무섭지 않은 각색으로 회자되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
앙상한 이유를 확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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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없는 지구정복은 SF장르의 클리셰이기도 하고, 비슷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물릴 만큼 익숙한 소재이기도 하다. 쌓이고 쌓여 외계인의 지구정복이라는 소재를 그대로 이용하기 싫어지는 것도 당연할 듯, 마음 먹고 웃기려는 작가에게 지구정복 소재는 코미디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진지하게 외계인과 인간의 첫 만남을 그려냈던 아서 C. 클락의 〈유년기의 끝〉은 그렇지 않았지만, 소설에서 외계인 등장 장면을 차용했음직한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는 최대 규모 미니어처를 폭발시키며 얻어낸 스펙타클을 위해 외계인이 지구를 정복하려는 이유따위는 날려버렸다. 단순명쾌하게 (아무이유없이) 지구를 노리는 외계인은 역시 간편하게 적으로 간주되고, 천신만고 끝에 적을 제압하며 영화는 흘러간다.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를 확대하면 팀 버튼의 1996년 영화 〈화성침공〉같은 작품이 된다. 우스꽝스러운 외계인과 단순하다 못해 어처구니없이 과장되어 웃긴 침공 이유, 멍청하게 대응하는 지구인까지 〈화성침공〉은 장르의 클리셰를 유머의 도구로 노골적으로 활용하는 영화다.
당시 기준으로도 외계적으로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했던 〈화성침공〉은, 지금보면 더욱 화려하다. 이미 당대에 스타였던 잭 니콜슨, 아넷 베닝, 피어스 브로스넌, 글렌 클로즈, 나탈리 포트먼에 마이클 J. 폭스가 출연한 영화였는데, 지금 기준으로는 단역으로 출연한 사라 제시카 파커와 잭 블랙까지 스타덤에 올랐다. 그에 비해 〈인디펜던스 데이〉 당시의 윌 스미스는 당시 이제 주목받기 시작하는 스타였고, 할리웃에서의 경력이라고 해야 (당대의 코미디 스타) 마틴 로렌스와 함께 주연을 맡은 〈나쁜 녀석들〉의 깜짝 히트 밖에는 없었다. 놀랍게도 〈인디펜던스 데이〉이후 이 용감한 남자는 두 번이나 더 지구를 구할 역할을 맡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코미디다. 음모이론과 정보기관에 대한 과장이 외계인과 만난 코미디 영화 〈맨 인 블랙〉 시리즈가 그것. 쿨한 유머를 선보인 〈맨 인 블랙〉 첫번째 편이 의외의 대형 히트를 거두며 윌 스미스가 대형 스타로 발돋음하기도 했거니와, 어처구니없는 지구정복 이유가 당연하게 느껴지게 만든 영화의 힘도 대단했다.
지구정복에 대한 진지한 고찰
막상 진지하게 ‘지구정복’이라는 주제를 다루려고 들면 야릇해지는 것이, 외계인에게 유치하지 않은 마땅한 이유를 주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드코어 SF에서 진지하게 외계인과 인류의 첫만남을 그린 영화가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나 아서 C. 클락의 소설 〈라마와의 랑데뷰〉처럼 지구정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은 ‘지구정복’이라는 소재의 본질적인 유치함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점령에 논리적 이유를 붙이기란 얼마나 힘든가? 그러나 그런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어서 복잡한 등장인물을 통해 풀어낸 수작이 있기도 했다. 고전으로 추앙받는 1951년작 〈지구가 멈춘 날〉이 바로 그런 영화.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안고 지구로 내려온 한 남자와 공포스러울 만큼 위험하며 속을 알 수 없는 한 로봇이 지구멸망의 비밀을 쥐고 있는 내용이다. 올 겨울 리메이크로 개봉하는 〈지구가 멈춘 날〉의 원작.
로봇스럽게 딱딱한 연기로 유명한 키애누 리브스는 오랜만에 적역을 맡은 듯 하다. 공포스러울 만큼 기계적으로 지구의 암울한 미래를 이야기할 키애누 리브스 버전 클라투. 공포스럽고 진지한 최후가 다가온다.
2008년 12월 22일 월요일 | 글_유지이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