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리얼하게 나왔다는 걸 알겠더라. 특히 바짝바짝 붙여 찍은 클로즈업이 많은데 그런 것들이 우리 영화의 색깔을 잘 보여준다. 큰 화면에서 보니까 굉장히 세고 라이브한 날것의 느낌이 잘나와서 좋았다.
시사회 후 반응이 좋다. 평단은 물론이고 시사회를 본 일반 관객들도 호평이 많더라. 고무되지 않나?
아직은 그런 걸 편안하게 못 본다. 왜냐면 개봉을 하지 않았으니까 아직까진 긴장상태가 남아있기 때문에. 물론 이제 처음으로 약간 긴장이 풀리고 짜릿한 느낌이 왔던 건 기자시사 때였다. 기자간담회를 하면 기자분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떤 기운들이 느껴진다. 근데 그때 이 양반들이 제법 뿌듯한 걸 본 것 같아하는 느낌이 들어서,(웃음) 일단 합격이 됐구나. 일단 기분 좋구나. 관심들을 갖네, 싶었지. 그리고 VIP시사 때 동료들이 너무 좋아해주고.
최근 4편의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로 호평을 얻었다.
내가 작품 복이 좋은가 보다. 배우 한 명이 온전히 연기를 잘한다 해서 연기 잘한다는 말이 안 나오거든. <천하장사 마돈나>나 <타짜>나 <즐거운 인생>이나, 영화적인 퀄리티가 있고 분명한 내용이 있는 영화고 거기서 내가 맡은 캐릭터의 몫을 다했을 때, 온전히 연기력에 대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난 굉장히 운이 좋았지. 앞으로의 길이 부담스럽다거나, 사실 뭐, 난 이런 건 별로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나이가 30대도 아니고, 이미 40인데 생각해봤자 별 수도 없고.(웃음) 그냥 계속 주어지는 대로, 나에게 다가오는 좋은 배역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이 다시 생긴다면 좋을 것 같다.
부상이 있진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과감한 액션이 많았다. 특히 지금까지의 출연작 중 가장 격렬한 작품이기도 했고.
우리가 사실 실제로 다친 건 한번인데, (하)정우가 뛰다가 미끄러진 씬 있지. 그 씬은 실제로 미끄러진 거다. 그래서 정우가 찰과상 입은 거 외에는 한번도 다친 적 없다. 그래서 우리가 환상의 호흡이라고 사람들이 그러더라. 찍는 사람들도 보면서 놀라는 게, 우리가 싸우는 장면 봤겠지만 쉽게 말해서 사실 막싸움이잖아. 이건 완벽한 합을 짜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대충 30%정도의 큰 너비만 짜놓고 나머지는 즉흥이었거든. 거기서 이제 감독의 주문은, 정말 리얼하게 싸워달라. 근데 한군데도 안 다친 건 두 배우가 초긴장상태에서도 상대방을 배려하고 신뢰했다는 거지. 목을 조를 때도 보는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 조르는 것처럼 보여도 항상 여지를 남겨서 이 친구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숨통을 튀어주고. 계속 그걸 반복했는데 우리는 서로에 대한 신뢰감만으로 게임 끝냈지. 일사천리로.
캐릭터는 상극이지만 배우들끼리는 호흡이 상당히 중요했다. 특히 서로 상대 캐릭터의 비중을 잘 보좌해주는 것도 중요했을 것 같은데 그런 면에 있어서는 하정우의 연기가 상당한 도움이 됐을 법하다.
하정우는 진짜 120% 이상 잘해줬다. 후배지만 정말 뛰어난 감수성의 소유자 아닌가. 이 친구는 매 순간 가식적인 연기를 정말 한 순간도 하지 않았다. 그 힘은 하정우라는 인간이 가진 어떤 정서의 힘일 것 같은데,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대단하지. 사실 난 옛날부터 하정우란 배우를 정말 좋아했다. 하정우가 찍었던 <용서받지 못한 자>와 <시간>도 보면서 한국남자배우 중에 저렇게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누군가 싶었거든. 그런데 지영민으로 캐스팅됐다는 얘길 듣고 속으로, 잘됐다! 만나고 싶었는데, 했지.(웃음) 그런데 하정우도 역시나 윤종빈 감독하고 사석에서 김윤석 선배님과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하더라. 서로 잘 됐지.
신인 감독과의 작업이 부담스럽진 않았나?
일단 우린 감독을 만나기 전에 시나리오를 먼저 만난다. 난 일단 시나리오에 합격점을 줬다. 스토리가 굉장히 특이하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지문도 별로 없고 대사도 간결한데 그 사이의 여백에서 굉장한 게 보이더라. 그건 이 시나리오가 하루 아침에 완성된 게 아니라 정말 썼다 지웠다를 수십 번 반복한 정성스러운 시나리오라는 거, 이건 휴양지에 앉아서 쓴 게 아니라 정말 발로 뛰면서 오랜 기간을 통해서 만들어진 숙성된 시나리오라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감독할 사람을, 이 시나리오를 쓴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만나봤더니 역시나 한 작품을 임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의 모습이 느껴졌다. 신인감독답지 않은 소신과 직관력, 밀고 나갈 수 있는 힘, 그게 다 느껴졌다. 이 사람, 이 친구한테. 진짜 해보고 싶었지. 그래서 같이 해보자고 결심했고. 사실 <추격자>를 결정한 건 조금 일찍이었다. <즐거운 인생>을 하기 전에, 2006년도 12월 달에 이미 만나서 출연하기로 했으니까. 내가 잠깐 갖다 올 테니까 기다려라,(웃음) 그랬더니, 가능하다. 어차피 우리는 8월 달부터 들어가니까, 이러더라. 그래서 3월 달부터 5월 달까지 <즐거운 인생>을 찍고 돌아와서 <추격자>를 찍었지.
촬영에 난관이 많았을 거 같다. 대부분 밤 촬영이었고, 비 내리는 장면도 많았고. 게다가 대부분 인적이 있는 실제 공간을 이용했고.
로케이션 촬영이 많았지. 그래서 거의 야전이었다, 야전.(웃음) 사람들은 아마 밤마다 나타나서 저렇게 우리를 괴롭히는 저들은 누구인가, 싶었겠지.(웃음)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지만 고마운 에피소드도 많다. 어떤 분들은 밤에 추우니까 따뜻한 차를 보온병에 끓여와서 나눠먹으라고 주시기도 했다. 물론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친 점도 있었고. 하지만 재미있었다.
영화에 대한 신뢰감이 돈독했기 때문에 수많은 고난을 감수한 것이 아닐까.
당연하지. 그렇게 피곤하게 달리기를 하고 나서도 그걸 붙여놓은 현장 편집본을 보면서, 잘 나오고 있다. 이 느낌이야, 이렇게 되니까. 고생했는데 막상 나오는 게 이상하면 그 때부터 바로 브레이크가 들어가는데,(웃음) 찍을수록 더 신뢰감이 생기고 나중엔 안돼, 한번 더 가야 돼, 서로 이렇게 되고, 이렇게 해서 만든 영화다. 이 영화가.
아까 말했던 하정우의 미끄러지는 장면은 <추격자>에서 명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우리도 보면서 놀랐으니까.(웃음)
특히 본인은 뒤에서 전력을 다해 쫓아가는 중이었을 텐데, 많이 놀랐겠다.(웃음)
움찔하고 놀라서 뛰다가 섰다. 어떡하지, NG인가, 생각하는데 벌떡 일어나길래 다시 뛰었지.
그런데 액션에서도 애드립이 있었나?
항상 120%준비해놓고 허물어서 그 허문데다가 즉흥을 집어넣었다. 그렇기 때문에 리허설이 굉장히 남았지.
배우들의 본능이 상당히 중요시됐을 것 같다.
그걸 요구했지. 그래야지만 처음에 이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본 생날것의 느낌을 담아낼 수 있다고 느껴서 우리도 동의했다. 즉흥이 주는 순간적인 부딪힘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파장을 안 놓치려고 노력했었다. 두 배우 모두다.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집중력 뿐만 아니라 끈기와 인내, 체력.(웃음)
매일같이 에너지를 쏟아내고 집으로 돌아갔겠다.
집에 못 들어가는 날도 있지.
그렇게 지쳐서 들어오면 부인께서 걱정하시지 않나.
밤새도록 작업하고 아침에 들어가면 일단 내방에 잠자리가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낮에 진공청소기를 못 돌린다.(웃음) 그 소리 때문에 깰까봐.
갑자기 <즐거운 인생>의 성욱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고단함이야말로 김윤석이란 배우에겐 ‘즐거운 인생’이겠다.
그럼. 그리고 뭐 나만 고생했나.(웃음) 우리가 뛰는 걸 보고 사람들은 정말 저 배우들 고생했다고만 하지만 그걸 담아내는 사람들은 세배로 더 고생한다. 조명이야 뭐야 그 무거운 걸 들고, 그러니 우리가 힘들다는 말을 못하지. 정말 걔들 뛰는 거 보면 미치겠는데, <추격자>는 스텝의 승리다.
기교보단 뚝심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화려한 기교 이런 건,(손을 휘저으며) 결국 이 영화를 버티게 하는 건 아날로그적인 센 날것의 힘, 끈기, 믿음, 이런 거였다.
일단 김윤석이라는 배우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그 이유가 <타짜>가 될 가능성이 많다.
<타짜>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덕분이기도 하지.
덕분에 악역 이미지로 많이 어필됐는데, 본인이 매력을 느끼는 악인의 이미지는 어떤 것인가?
인간은 다층적인 동물이잖아. 악역이라고 해서 골빈 짓만 하는 건 매력이 없지.(웃음) 나름대로의 자기 기준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정면으로 부딪혀서 자신만의 노하우로 이겨나가는 방법, 그러나 사람들이 봤을 땐 그것이 결국 좋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정도. 그 정도의 다양한 비하인드가 깔릴 수 있는 정도가 돼야 매력 있는 악역이지.
한편으로 악역을 선호하는 연기자가 아닌가라는 오해를 형성시킬 수도 있을 거 같다.
우리나라 시나리오 작가들이 악인은 굉장히 잘 묘사한다. 반대로 선인은 희한하게도 어정쩡하다. 그러니 아무래도 악인에 더 눈길이 가지. 디테일한 묘사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싫어하는 인물은 그렇게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나 봐. 그 이유가 뭔가 분석해본 결과, 소위 악인의 요건이 치사하고 이기적이고 야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본데 난 그게 넌센스라고 본다. 현대사회에서 안 그런 사람들이 어디 있나? 그런 건 악인이란 기준에서 빼야 된다. 모든 사람이 졸렬하고 치사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고 이걸 악인이라 적용했기 때문에 반대로 선인의 기준은 이런 게 없어야 되는 거다. 야비하고 치사하고 졸렬한 게 없어야 된다. 그걸 빼니 재미가 하나도 없어지는 거다. 난 현실성 있는, 땅바닥에 발을 딛고 사는 이 시대의 인물에 더 매력이 간다. 그러다 보니 선택하는 게 자연스럽게 소위 악역이라 지칭하는 과를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되지.
확실히 선한 캐릭터보단 악한 캐릭터들이 매력을 주는 경우가 참 많다.
리얼리티가 있잖아.
우리식대로 쉽게 얘기하면 선을 넘지 않은 자와 선을 넘은 자의 대결이지. 시나리오를 보고 엄중호가 후반에 가서 도덕적인 성찰을 나타내거나 정의로운 인물로 변화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찍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단지 선을 넘지 않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양심과 인간의 생명이란 존엄성에 대해서만큼은 포기하지 않은 놈이다. 그리고 지영민은 뛰어넘은 놈이고. 일단 이렇게만 놓고 가자, 그 대신에 2시간 동안 길을 가며 만나는 순간순간마다 발생하는 최소한의 코드를 모아보자, 거기서 이놈이 만나서 어떻게 변하는가,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가, 이렇게 열어놓고 갔다.
결국 엄중호의 심리적 변화가 상당히 중요한 관건이었다.
그 부분은 관객이 <추격자>와 의사 소통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 부분이 억지스럽다거나 감동을 날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엄중호가 개과천선의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아서 좋았다. 하지만 감정선을 유지하면서 미묘하게 변하는 심리를 표출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우리는 그냥 그것도 순서 없이 찍었잖아. 여건상 그렇게 될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5개월 동안 정말 끊임없이 대화했다. 대화를 안 할 수가 없다. 내 첫 촬영분량이 십자가 바라보는 부분이었다니까, 첫 테이크를 가는 게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장면이잖아. 아무 일도 겪지 않고 그걸 찍으라면서 눈빛으로 담아내라고 하니,(웃음) 그걸 하기 위해서 계속 대화하는 거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만약에 이해가 안 가면 두 번, 세 번 찍어보자. 그럼 마지막에 편집하면서 퍼즐을 붙일 때 맞는 조각을 선택하면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시간이 안 걸릴 수가 없지. 5개월 동안, 85회 차 찍었다. 블록버스터야.(웃음) 제작비가 블록버스터는 아니고.
엄중호는 특정한 악인의 표상이라기보단 사회에 만연된 전형적인 악인이다. 하지만 지영민과 같은 최악의 존재가 그런 차악에 기생해서 은둔한다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악의 본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악의 존재는 궁금하지 않았다. 물론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인간의 역사에 수많은 연쇄살인범과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얘들이 왜 이랬는지 누구 한 명도 나서서 밝혀본 적이 없고 늘 실패한다. 싸이코패스라는 게 원래 유전자가 이렇다고 하는데 그것도 정확한 게 없잖아. 보통 이론 같은 건 우리에게 필요가 없다는 거지. 문제는 이런 본능을 행동으로 옮겨서 실제로 해내는, 살인을 저지르는 걸 100%방치했던 이 시스템에 대한 문제에 <추격자>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두 사람 중 사회적인 때가 누가 더 많이 묻었냐고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엄중호를 찍겠지. 지영민은 때가 안 묻어서 더 무서운 거다.
마치 나쁘다는 걸 모르는 어린아이의 잔인함처럼.
내 칼은 좀 무뎌졌다. 오래 써서. 하지만 얘는 너무나 신선한 칼인 거야.(웃음) 무섭지, 그래서.
혹시 본인이 지영민을 연기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처음에 내가 그랬다. 둘 중 아무거나 해도 괜찮다고. 난 내 식대로 표현했겠지. 정우와는 다르게.
만약 본인이 연기했다면 지금과 무엇이 달랐을까.
글쎄, 일단 하정우란 사람이 연기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긴 못 할 거 같다. 만약에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역시 이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래 버리면 그건 실례잖아, 실례.(웃음)
오래 전에 연기를 한번 접으려 했다가 동료들의 권유로 다시 재개했다고 들었다. 그 뒤로 혹시 다시 연기를 그만 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나?
없다. 한번 갔다 왔기 때문에. 막차다. 막차. 막차를 탔기 때문에 하차를 못해.(웃음) 배운 도둑질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이젠.
지금은 영화에 주력하지만 사실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했고 거기서 오랜 경험을 축적했다. 영화의 중심에 선다는 것과 연극의 중심에 선다는 것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연극과 영화의 공통점은 종합예술이라는 거, 그 속에서 연기자라는 건 부품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뭔가의 중심에 서본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굳이 그 역할을 해나가면서 연극과 영화의 장르적인 어떤 흑백을 마땅히 얘기해야 한다면 연극은 정말 하고자 하는 얘기가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만의 즉흥적인 무대 위 상황에서 벌어지고 난 그 무대 위에 서 있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한 연습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영화에는 연습이 없지만 연극에는 연습이란 것이 있고 그걸 통해 계속 본인의 연구를 거듭해야 한다. 왜냐면 희곡이 내포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캐릭터도 캐릭터지만 개인이 작품전체의 메시지 안에서 담당해야 할 역할이 연극에서는 굉장히 크다. 영화도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보다 훨씬 크지. 연극은 소위 슈퍼아줌마, 길가는 사람1 이런 게 없으니까. 반드시 필요한 몇몇의 인물들이 적확한 역할을 가지고 등장하고 거기서 다른 뭔가를 해버리면 균형이 흐트러지지. 그래서 연극이 잘 통제된 예술이라면 영화는 그런 면에서 더 열려있는 예술이고, 그런 부분에서 연기자가 임하는 차이가 있지 않을까.
난 둘 다 똑 같은 비중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영화는 뼈 속까지 그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게 있다. 눈빛 하나로 이 인물이 인생에서 느끼는 허탈함을, 슬픔을, 공허함을 표현해야 할 때 클로즈업이 들어오잖아. 연극은 그런 게 없지. 연극은 말로서 표현하지. 표현하는 방식에서 확연하게 구분이 가지만 그 나름대로 둘 다 굉장한 집중을 요구하는 거다.
연극 연출을 몇 번 했고, 대학시절에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했었다. 차후 연출에 대한 계획은 없나.
연출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쉬고 있으면 안 된다. 이렇게 쉬고 있으면 못 따라간다. 끊임없이 연출을 하고 준비를 해야 된다. 굉장히 많은 지식과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이 연출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연출을 놓은 게 몇 년이 되니까 다시 하려면 공백의 한 다섯 배 시간을 할애해야 된다. 연출은 세상에 대한 비전을 얘기해야 되고 세상에 대한 시각을 보여줄 수 있을 정도여야 하니까 공부할 게 너무 많다. 책 다 읽어야 돼.(웃음)
배우가 좋은 연출자를 만나는 것도 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나도 운이 좋은 편이고.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배우에게 기회도 따를 리가 만무하다. 나름대로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는 요즘은 과거의 오랜 경험들이 좋은 자산이 됐음을 스스로 실감할 것 같다.
연극을 하면서 작품 분석에 매달렸다. 어떤 연극은 3시간 40분 공연하기 위해서 한 6개월 동안 연습한 적도 있었는데 그 6개월 중에 2개월을 내내 작품 분석에 바쳤다. 훈련극의 번역본이 마음에 안 들어서 원본을 가져와 아예 다시 번역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작품 분석을 통해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각이 나한테 굉장한 도움이 됐다는 걸 느꼈지. 다른 건 몰라도 연기를 연극으로 시작했다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탄탄하게 나를 받쳐주는 좋은 계기가 됐으니까.
무대에서 활동할 당시 송강호와 친분이 두터웠다고 들었다. 송강호가 실력을 인정받고 주목 받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본인에게 좋은 자극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중에 가는 자가 가질 수 있는 장점은 돌다리를 두드려볼 수 있는 여유가 좀 있다는 거지. 농담처럼 하는 이야기지만 정말 그래. 저랬을 때는 저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라는 걸 (송)강호를 보고 느끼는 거지. (웃음)
함께 고생한 만큼 동료애가 돈독하겠다.
같이 고생했던 내무반 사람들과 말이 필요 없는 것처럼 그런 경험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는 일단 가까워질 수 밖에 없다. 알고 있으니까. 힘들었을 때의 느낌도 알고 있으니까 서로의 심리상태도 잘 이해하고.
맞다. 아버지라는 정서가 난 강하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거다. 남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 나이가 40이니까, 아버지의 모습이 언제나 남아있게 되지.
그건 실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미진이 딸과 밥을 먹는 장면이 있잖아. 아무것도 안 했다. 그저 딱 앉아있었고, 갑시다, 하더니 컷을 하는 거다. 그러더니 (나홍진 감독이) 저기, 선배님. (그래서 내가) 왜요? (그러니까) 아버지 같아요. (그래서) 나 아무것도 안 했잖아, 지금. (그러자) 그런데 아버지 같아요. (이래서) 아니, 내가 딸아이 아빠라는 걸 아니까 그런 거 아냐? (그러니까) 그래서 그런가? 하지만 그런 게 결코 보여선 안됩니다. 그랬던 에피소드가 있다. 그래서 (내가) 알았어. 야박하게 할게. 야박하게, 이랬지. (웃음) 그런데 이 나이 되는 남자와 그 나이 되는 여자애를 함께 세워두면 누가 봐도 피해갈수 없다.
그 장면은 딸에게 밥을 먹이는 아버지처럼 보일 수 밖에 없는 구도였다.
제3자의 시각에서 누군가가 객관적으로 봐도 아버지가 데리고 온 딸처럼 보이겠지. 남의 딸이라고 상상 못한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데 술도 참 많이 마실 것 같다.
당연하지. 우리는 모든 자리가 다 술이다. (웃음) VIP시사회 끝나고 뒤풀이를 커피숍 가서 하겠어? 술 한잔 하면서 얘기해야지.(웃음) 그리고 술 못하면 손해지. 그런 데서 캐스팅 제의가 들어오는데. (웃음)
술을 한번 마시면 어느 정도로 마시는 편인가. 끝을 보나?
우리는 노련하다. 노련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 선에서 딱 정리하지. 왜냐면 과하게 되면 내일은 먹을 수 없잖아. 그러면. (웃음) 이게 생활화되려면 그런 무모한 짓을 하면 안되지. 절제가 있어야지 말이야.(웃음)
최동훈 감독이 <타짜>에서 아귀를 맡긴 건 본인도 의외라고 했었다. 실제로 <범죄의 재구성>에서 이형사 역을 생각해본다면 차라리 유해진이 맡았던 고광렬 역이 더 적합했을 것 같기도 하다.
의외였다. 나는 사실 나한테 그저 짝귀 정도를 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귀를 하라는 거다. 그건 이 사람이 나에게서 뭘 봤다는 이야기거든. 아마 감독들 중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최동훈 감독일 거다. 물론 지금까지는. 나홍진 감독하고 5개월을 그렇게 보냈으니 이제 나홍진 감독도 알지 모르겠지만.(웃음) 어쨌든 이 친구가 그렇게 얘기했다면 뭔가 있다, 나한테 뭔가를 봤다, 이렇게 생각했고 그럼 오케이지. 사실 감독이 배역을 줬을 때 배우가 못해내면 둘 다 슬프잖아. 근데 해냈을 때는 캐스팅한 감독이나 출연한 배우나 둘 다 서로 탄탄해질 수 있는 판단이 되는 거지. 결국 빛나는 만남이 됐다.
<즐거운 인생>은 마치 놀면서 연기하는 느낌이었다.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도 오랜 친구처럼 보였고 여러 가지로 즐거운 추억이었을 것 같다.
난 성욱이란 역할을 굉장히 좋아한다. 힘이 쫙 빠져있는 그런 느낌, 실제 내가 성욱의 그런 상태를 즐기는 편이라서. 성욱이 나보단 더 우울한 편이지만 약간 나른한 듯한, 그런 몸 상태나 정신상태가 나랑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이준익 감독님하고 맨날 놀면서 장난치고.(웃음) 재미있는 작업이었지. 아쉬운 게 없었다.
본인 스스로도 상당히 편안해 보였다.
동료 배우들 중에 어떤 사람은 성욱이가 제일 좋다더라. 자기는 성욱이의 그런 모습이 내가 한 연기 중에서 가장 백미라고 생각한다고. 대중들에게 강렬한 캐릭터로 인식되다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던 계기이기도 했지.
거의 한달 반 만에 베이스를 연마했다고 들었다. 어쩌면 연기보다도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우리 자랑이 아니라, 일단 세 배우가 다들 음감이 있더라. 나 같은 경우도 라이브 연주를 하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란 작품을 계속 해봤기 때문에 악기와 친숙했고. 물론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그 당시 우린 정말 죽었었다.(웃음) 달리기는 그냥 뛰면 되지만 이건 머리를 써야 하기 때문에 사실 진짜 괴로웠지. 솔직히 웃으면서 손가락 다 부러뜨리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진짜 때려부수고 싶더라. 그런 좁은 곳에서 악보를 보면서 베이스를 뎅뎅거리는데 그것도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발전속도가 체감적으로 느껴지는 작업이라 더욱 절실했을 것도 같다. 진전이 안되면 그만큼 답답한 거니까.
딱 보면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고, 누가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 다 드러나는데 빼도 박도 못하지.(웃음)
아무래도 아귀 역할 이후로 인상이 강한 캐릭터 제의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성욱을 선택한 건 사실 의외였다.
그 때 들어왔던 시나리오 중 <즐거운 인생>이 제일 좋았다. 내 맘에 들었지. 물론 그전에 <추격자>를 먼저 선택하긴 했지만.
결국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시나리오인가보다.
일단 시나리오 없이 감독을 먼저 만날 수는 없다. 사실 감독도 나한테 시나리오를 통해서 연애편지를 쓴 거 아닌가. 그 연애편지를 보고 이 사람을 만나서 연애를 한번 해봐도 되겠구나를 생각하지. 결국 시나리오지.
강렬함 속에서도 종종 드러나는 넉살이 유머스럽게 느껴진다. 코미디 연기도 해보고 싶지 않나?
<즐거운 인생>에서 성욱이란 애가 우울하고 어깨에 뭔가 얹혀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성욱이도 사실 말하는 거 보면 웃긴 놈이거든. 난 그 정도만큼의 코미디를 좋아한다. 드라마를 뛰어넘는 코미디는 체질적으로 그렇게 와 닿지가 않는다. 물론 개인적으로 코미디는 좋아한다. 우디 알렌의 영화를 보면 얼마나 웃겨. <브로드웨이를 쏴라>보면 ‘햄릿이 누구야?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인가?’ 이런 대사들이.
위트 있는 코미디를 좋아하나 보다.
그러니까 어떤 만남과 만남이 주는 코미디. 둘 다 옳은 사람이다. 어느 한 사람이 이상한 건 아닌데 여기서 만났기 때문에 웃기는 거, 이런 것들이 재미있지.
상황의 아이러니 같은?
상황이 주는 코미디가 그렇지. 캐릭터가 주는 코미디보단.
지금까지 나름대로 강한 캐릭터를 많이 어필했고 이제 관객들도 점차 이를 인지하게 됐다. 그런데 본인이 지향하는 캐릭터는 뭘까?
난 아까도 얘기했지만 현실감 있는, 발바닥을 땅바닥에, 지금 여기 땅 위에 붙이고 사는 모습이면 된다. 그게 캐릭터를 육화시키는데 있어서 제일 기본적인 첫 번째 통과의례라고 생각한다.
현재 연기를 인정받고 있는 영화배우들 중 본인을 포함해서 연극무대 출신이 많다. 무대가 영화의 산실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런데 현재 연극 무대의 환경은 상당히 열악하다. 근본적인 문제가 뭘까?
세계 어디에서도 연극이 혼자 올곧게 클 수 있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다. 그러니까 프랑스나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연극에 국가적인 지원이 어마어마하지. 그 반면에 연극을 그렇게 많이 하면서도 지원이 어마어마하게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어떤 것보다도 연극은 종합예술의 제일 밑바닥, 초석이기 때문에 사회나 국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장기적인 지원이 받쳐주지 않는 한, 일시적이고 단발적인 금액적 지원은 아무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
장기적인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그건 교육화와도 관계가 있는 거다. 교육적으로 초등학교부터 연극시간을 할애하면서 그런 인구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 끊임없이 국가적으로 지원을 해줘야 되는 거다.
과거 열악한 환경에서 연극을 했던 선배로서 지금도 그런 환경에서 연기를 하는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정말 본인이 원했던 기회라는 것이 정면으로 왔다고 성급하게 나서버릴 수 있다. 기회가 정말 올 때까지 차근차근 준비하고 매 순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즐겨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걸 했다는 자부심을 잃지 마라.
2008년 2월 15일 금요일 | 사진: 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