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태(이하 “하”) <러브토크> 이후 2년 만에 다시 만난다. 먼저 <세븐 데이즈> 200만 돌파 축하한다. 요즘 여기저기 축하 전화 많이 받겠다.
박희순(이하 “박”) 전화 오는 건 좋은데 술을 너무 마셔서(웃음).
하 요즘 이틀에 한 번 꼴로 술자리가 있다고?(웃음) 이제 개그맨 박휘순과 헷갈리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겠다. 인지도가 올라간 건 실감하나?
박 헷갈리는 사람 아직도 많다(웃음). 인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 길거리 지나다니면 많이 알아봐주지 않나? 하긴 <세븐 데이즈>에서의 성열과 일상적인 모습과는 또 다르니까. 지금도 안경 쓰고 있으니 <러브토크> 때 지석같이 조용한 느낌이다.
박 아직은 많이 못 알아본다. 모자 안 쓰고 안경만 써도 못 알아보는 걸. 몇 일전에 극장에서 <세븐데이즈>를 마지막으로 봤는데 그때도 아무도 못 알아보더라고(웃음).
하 기분 좋은 일이 또 하나 생겼더라. 시나리오 작가들이 뽑은 ‘올해의 발견’인 배우로 선정됐던데.
박 그 작가들 중에 <얼렁뚱땅 흥신소> 작가도 있고 연극할 때 만났던 작가도 있고 측근들이 다 뽑아줘서 그럴 거다(웃음).
하 발견이란 단어는 좀 쑥스럽지 않나? 전작들이 일찍 개봉만 됐다면...
박 좀 그렇긴 하다. 그래도 늦게나마 발견해 주셔서(웃음).
하 시나리오는 많이 들어오나? 이제 깡패 역할은 안 들어오고?
박 옛날보다는 좀 덜하긴 하지. 웃긴 게 이제 형사 역할만 들어온다(일동 웃음).
하 어찌나 영화판이 획일적인지(웃음). 형사 영화도 많겠다, 대한민국 형사 캐릭터는 다 들어오겠다.
박 그렇진 않다. (<세븐 데이즈>) 이미지가 있으니까. 술 먹느라 시나리오도 아직 다 보진 못했다(웃음).
하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부터 풀어보자. 왜 또 이렇게 극악무도한 역할을...
박 글쎄(웃음). 악역이라고 무조건 안 한다는 생각은 없고 (변집사가) 매력 있는 역할이다.
하 영화를 보니 왜 수락했는지는 이해가 가더라. 그래도 <세븐데이즈>로 한참 주가를 올렸는데 다시 악역 이미지로 되돌아가지 않을까 걱정도 되던데.
박 하하, 글쎄. 근데 <세븐데이즈> 보다 먼저 개봉이 됐으면 작품 속 인물로 봤을 텐데 이제 좀 알려졌기 때문에 ‘어, 박희순이 연기하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는 거지.
하 어쨌건 <가족>의 조폭과는 다른 악역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더라. 아무래도 <남극일기>때 인연으로 출연하게 된 건가? 임 감독은 어찌 그리 어려운 역할만 맡기나.
박 임필성 감독은 꼭 막판에 날 캐스팅한다(웃음). 다른 역할 다 캐스팅하고 시나리오 다 돌린 후에. 그래도 친한 감독 중 내 다른 점을 발견해 주는 감독이라 참 고맙다.
하 <남극일기> 때랑 비교하면 육체적으로는 아무래도 쉬웠겠다.
박 편하게 연기하다 클라이맥스 부분에 굉장히 힘들었다. 에너지와 집중력을 요하는 신에서 아이들하고 붙다보니까 더 성심성의껏 하지 않으면 아이들의 집중력이 깨지니까. 보통 때는 내 컷에 최선을 다하고 상대방 컷에는 에너지를 아끼는데 아역배우들은 다 백지 같은 친구들이라 그럴 수 없었다.
하 감독님이 아무래도 아역과의 연기를 더 신경 쓰라고 하던가?
박 노는 꼴을 못 보지(웃음). 어린친구들이라고 해서 봐주는 거 전혀 없고 똑같았다. 워낙 그 친구들이 잘 하니까.
하 라스트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역들 연기가 좋더라. 그래도 악역인데 시나리오 처음 받아 들었을 때 망설여지지 않았나?
박 음... 그 당시가 <세븐 데이즈>가 다시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였고 또 악역이 많이 들어 왔었을 때다. <남극일기>나 <러브토크>가 흥행이 잘 안 돼서 여전히 악역이미지가 셌거든. 근데 깡패든지 악역이든지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정도의 악역이라면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는데, 천편일률적이고 전형적이고 좋은 놈이 돋보이기 위한 나쁜 놈이 자꾸 보이니까 재미가 없더라. 그래서 안 한다고 했는데 <헨젤과 그래텔>은 1인 2역이기도 했고 나이보다 위의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장점도 있었다. 대신 <세븐 데이즈>와 촬영이 겹치지 않게 해 달라는 단서를 달았다. 근데 흔쾌히 조절할 수 있다고 해서 두 편을 동시에 찍었다.
하 월드스타 김윤진이 ‘어, 두 편 동시에 찍네’라는 말은 안 하던가?
박 (웃음)많이 놀렸다. ‘뭐, 나보다 더 바빠?’ 그러면서.
하 외적인 부분도 많이 신경을 쓴 것 같다. 머리도 희끗희끗하고 안경도 그렇고 나이가 더 들어 보인다.
박 외형적인 부분에서 좀 더 이국적이고 기존에 볼 수 없었던 느낌을 갖자고 했다. 세트나 미술도 그렇고. 변희봉 선생처럼 나이든 배우를 쓸 수 있는데 굳이 날 쓴 이유가 조금 더 이국적이고 동화적인 느낌을 주기 위한 것 같더라.
하 발성 자체도 초반엔 연극적이었다가 후반부에야 리얼리티를 살렸다는 느낌이 들던데. ‘우리 천사들’ 이런 대사는 앙드레 김 선생이 떠오를 정도였다(웃음).
박 맞다. 정체를 숨겨야 하는 설정이라 초반에는 좀 숨기는 듯한 느낌이 필요했다. 초반에는 좀 더 여성적으로 갈까도 생각하고 리딩 할 때도 여러 가지 생각들이 있었는데 결국 그 쪽으로 가닥을 잡은 거다.
하 인물 해석은 임필성 감독의 처음 이미지와 차이가 좀 있었나? 두 번째 작업한 임 감독과의 호흡은 어땠나?
박 임필성 감독이 제시한 모델은 <달빛 사냥꾼>이란 외화의 멋있고 찬송가 흥얼거리는 목사였다. 난 또 ‘가오’가 있으니까 그건 따라 할 수 없었고. 그래서 난 더 꼬았고 감독은 노멀한 것이 더 무서울 수 있다고 해서 둘이 접점을 찾은 거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장단점을 알고 있으니까 충돌이 거의 없었다. 서로의 마음을 아니 몇 마디로 정리가 다 되더라고. 장준환 감독과 친구인데 임필성 감독이 나 보고 형이라 부른다. 그래서 ‘형! 준환이 형은 형 안 쓰잖아. 날 더 좋아해줘’ 그러더라(웃음).
하 그러게 ‘아귀’ 버금가는 역할로 <타짜2>에 합류해야 될 텐데(웃음). 처음 설정부터 1인 2역이었던 건가? 후반부 플래쉬백 부분은 얼굴이 안 나온 것이 다행일 정도더라(웃음). 개인적으론 박희순이란 배우가 걱정돼서 몰입이 잘 안됐다. 이 영화 대박 나도 박희순은 또 악역 이미지로 굳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서.
박 하하. 보고나오면서도 다들 ‘나쁜 어른이다’, ‘이 변태야’ 그러던데. 오히려 입만 보이고 (얼굴이) 좀 덜 보인 것이 다행인 것 같다(웃음). 김지용 촬영 감독이 실루엣만 잡아 준 게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치아도 끼는 걸로 새로 해 넣은 거다.
하 기존 캐릭터는 리얼리티가 돋보였는데 이번 작품은 나름 판타스틱한 분위기임에도 잘 어울리더라. 두 촬영장을 오가면서 인물이 섞였을 텐데 연기할 때 힘들지는 않았나?
박 오히려 그래서 더 편했던 것 같다. 비슷하면 어떻게 다르게 연기할까 고민을 했을 텐데 완전히 달랐다. <세븐 데이즈>는 촬영 자체가 엄청 빠른 열탕이었다면 <헨젤과 그레텔>은 차분하게 누르는 냉탕이었다고 할까?
하 개인적으론 어떤 스타일이 연기하기 편했나.
박 <세븐 데이즈>는 템포가 TV드라마보다 빨랐다. 카메라도 두, 세대였고. 반면 <헨젤과 그레텔>은 너무 세심하고 꼼꼼하고 하나에 목숨을 거는 쪽이니까. 연이어 찍었다면 답답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두 작품 같이 가니까 오히려 나를 다스리는 계기가 되어줬다.
하 아역배우와 제대로 호흡 맞춘 건 영화에서는 처음이었지?
박 이렇게 계속 붙어서 연기한 건 <가족> 때 박지빈 군 외에 처음이다. 근데 세 친구가 다 다르다. (만복 역의) 원재 같은 경우 릴랙스하게 놀고 있다가 슛 들어가면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영희 역의) 은경이는 진짜 백지 같은 친구다. 진짜 주는 만큼만 받아서 세게 주면 반응만큼만 오고 약하면 약한 데로 오니까 그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정순 역의) 진지희가 여우다, 연기에 대해 서로 논의할 정도로. ‘지희야 여기서 난 이렇게 할 건데 넌 언제 대사 칠거야?’라고 하면 ‘전 두 호흡 이따 칠거니까요 세 호흡 있다 해 주세요’라고 받아 치고.
하 (웃음) 정말 그 꼬맹이가 호흡이란 표현을 쓰던가?
박 그럼! 기성배우와 대화하는 듯 했다니까. 연기 호흡이 자~알 맞았다(일동 웃음). 별명희 ‘진여사’다. 배우들이 촬영 직전 연기에 몰입하고 있다 슬레이트를 세게 치면 감정이 깨질 때가 있다. 근데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배우는 송강호 정도?(웃음) 근데 우리 진여사가 ‘슬레이트 좀 살살 쳐 주세요’라고 또박또박 말하면 다음부터 어떤 배우 앞에서도 살짝 쳐 주고 그랬다. 그리고 감정 몰입하다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는데 조명이나 스탭들이 준비하는 시간이 걸리잖나. 그럼 얘기도 안 해요. (손바닥을 직접 치며) 짝짝짝!(일동 웃음) 그럼 (스탭들이) 뛰어다니고 난리가 났다. 우린 못 그러지 않나. 근데 진여사가 다 해줘서 우린 편했다(웃음).
하 스탭들에게는 귀여움을 넘어 무서운 존재였겠다(웃음). 천정명과의 호흡은 어땠나?
박 정명이는 촬영하면서 ‘나른한 릴랙스’라고 불렀다. 연기에 전혀 긴장이 없잖나. 나른하지만 그 만의 매력이 있는 것 같더라.
하 천정명이란 배우는 자신만의 매력을 찾아가는 것 같더라.
박 자기화 시키는 연기가 이제 구축이 된 것 같더라고. 아, 하나 덧붙이면 내가 아이들을 너무 좋아하고 예뻐한다. 근데 나쁜 놈 역할이니까 친해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예뻐하고 장난치면 막상 촬영 들어가서 웃음 나오고 집중을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처음 두 달은 말도 안했다. 그 친구들도 날 무서워했고. 나만 혼자 꾹 참았는데 막판 가니까 그 친구들 집중력이 나 좋더라(웃음). 그래서 까불어도 되겠다 싶었지.
하 혹시 자녀분이?
박 저, 아직 결혼 못 했습니다. 여자 친구도 없다.
하 (급 당황 모드) 아, 내가 왜 잘못 기억하고 있었는지 몰라. 이런 큰 실수를... 2년 전에 기혼인 걸로 메모리에 저장해 놔서 따로 찾아보지도 않았나 보다. 왜 여자 친구가 없을까? 이제 <세븐 데이즈>로 소위 떴는데 말이다. 좋은 분 소개시켜 드려야겠다.
박 뜨긴 뭘 뜨나(웃음).
하 이제 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세븐 데이즈>는 배우 박희순 개인적으로 볼 때 관객 수가 아니더라도 어떤 분기점이 되어주는 ‘내 인생의 영화’가 될 것 같다.
박 맞다. 알려지고 그런 의미보다는 지금까지 우울하고 무거운 캐릭터를 많이 했는데 박희순이 이런 면도 있다는 걸 보여준 계기가 된 점이 가장 크다.
하 필모그래피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중인데 참 다양한 영화를 찍었다. 감독과 시나리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배우 박희순이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뭔가.
박 삼박자가 다 맞아야겠지. 작품이나 감독이나 배역까지. 솔직히 말하면 선택의 폭이 그렇게 넓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선택한 것이 크다. 작품과 배우가 만나는 것 자체가 운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장르는 접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작품을 고르는데 고집이 있는 편이고 비슷한 역할은 배제하는 스타일이라 다양하게 한 것 같다. 앞으로도 그래야지.
하 박희순이 나온 영화를 모두 봤지만 고집이 조금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던데?
박 (웃음) <바보>란 작품이 아직 개봉을 안 했지만 그때부터 너무 어두운 것 말고 상업적인 것도 가 보자는 생각을 했다. 근데 이게 딱 멈추는 바람에(웃음).
하 말이 나와서 그런데 <바보>는 영화계 미스터리다. 차태현, 하지원에 <동감>의 김정권 감독이고 원작이 강풀인데 왜 개봉을 못하느냐는 거다.
박 제작사 차원의 문제가 있었긴 하다. 그래도 3월에 개봉한다는 것 같던데.
하 신동일 감독의 <나의 친구, 그의 아내>도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봤다. 어찌 보면 불운의 배우기도 하다. 연달아 두 작품이나 관객들과 만나지 못했으니까.
박 그 작품도 언젠가는 개봉하겠지, 단관 개봉으로라도. 그 역할이 간만에 착한 역할이었다(웃음). 처음에 상대 배우인 장현성씨 역할 두 가지 모두 제의가 왔는데 감독님이 술 한 잔 하면서 ‘굉장히 세게 봤는데 실제로 보니 아니다’라고 하더니 역할이 결정됐다.
하 자, <세븐 데이즈>로 돌아가자. 성열은 시나리오보다 얼마만큼 본인 것으로 만들었나.
박 말이 조금 와전됐다. 애드립은 그렇게 많이 없었고 거의 다 감독님이 쓴 거였다. 대본에 없는 건 감독님이 현장에서 써서 준 거 플러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협의한거고.
하 그런데 와전된 건?
박 ‘박희순이 50%를 했다’, 이렇게(웃음). 그럼 나쁜 놈이지(웃음). 한 장면 통으로 애드립을 한 건 열쇠수리공한테 ‘직업의식이 없어’라고 말 하는 그 한 장면. 그게 첫 촬영이었다. 근데 윤진 씨와 호흡도 안 맞춰보고 인사한 후에 리딩 30분만 하고 촬영에 들어간 거라 서먹하고 어색한 상태였다. 그래서 일부러 준비를 몇 개 해 갔다. 원래 원신연 감독은 준비 많이 해 오는 것 보다 현장에서의 날 것 그대로를 좋아하는 분인데 그 날만 많이 한 거다.
하 그런 거 보면 연극할 때 장기 공연하면서 대사니 행동이니 수정해 나갔던 경험들이 자양분이 되었을 것 같다.
박 맞다. ‘목화’는 매 공연마다 바뀌고 심지어 그대로 있으면 혼난다. 오태석 선생님이 원래 ‘배우는 레미콘 같아야 한다’,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면서 데생을 몇 천 장 했다’는 얘기를 매 번 한다. 잘 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 잘 나가는 부분, 관객한테 반응이 오는 부분은 고치고 또 바꿔야 한다면서. 그래서 대사든 호흡이든 바꿔준다. 그러면 관객한테 반응이 오기까지 또 만들면서 노력을 해야 된다.
하 속으로 ‘아, 짜증나’ 이러기도 했을 것 같다.
박 그러니까 노는 꼴을 못 보는 거지(웃음). 요게 딱 터지는데, 대박인데 바꾸라니까(웃음).
하 연극판에서의 훈련이 자기화 되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 아니겠나. 근데 원신연 감독도 야박한 게 아무리 김윤진씨 스케줄이 빡빡해도 촬영 전에 밥도 먹고 그랬어야 하지 않나?
박 원신연 감독하고는 술도 마시고 했지. 근데 진짜로 김윤진씨와는 시간이 안 됐다. 윤진씨는 미국에 있었고 난 <헨젤과 그레텔> 준비 중이고. 촬영 이틀 전에 잠깐 30분 인사했다(웃음). 윤진씨도 낯을 많이 가린다. ‘안녕하세요’ 한 번 인사하고 30분 동안 멍하니 있다가 ‘슛’ 사인 오면 촬영하고.
하 그래도 나중에는 친해졌다면서? 연배도 비슷하고.
박 그렇지. 나중에 친해지려면 들이대는 수밖에 없더라고.
하 수줍은 희순씨가(웃음)?
박 그래서 내 촬영 없을 때도 촬영장에 자주 갔다. 뭐, 별 말은 안 했지만(웃음). 앉아만 있었더니 윤진씨가 왜 이렇게 자주 오냐고, ‘내 촬영 분량 없을 때 나도 찾아가야 되는 것 아니냐, 작작 해라.’ 그러면서 친해졌다.
하 <세븐 데이즈>는 드라마보다 빠른 현장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워낙 컷도 많고 스피디한 화면이니 완성된 영화만 봐도 그럴 거라 짐작이 가던데.
박 초반에 카메라 두 대를 돌리는데 조금 부담스럽더라. 한 대도 부담스러운데 두 대를 들이대니(웃음). 근데 현장 편집을 봤을 때 관객들이 느낄 긴장감이 첫 촬영에서도 느껴지는 거다. ‘와 이거 재미있네, 되겠는데’ 이러면서 신나게 연기 했다.
하 한 컷 찍고 카메라 바꾸는 기다림의 과정이 생략되니까 배우 입장에서는 편할 수도 있었겠단 생각이 들던데.
박 나나 윤진씨나 연극을 해 봐서 안 끊고 가는 걸 좋아한다. 근데 영화에서는 한 컷 끊고 가면 아무래도 긴장감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한 번에 쫙 찍고 뽑아 쓰니 편하고 재미있었다.
하 <세븐 데이즈>가 우여곡절이 많았지 않나(처음 <목요일의 아이>로 시작된 프로젝트가 감독과 배우가 교체되는 난산 끝에 결국 200만을 돌파한 현재의 <세븐 데이즈>의 결과를 낳았다). 김윤진이란 배우가 캐스팅되고 다시 제작 소식이 들려왔을 때 기분이 어땠나?
박 일단 대본이 바뀌어서 왔을 때 너무 좋았다. 원래도 좋았지만 거기에 곁가지가 생기고 캐릭터가 단단해지고 가장 중요한 건 내 역할이 많이 늘어났고(웃음). 연출도 좋게 본 <구타유발자들>의 원신연 감독인데다 윤진씨까지 캐스팅돼서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지.
하 김윤진은 ‘월드스타’ 면모가 묻어나던가? 첫 호흡이라 그런 느낌은 없었을 듯도 싶은데.
박 그런 건 딱히 없었지. 대신 배우로서, 여자로서 그 정도의 카리스마를 가진 배우가 드물잖나. 카리스마를 가진데다 자연스럽고 편한 연기까지. 그리고 호흡도 잘 맞았다.
하 근데 관객들 사이에선 ‘김윤진 보러 갔다 박희순 발견했다’는 말 들이 많던걸.
박 그건 윤진씨는 워낙 유명한 배우고 또 잘하는 배우인줄 알고 있었는데 비해 난 홍보도 안 됐고 아무것도 없다 튀어나왔으니까 ‘얘는 누구야’ 하는 심정이었을 거다. 또 성열이란 캐릭터 자체가 어떤 배우가 했더라도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역할이고.
하 연기력이 뒷받침 됐기에 호응을 얻었지만 그래도 배우들은 다 ‘운 때’가 있는 것 같다.
박 맞다. 그런데 요즘 확실히 영화계가 불황인 것 같다. 예전 같으면 이 정도 입소문에 호응이면 몇 백만은 거뜬했을 텐데. 그래도 200만이 어딘가(웃음).
하 원신연 감독 스타일과는 잘 맞는 편이었나?
박 그 분은 현장에서의 판단력이 정확하다. 얘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도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빨리빨리 결정해서 상황을 바꿔버리니까. 또 내가 어떤 연기를 하던 정확하게 얘기를 해 준다. 코믹한 상황을 저지르면 이걸 더 해야 되나 자제해야 되나 얘기해주니까 난 그냥 저지르면 된다. 갈수록 그런 믿음이 생기니 굉장히 편했다.
하 역으로 생각하면 엄격하게 연기를 통제하는 연출 스타일이기도 하지 않나.
박 난 감독님들 스타일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기 때문에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편집에서 잘리면 그만이니까(웃음). 임필성 감독은 철두철미한 사람이라 자기 걸 정해 놓고 대입을 시키는 편이다. 원신연 감독과는 반대 스타일인 거다. 원신연 감독은 배우의 성향과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연출하다면 임필성 감독은 자기가 정해놓은 캐릭터에 배우가 젖어들게끔 주문을 한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자유롭고 고정되는 상반된 두 가지 매력이 있으니 열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었던 거다.
하 요즘 들어오는 시나리오는 좀 다양해 졌나?
박 시나리오를 많이 받는 편이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긴 했다.
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영화 데뷔작인 <보스상륙작전>을 제외하고 모든 감독들이 작가주의 성향이 묻어난다. 고집이란 단어도 그래서 잘 어울리고.
박 그렇다. 아무래도 자란 놀이터가 ‘목화’니까. 오태석 선생님도 직접 쓰고 연출하기 때문에 그쪽 성향에 대해서 내가 많이 이해하고 좋아하는 편인 것 같다. 감독님들도 그런 쪽으로 봐줘서 서로 교감을 나눌 수 있었던 것 같고.
하 근데 또 ‘목화’ 출신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잖나. 그런 점에서 박희순이란 배우 개인의 성향이 많이 작용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박 없지 않아 있겠지(웃음). 그니까 상업적인 영화도 많이 하고 싶은데 폭이 너무 좁다. 거의 악역만 들어오고. 작품이 좋아도 내가 좋아하는 배역을 맡아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까 손이 안가더라. 좀 어둡고 무거운 얘기라도 진정성이 있고 새로운 면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라면 흥행과 상관없이 하고 싶으니까. <세븐 데이즈>가 처음 중단됐을 때 돈도 다 받았고 계약기간 끝났으니 안 해도 되는 거였다. 근데 굳이 한 이유는 한국영화에서 새로운 장르, 새로운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지금껏 보여줬던 무거운 면을 탈피할 수 있는 기회라 1년을 기다리고도 할 수 있었던 거다. 지금까지 모두 그런 식의 작품 선택이었던 것 같다. 깡패는 무조건 안 한다고 했었고 이후에 깡패 역할 수백 개가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리 작가주의고 멋있는 작품, 배역이라도 한 번 마음을 먹으면 죽어도 손이 안 간다. 그런 식이다 보니 고집 있는 놈으로 낙인이 찍혔지만(웃음).
하 <바보>와 <세븐데이즈>는 솔직히 작가 색깔은 조금 옅잖나. 그걸 계기로 ‘고집 많이 꺾였네?’란 소문이 돌지 않을까?(웃음)
박 그럼 좋지. 인지도란 얘기도 이제는 가끔 하게 되는데 내가 아무리 잘 하고 좋다고 감독들이 생각을 해도 제작 쪽에서 거부를 하면 못하는 거니까. 필요악이라고 생각하고 작품을 넓게 보고 고르는 중이다.
하 인지도에 대한 인식도 그렇고 감독, 시나리오에 대한 욕심이 슬슬 발동 걸릴 때다.
박 그런 욕심은 인지도 없었을 때부터 있었다(웃음). 운 때가 안 맞아서 못한 거지 그런 욕심은 (배우라면) 다 있다.
하 올 해 방영된 드라마시티 <저수지>에서는 선량한 소시민 역할도 맡았는데.
박 그 때가 <목요일의 아이> 중단되고 한 6개월 쉴 때다. 연기를 너무 하고 싶은 거다. 연극을 하고 싶은데 영화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까 아무것도 못하고 속병 앓을 때다. TV 드라마는 안 한다고 했었는데 ‘할래, 대본 좀 가져와봐’ 그랬다. 근데 딱 마침 <저수지>의 홍석구 PD가 이전에도 여러 번 시나리오를 줬다고 하더라. TV 안 한다고 했으니 체념하고 있다가 이번에도 시나리오만 넣어 보자 했는데 ‘아다리’가 딱 맞은 거지. 읽어보니 너무 재미있는 거다. 진짜 연기가 목마를 때 갈증을 해소해 준 작품이라 의미가 크다.
하 그 때도 인터넷에 ‘박희순, TV 외도’ 이러고 기사는 다 떴다. 소속사에서 보도 자료는 다 뿌렸으니까(웃음). 드라마 <얼렁뚱땅 흥신소>는 생각지도 못한 반향을 일으켜서 놀랐겠다. 근데 또 깡패 역할이었는데.
박 그러니까 안 하려고 도망 다녔었다. PD는 계속 전화오고. 내가 선균이랑 지원이랑 친하니까 이 친구들 동원해서 또 전화오고. 게다가 6회 첫 등장이라 처음엔 안 한다고 했다. 근데 7, 8회 대본이 죽인다며 한 번 봐 달라 길래 읽긴 읽고 재미있긴 했는데 깡패라서 싫다고 했다(웃음). 근데 예지원이 급파돼서 술 마시며 회유하고 선균이랑 원희까지 오고. 그 친구들은 ‘형이 <가족>, 깡패한 거 아무도 몰라, 다 까먹었어. 인지도 높여야 돼 형’ 이러고.
하 실제로 인지도가 올라가지 않았나?
박 공중파의 힘이 무섭더라. 근데 TV에 나오는 내 얼굴은 적응을 못하겠더라. 연기고 얼굴이고 간에 내 얼굴 보는데 적응시간이 좀 필요하다. 스크린도 초반에는 창피해서 못 봤거든. TV 보면서 식은땀이 절절 나고 어머니랑 동생은 거실에서 보고 난 방에서 문 잠궈 놓고 보고. 9회부터인가 모니터가 좀 되더라고. ‘각도를 이렇게 하면 좀 더’ 이러면서(웃음).
하 그래도 PD가 결정적인 한 마디를 뭐라고 하던가. 그래도 깡패 역할인데.
박 멜로도 있지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지닌 인간적인 인물이고 아픈 추억을 가진 사내였다. 무거운 거 안 한다고 해 놓고 또 그런 게 끌린다. 고독한 남자, 우울한 남자.
하 깡패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개인적으론 <귀여워>의 전라도 깡패 ‘막내’ 연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박 <귀여워>는 앞으로 영화 연기를 어떤 식으로 해야겠다는 지향점이 되어 준 작품이다. 정재영이란 친구한테도 많이 배웠고 김수현 감독도 그렇고. <보스 상륙작전>이 영화 매커니즘과 현장을 느끼게 해줬다면, <귀여워>는 영화 작업과 영화 연기는 어떻게 해야겠구나하는 감을 잡을 수 있게 해줬다.
하 2년 전에는 그 당시 만났던 전라도 조폭들한테 계속 연락이 온다고 했었는데.
박 전화는 지금도 온다(웃음). 영화 봤다고도 하고 공연도 보러오고. ‘식사 하셨습니까, 형님’ 이러면서. 그 친구들이 예전에 <가족>을 보고 그랬다. (전라도 사투리로) ‘아, 이 사람 나쁜 사람이여. 우리도 그런 사람은 없어~’(일동 웃음)
하 참 다양한 팬 층을 가졌다(웃음). 원래 낯가림이 심한 성격이라고 알고 있는데 인터뷰도 그렇고 이제 좀 적응이 돼 보인다.
박 인터뷰는 한 30, 40개 하다보니까(웃음). 근데 사람을 만나는 일이니까 힘들기도 하지만 재미있기도 하다. 악의적이거나 사람을 씹기 위해서 만나는 사람은 없잖나.
하 <남극일기>때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게 인터넷’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좀 어떤가?(웃음)
박 검색해야지, 나 씹는 사람 있나 없나(웃음). 그 때 인터넷에 흥미를 잃었다가 조금씩 찾고 있다. 댓글 들도 찾아보고.
하 요즘은 다들 좋은 얘기만 있지 않나?
박 좋은 얘기들이 많은데 아직 ‘박휘순인 줄 알았다’, ‘문천식인 줄 알았다’도 있고(웃음).
하 연극 무대도 슬슬 설 때가 된 것 같다.
박 지금 당장도 하고 싶은데 언제 어느 때 좋은 영화가 들어올지 모르는 거니까. 어느 정도 입지가 있다면 텀을 두고 연극을 할 수 있겠는데 지금은 딱 결정을 못 내리겠더라고.
하 <클로저>로 기억하는 젊은 관객들도 굉장히 많더라.
박 <클로저>가 마지막 연극이다. (연극하자는) 연락이 지금도 많이 온다. 생각을 하고는 있는데 이게 또 두, 세 달이 아니라 네 달, 다섯 달이 걸리니까. 지금 이 시점에 주가도 조금 올라갔고 좋은 작품 하고 싶은 욕심도 있으니 좀 더 참았다가.
하 데뷔작이 장준환 감독의 단편 <2001 이매진>이다. 장준환 감독과는 작업 안 하나?
박 해야 되는데 써 줘야죠(웃음).
하 그 때와 지금과 몸무게는 얼마나 늘어나. 그 때가 10년이 더 지났는데 그땐 눈도 들어가고 그래서 굉장히 독특한 배우구나 싶었다.
박 한 5kg? 몸무게 차이는 거의 없다. 연극할 때니까 무대에서 2시간씩 뛰고 연습하고 하루 종일 그러고 살았으니 살이 찔 수가 없었다. 왜,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던가?
하 그때는 사실 좀(웃음). 그 이후부터 장준환 감독과 계속 친분을 쌓아온 건가?
박 그때부터 친구가 되서 연극할 때 매번 오고 술도 같이 마시고. 근데 감독과 배우 이전에 굉장히 재미있는 친구라 그 친구랑 있으면 술 마실 때도 그렇고 늘 즐겁다. 엉뚱하고 목소리도 가늘 하다. (성대모사를 하며) ‘희순아’ 이러고. 어제도 문소리씨와 함께 술 마셨다.
하 요즘 한국 영화계에 장준환 감독 같은 젊은 감독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이런 감독과 작업하고 싶다, 이런 작품은 참 좋았다고 생각해 본 적 있나?
박 굉장히 많지. 이창동 감독님 작품은 다 좋고, 박찬욱 감독님도 그렇고. 근데 누구를 좋아하기 이전에 많은 감독들하고 만나고 싶다.
하 배우들은 좋은 시나리오를 받기 위해 스크린 속의 연기도 중요하지만 사석에서의 모습도 중요할 것 같다.
박 (손을 마주하고 비벼 보이며) 이런 거?
하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감독들이 봤을 때 사석에서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고 캐스팅할 때도 있지 않느냐는 거다.
박 내가 낯가림이 심하고 어른들 앞에서는 말을 잘 못한다. 박찬욱 감독님 앞에서도 술자리에서 한 세 마디 했나? 4~5번을 만났는데 말이다. 예전에 (박감독님이)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찍기 전에 일순이 역을 사석 본 박희순의 뚱한 이미지를 떠올리기도 했다더라. 나랑 작품을 해 본 감독님들은 재미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희순인 코미디 해야돼’ 이러면서.
하 앞으로는 밝은 이미지로 많이들 기억할 것 같다. 재미있지 않나? 처음에는 조폭, 깡패 이미지를 벗어나기 힘들었는데 영화 한편으로 반전을 이루는 것이.
박 그러니까 말이다. 코미디도 몇 편 제안이 들어 왔었다. 역할 자체에 코믹 요소가 있는 배역이. 조금씩 다양해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심사숙고 하고 있는 중이다.
하 기다리는 일은 참 잘 할 것 같다. <바보>도 그렇고 출연작이 개봉이 늦어져 많이 속상 했겠다. 2006년이나 올해 가을까지도. 속이 타진 않았나?
박 버티는 거 하난 잘한다(웃음). 물론 속은 탔지. 내가 일을 하면서 묶여있으면 하나도 문제 될 게 없다. 근데 영화가 중단된 상태에서 개봉이 안 되니까 미치는 줄 알았다.
하 그때 술 참 많이 마셨겠다.
박 그때는 대인기피증이 생겨서 사람을 못 만날 정도였다. 왜냐하면 하도 주변에서 (영화 진행 상황에 대해) 물어보니까. 근데 난 아는 것도 없으니까 사람 피해 다니느라 힘들었다.
하 <세븐데이즈>가 성공해 다행이다. 평소에는 뭐하며 보내나? 주량이 무척 셀 것 같은데.
박 저요?(웃음) 요즘 많이 약해졌다. 술 마시면 잔다(웃음). 그렇게 여유 있게 사는 편이 아니라 여행도 못 다니고.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은지, 불안도 하고(웃음).
하 그럼 스트레스는 다 술로 풀겠다.
박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니까. 커피마시면서 사람 만날 일은 없지 않나.
하 들어 온 시나리오 중 차기작은 결정했나?
박 아직. 대부분 3월에 다 크랭크인을 하는 것 같아 급하게 결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더라.
하 진짜인가? 난 인터뷰 다음날 바로 캐스팅 기사 나오는 거 제일 싫어한다.
박 그럼, 진짜다(웃음).
하 다음 인터뷰는 1년 안에 다시 했으면 좋겠다. 차기작이 무척 궁금하다.
박 하하. 물론 그래야지.
글_하성태 기자(무비스트)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