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터에, 주위 사람에게 “어떻게 더위를 없애요”라고 물어본다면 흔하게 대답하는 관습적인 답이 있다. 영화를 소개하는 사람이라면 “공포물을 보세요”가 그런 관습적인 대답일 것이다. 식은 땀 나도록 무서운 영화가 더위를 잊게 한다는 민간요법으로 자리 잡은 것이 효과가 있는지 올해도 무수히 많은 공포 영화가 대한민국 영화관을 찾아왔다.
사실 공포영화야 말로 장르영화 중에서도 가장 관습적인 부류의 영화다. 데뷔를 노리는 재능있는 신인 감독이 발군의 아이디어로 이름을 알린 작품이 유난히 많은 장르이자, 신인 감독의 탁월한 재능이 다른 어떤 영화 제작 조건보다 영화에 영향을 많이 줄 만큼 소규모 자본으로 만들 수 있는 영화이며, 한 작품의 성공 후에는 노골적인 후속편이나 모방작이 이어지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포영화를 이렇게 두터운 장르로 완성한 명감독들도 부지기수다. 젊은 시절 탁월한 공포영화로 데뷔했거나 출세작을 공포영화로 하여 대성한 사람들.
선구자, 명감독 리스트
지금이야 노장 스타일리스트로 유명한 브라이언 드 팔마가 유명해진 계기가 된 작품이 1976년작 〈캐리〉. 돼지피를 뒤집어쓴 캐리로 인해 프람 파티가 살육전으로 변하는 장면은 지금도 고전으로 전해진다. 변형 공포영화에 가까운 스릴러 TV 영화 〈대결〉로 재능을 인정받고 있던 스티븐 스필버그가 헐리웃 스타감독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 역시 변형 공포영화 〈죠스〉가 헐리웃 역사상 첫 블록버스터가 되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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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상치 않은 B급 영화로 유명했던 존 카펜터는 1978년 〈핼로윈〉으로 슬래셔 영화 유행을 열었고, 괴력을 가진 사이코가 십대들을 연쇄살인하는 패턴은 이때 거의 완성되었다. 지금은 〈스파이더맨〉 시리즈 연출로 더 유명한 샘 레이미 역시 장편 데뷔작 〈이블 데드〉의 성공으로 이름을 알린 경우다. 지금은 헐리웃 공포영화의 대부로 유명한 웨스 크레이븐의 초기작 〈힐 해브 아이즈〉는 고전 공포영화 리메이크 붐을 타고 요근래 리메이크되어 흥행에 성공했고, 그런 리메이크 성공작 리스트에는 1974년 토브 후퍼 감독의 데뷔작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도 올라가 있다. 가장 몸값 비싼 감독 중 하나일 피터 잭슨 역시 고향에서 〈배드 테이스트〉같은 변형 공포영화로 유명해졌고 전설적인 스플래터 영화 〈데드 얼라이브〉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영국 출신의 재능있는 감독이었던 리들리 스콧이 헐리웃에서 인정 받은 영화 역시 SF를 공포영화식으로 풀어낸 1979년 〈에이리언〉이었다.
신인감독의 등용문
소규모 자본으로 촬영할 수 있으며 아이디어가 중시되고 감독의 감각이 완성도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탓에 신인감독의 등용문이 된 것은 올해도 여전하다. 올 여름 선보이는 공포영화 중에서 〈전설의 고향〉〈해부학 교실〉〈기담〉〈리턴〉 네 편이 신인감독의 데뷔작이다. 신인감독의 공포영화가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아닌 것도 공통점이고, 상대적으로 몸값이 높은 스타가 출연하지 않는 점도 비슷하다. 예외에 속할 〈리턴〉의 경우에는 드라마 〈하얀거탑〉의 성공으로 몰라보게 지명도가 올라간 김명민을 비슷한 의사 역으로 캐스팅하여 마케팅을 펼치고 있지만, 실제 처음 〈리턴〉이 기획되었을 당시에 (당시 제목은 〈천개의 혀〉) 의도한 캐스팅은 아니었다. 오히려 촬영 중 홍보 때는 함께 출연하는 김태우 쪽에 (김혜수와 공연한 〈얼굴없는 미녀〉이후 다시 의사 역을 맡게 되었다며) 무게중심이 몰려 있었으나 영화 촬영 도중 〈하얀거탑〉의 성공으로 홍보 무게중심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영화촬영 도중 〈에이스 벤추라〉〈마스크〉가 대성공해 출연료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버린 〈덤 앤 더머〉시절의 짐 캐리와 비슷하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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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감독의 데뷔작으로써 네 편의 영화가 목표로 삼는 역할모델은 비슷할 게다. 나쁘지 않은 성공으로 계속해서 영화를 연출할 수 있길 바랄 것이고, 빅히트를 하여 〈데드 얼라이브〉〈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이블 데드〉같은 성공을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아니라면 최소한 비평적 성공을 거두어 작가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네 편 중 몇 편의 영화는 〈여고괴담〉〈알 포인트〉〈거미숲〉의 전례를 밟아 성공적으로 충무로에 안착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장르감독의 필모그래피
헐리웃이나 충무로나 장편영화를 한 번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은 험난하기 짝이 없다. 단편영화로 이름을 알리고 몇 편씩 엎어지는 영화판에서 수없는 스텦을 거쳐야 한다. 겨우 데뷔작을 잡았더라도 흥행실패의 악재가 따르면 다음 번에 영화를 할 수 있을 지도 분명치 못하다.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된 박찬욱과 봉준호도 장편 데뷔작 〈달은 … 해가 꾸는 꿈〉〈플란다스의 개〉가 실패한 이후 쉽게 다음 연출 자리를 잡지 못했다. 따라서 데뷔작 이후의 작품에서 공포영화를 연출하고 있다면, 다른 의미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올해 공포영화 중에서는 〈검은 집〉〈가면〉〈므이〉가 이 경우에 속한다. 이 중 〈가면〉을 연출한 양윤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단연 두텁다. 여름 공포영화를 연출한 감독 중에서 단연 중량급에 속하는 연출자다. 깐 영화제에서 주목 받으며 박신양과 함께 한국 영화계에 바람처럼 입성한 데뷔작 〈유리〉이후에 내내 장르 영화를 만들어온 필모그래피가 비평계의 의문을 사고 있기는 하지만, 한 쪽에 휩쓸리지 않고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꾸준히 영화를 만들고 있는 감독이기도 하다. 다만 탁월한 장르영화를 가지지 못하고 〈미스터 콘돔〉〈리베라 메〉〈바람의 파이터〉〈홀리데이〉같은 범작을 만들어온 양윤호 감독이 공포영화인 〈가면〉에서 얼마나 좋은 성과를 보여줄 지는 미지수. 똑같이 두 번째 작품을 공포영화로 고른 〈므이〉의 김태경 감독과 〈검은 집〉의 신태라 감독은 데뷔작을 장르영화로 출발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SF였던 신태라 감독의 데뷔작 〈브레인웨이브〉나 공포영화였던 김태경 감독의 〈령〉 모두 인상적인 반응을 얻은 작품은 아니었다.
꾸준히 장르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세 감독은 〈나이트메어〉〈스크림〉으로 헐리웃 공포영화의 대부가 된 웨스 크레이븐이나 〈핼로윈〉〈괴물〉〈매드니스〉같은 B급 영화의 대부 존 카펜터를 떠올리게 한다. 이미 비슷하게 공포영화 전문 장르감독을 표방하고 있는 안병기 같은 사례가 이들의 목표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장르영화의 익숙한 모습
장르영화는 오랫동안 축적되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정해진다기 보다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된 영화적 부속이 장르라는 이름으로 차례차례 구축되는 것이다. 공포영화에 대한 메타 공포영화였던 〈스크림〉이 영화내내 꼬집은 것처럼 “전화를 받는 첫 등장인물이 죽고”, “영화 중반 섹스를 하는 커플이 죽으며”, “주인공 금발 여자는 괴물에 출연에 멍청하게 이층으로 올라가는” 것 같은 식으로 쌓인 결과물이다. 그러니 어느 날 갑자기 외국 공포영화의 구성을 끼워 넣는다고 자연스럽게 한국의 장르 공포영화가 될 리 없다. 그러나 공포영화가 도입되던 몇 년간은 이런 외국 공포영화의 장르적 규칙을 갑작스럽게 도입하고, 어색한 부분부터 한국적으로 소화한 마름질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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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에이저 슬래셔가 본격적으로 부활한 1996년 〈스크림〉의 성공 이후 헐리웃에서나 한국에서나 비슷한 포맷의 공포영화가 줄을 이었다. 다만 헐리웃이 슬래셔 영화의 원산지였고 (그래서 20년이 넘는 슬래셔 장르의 기반이 축적되어 있었고) 한국은 외국 영화를 통해서야 보던 것이었을 뿐이다. 헐리웃에서 넘어온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류의 영화가 영화관에 걸릴 때쯤, 한국에서도 〈가위〉〈해변으로 가다〉와 같은 변형 슬래셔가 만들어졌다. 썩 좋은 흥행을 거둔 작품은 아니었고 영화적으로도 널리 인정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공포영화라는 장르가 본격적으로 한국 영화에 나타나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런 시도가 없었다면 〈여고괴담〉을 거치며 ‘슬픈’ 감수성을 한국 공포영화에서 찾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장화, 홍련〉이나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같은 웰메이드 공포영화가 나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헐리웃까지고 넘어가 리메이크되었던 <링>이 소설로나 영화로나 대성공을 거두고 〈주온〉같은 일본 공포영화가 대거 높은 평가를 받던 시절부터는 한국 공포영화에서 사다꼬(〈링〉의 머리 긴 처녀귀신)의 그림자를 찾지 못하는 작품을 찾기 힘들었다. 기괴한 관절 꺾기를 하며 머리를 풀어내린 사다꼬의 독특한 비주얼과 〈링〉과 같은 방식으로 공포를 풀어가는 방식은 2000년대 수많은 한국 공포영화에서 차용했던 영화적 부속이었다. 몇몇은 효과적이기고 했지만, 지금은 물리다 못해 지겨운 지경까지 이른 사다꼬의 망령을 〈령〉〈가발〉〈아파트〉 등의 수많은 공포영화에서 찾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올해 한국공포영화는 제각기 다른 소재를 끌고 왔고 소재만으로 보면 이제 슬래셔와 사다꼬의 아우라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듯 하다. 의학을 배경으로 하는 〈해부학 교실〉과 〈리턴〉같은 작품이 있는가 하면, 스릴러 쪽에 더 가까운 〈검은 집〉〈가면〉같은 영화가 있고, 독특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므이> <기담> <두사람이다> 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올해 공포영화는 성공적인 진입을 했다. 물론, 이미 선을 보인 영화들의 평가는 좋지 않다. 기왕의 한국호러의 고질적 문제를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여하간 이제 남은 것은, 한국 장르의 틀에서 개봉을 앞둔 공포영화가 얼마나 새로운 지평을 찾을 수 있느냐와 관객들이 그에 호응하느냐일 것이다.
글_유지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