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비 블러드>의 공통점은? 올 아카데미를 휩쓴 영화들이 아니다. 두 영화의 감독 코엔 형제와 폴 토마스 앤더슨 모두 한때 미국 독립 영화의 기수들이었다. 작가적 고집과 안목을 갖춘 그들이 아카데미에 입성함으로써 예술적 상업 영화 감독의 이름을 공고히 한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이러한 예는 차고도 넘친다. 이건 상업적이거나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을 옹호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 건 스릴러의 장인 알프레드 히치콕은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과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의해 재발견 됐고, <죠스>와 같은 재기발랄한 장르 영화로 시작한 스필버그는 지금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무시하지 못할 거장의 자리에 올랐다.
영화 장인들이 만든 상업영화들은 결코 단순한 오락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학자 수잔 헤이워드는 “장르적 관습들도 ‘진화’하고 경제적, 기술적, 소비적 이유들로 변형을 겪는다. 그것들은 역설적이지만 보수적인 동시에 진보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고 기술한 바 있다. 장르는 제작, 마케팅, 소비 과정을 통과하면 세상, 그리고 관객과 조응한다. 다시 말해, 동시대의 분위기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 다는 뜻이다.
이건 우리 영화들도 마찬가지다. 1, 2월 개봉해 한국 영화 흥행을 주도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과 <추격자>는 스포츠 드라마와 스릴러라는 장르적 외피를 쓰고 있지만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 충분히 기능한다. <바보>, <숙명>과 <GP 506> 또한 멜로와 느와르, 공포라는 장르 안에 의도였든 아니든 한국 사회의 무의식들을 품고 있다.
한국영화들이 점점 장르의 틀에 매달리고 있다. 관객들의 입맛에 맞추려는 산업적인 요구임을 감안하더라도 좀 더 총체적인 시각으로 읽을 필요성을 느낀다. 각기 다른 장르지만 어떤 영화는 장르성에 포획되고, 또 어떤 영화는 작가적 인장을 찍기도 한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와 대중 사이에 흐르는 어떤 공기가 포착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를 감안하고 올 해 개봉되어 관객들의 관심을 받은 우리 영화 5편을 거들떠보도록 하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스포츠 드라마가 품은 마이너리티
사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크랭크인 전부터 말들이 많았던 프로젝트다. 작가주의 표방했던 임순례 감독이 ‘아줌마’들을 주인공으로 ‘핸드볼’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대중성이 검증되지 않은 감독에, ‘제3의 성’이라 희화화되는 인물군으로, 비주류 종목을 영화화한다고 했으니, 촬영종반까지 투자가 마무리 되지 않아 그리스 로케이션을 짧게 끝내야 했다는 얘기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하지만 ‘실화’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영화가 승승장구하자 이러한 약점들은 오히려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요인으로 분석됐다. 사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스포츠 드라마의 장르성을 바탕으로 ‘아줌마’라는 마이너리티를 보듬는 휴먼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임순례 감독은 ‘오합지졸들이 결국 자신만의 감동적인 승리를 일궈낸다’는 스포츠영화의 공식을 지켜내면서도 그녀들을 ‘건강하게’ 긍정한다. 경기신에서조차 카메라를 너무 들이대지 않고 폭넓게 조마아는 동시에, 올림픽이 끝나면 또다시 빚더미와 비정규직의 비루한 삶으로 돌아가는 미숙을 응원하는 것이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흥행이 한국 대중들의 실화 신드롬에 기댄 측면이 다분하다는걸 감안하더라도, 임순례 감독은 분명 장르 공식을 배반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에 발을 디디고 서서 기어이 작가적 인장을 찍어냈다.
물론 엔딩의 실제 인터뷰 화면이 ‘오버’라는 지적도 있지만 한국 사회 내의 핸드볼의 위치를 감안한다면 눈물의 극대화나 현실의 환기, 두 측면 모두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 무엇보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가치는 소재와 캐릭터들의 생생한 묘사로 장르성을 넘어서며, 전복과 연대, 그리고 생생한 현실감을 성취해냈다는데 있다. 그것도 과거나 무국적의 공간이 아닌 지금, 이곳을 딛고 서서 말이다.
<추격자>, 미진은 결국 죽어야만 했나.
500만 관객 동원을 목전에 둔 <추격자>는 <살인의 추억> 이후 최고의 스릴러라는 상찬을 듣는 중이다. 비슷하게 <공공의 적>이 연쇄 살인범과 좀 덜 나쁜 놈의 대결이란 소재를 코미디로 풀었다면, <추격자>는 초반부터 범인 영민(하정우)의 정체를 드러낸 뒤, 이를 뒤쫓는 보도방 주인 중호(김윤석)의 피로감을 뒤쫓는다.
자기가 사지로 내 몬 보도방 여자들 중 미진(서영희)만은 살려야 한다는 간절함. 전직 경찰이지만 지금은 이른바 ‘포주’인 중호가 24시간 넘게 영민을 뒤쫓는 무의식에는 이러한 자괴감과 무력감, 절망이 뒤섞여 있다. 그렇다고 영화는 그가 개과천선할 여지를 마지막까지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다. 한국이란 시스템이 낳은 기형적인 산물은 ‘사이코패스’ 영민이 아니라 폭력적이고 천민자본주의 시스템에 길들여진 중호일테니.
‘범인이 누구일까’보다 중호의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이냐를 쫓아가는 <추격자>의 서스펜스는 바로 미진의 생사여부에서 발생한다. 틈틈이 그녀의 탈출기를 관전시키던 나홍진 감독은 미진이 영민의 손으로 무참히 살해 당하는 순간을 생생히 중계한다. 이전 희생자들이 죽음은 건너뛰었건만 미진만은 슬로우모션과 클로즈업 기법을 사용, 흩날리는 피를 친절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관객 모두가 살기를 바랐던” 미진의 죽음은 관객들의 공분을 일으키려는 나홍진 감독의 철저한 계산인 셈이다.
현실에서 뒤이어 터진 안양 초등학생 살해범과의 비교는 너무나도 게으르고 우연적인 발상이다. 하지만 미진의 무참한 죽음을 재현하면서까지 리얼리티와 분노를 요구하는 <추격자>의 방식에서 강력범죄와 ‘사회적’ 죽음에 부지불식간에 길들여진 우리 사회를 본다. 많은 관객들과 글쟁이들이 그 장면의 윤리성을 제기했지만 그럼에도 500만 가까운 관객들이 <추격자>를 찾는 이유는 그러한 강력범죄를 대리 경험하고,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을 느끼기 때문이리라. 마치 미국 관객들이 이러저러한 영화와 드라마로 9.11 테러를 소비하는 것과 비슷하게.
<추격자>가 품은 한국 사회의 공기는 오물 세례를 받는 서울시장이나 경찰의 무능함에 있지 않다. 우리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아무리 ‘중호’처럼 전력을 다해 뛰는 자가 있더라도 죽고 말거라는 절망감이 그 요체다. 그리고 나홍진 감독은 사이코패스들은 어떤 심리적 원인도 없고 지켜줄 시스템도 낡았으니 그저 ‘버티시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게 바로 미진이 죽어야했던 이유일 것이다.
뒷골목을 지워버린 멜로드라마, <바보>
시작부터 <바보>는 젊은 독자들이 열광한 강풀의 동명 원작 만화와 경쟁해야 할 운명이었다. 원작 만화 <바보>는 20대 중후반 독자들이라면 동네에 한 명씩은 있었던 ‘바보’ 형이나 친구를 아련한 추억의 시공간과 우리 동네로 불러 낸 뒤, 지금은 사라져가는 가치인 그의 순수함을 본 받자고 권유하는 내용이다.
그리하여 바보 승룡(차태현)이의 순수함에 감화된 첫사랑 지호(하지원)는 손을 놓았던 피아노를 치러 다시 외국으로 향하고, 뒷골목 인생이었던 친구 상수(박희순)과 애인 희영(박그리나)는 자영업자와 일자리(비정규직인지 정규직인지는 확실치 않지만)를 얻어 새출발을 도모하고, 고등학생인 동생 지인은 장애인 오빠의 진심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바보>는 희생의 멜로드라마다. 그러나 바보 승룡이가 첫사랑을, 동생을, 친구를 위해 희생하고 떠나가는 궤적을 그리는 <바보>는 원작과 달리 술파는 카페 여급 희영과 상수의 이야기를 대폭 줄였다. 구질구질한 인생사가 녹아든 상수와 희영의 어두운 이야기는 얼개만을 남겨둔 채, 차태현과 하지원, 두 선남선녀가 연기한 승룡이와 지호의 애틋한 감정에 치우칠 때, <바보>가 지닌 감동의 폭은 오히려 반토막이 나버렸다.
영화는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 지닌 의미를 중시해 동생 지인의 감정선을 세부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어찌보면 ‘바보’의 희생과 죽음은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었던 ‘바보’들의 격리와도 같은 과정으로 보인다. 원작의 애잔함과 멜로드라마의 공식을 과감히 버리고, 또 급작스런 영화적인 결말을 대신해, 오빠를 이해하는 동생과 그를 아끼는 친구와 함께 살아가는 결말을 그렸다면 영화 <바보>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약육강식’ 한국사회를 게으른 느와르 공식으로 돌파하려는 <숙명>
<숙명>은 송승헌과 권상우가 없었다면 완성되지 못했을지 모른다. 두 한류 스타의 출연으로 투자를 보장받았을 이 영화는 <파이란>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애, 그 참을수 없을 가벼움>을 연출했던 김해곤 감독의 작품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시대착오이다.
사실 느와르, 갱스터 장르는 사회에 기생하는 악과 그 안에서 바둥거리는 주인공들을 비장미로 버무려낸 장르다. 구조적으로 거의 신화화된 장르이면서 우리에게는 <스카페이스>보다 <영웅본색>류로 친숙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숙명>은 진짜 그러한 신화화되고 장르화 된 길을 어설프게 밟으려고 한다.
심히 삐걱거리는 건 현실적인 대사들과 지극히 전형적인 타입의 캐릭터들이 부딪칠 때다. 김해곤 감독표 생생한 ‘대사빨’은 철중 역의 권상우가 욕을 입에 달고 나와도 체화되지 않은 상태이며 오히려 돋보이는 건 무시무시한 자학의 달인인 도완역의 조연 김인권이다. 한껏 멋을 낸 송승헌의 나레이션이 공허해 보이는 건 이 영화가 꼭 2008년이 아니어도 괜찮을 만큼 우정, 배신, 파멸이라는 장르의 공식을 ‘수박 겉핥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폭’ 회사의 네 친구가 끝내 막다른 제 갈 길을 간다는 수컷들의 인정투쟁기 <숙명>은 그 만큼 시대착오적이다. 아무리 ‘나쁜놈’ 철중이 막다른 골목에 처하는 상황이 아파트 건설 건이라고 치더라도, 이건 다 <우아한 세계> <짝패> <비열한 거리> 등이 써먹은 소재다. 미안하지만 ‘꽃미남이지만 괜찮아’라고 하기엔 <숙명>을 보는 우리의 감수성은 훨씬 더 성숙해 있다는 걸 염두에 두시길.
장르의 미로에서 길을 잃은 분단 미스테리 <GP 506>
공수창 감독의 <알 포인트>는 가장 뛰어난 한국산 호러 영화 중 한편이다. ‘손에 피를 묻힌자,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는 경고는 베트남이란 한정된 공간과 우리 아버지들이 피를 묻혔던 공통의 원죄의식을 불러일으키며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알 포인트>와 함께 공수창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하얀전쟁>까지 포함해 ‘밀리터리 3부작’이라 부를 수 있는 <GP 506>은 한정된 공간을 비무장지대의 최전방 경계초소 GP(Guard Post)로, 공포의 동인을 귀신이 아닌 원인모를 바이러스로 치환했다. 21명의 소대원이 죽어나간 그 자리에 당도한 또 다른 21명의 소대원들. 그들이 목도한 믿지 못할 상황이라는 점은 전작과 닮아 있지만 말이다.
폐쇄성과 원죄의식을 장르와 역사에 버무려냈던 전작과 달리 <GP 506>은 일단 중반까지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에 대한 미스터리 구조에 매달린다. 무리수를 둔 반전과 이중의 회상 장면은 수사 담당 노원사(천호진)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이유를 대더라도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이러한 디테일한 장치들이 ‘분단이 낳은 정체모를 바이러스’가 빚은 참극이라는 주제의식과 조화를 이루었나 하는 대목은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그건 우리를 불안하게 했던 ‘타자’와 그로 인한 심리적 동요가 선명했던 <알 포인트>와 달리 <GP 506>의 지향점이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바이러스’가 은유하는 바가 분단이 빚어내는 피로감과 상처들이라는 건 짐작 가능하지만 <GP 506>은 그걸 친절히 설명해 주지 않을 뿐 더러 의도적인지 편집상 실수인지 모호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중립적인 노원사를 통해 그걸 덮어두기 위해 모두 다 희생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러니까 ‘남북군사’ 문제는 어디까지나 은폐되어야 하고, 그것으로 평화를 유지해야 된다는 기이한 내러티브 구조. <알 포인트>의 명백한 역사와 달리 공수창 감독이 고민했을 지점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영화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지점들이 <GP 506>을 갸우뚱하게 만든다. 만약 예산이 적은 B급 영화였다면 분단의 상처로 발생한 좀비들이 비무장지대를 넘어오는 전복적인 결말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같은 비극일지라도 오경필 중사만은 살려두었던 <공동경비구역 JSA>가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수 있겠니?’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진정 행복한 순간은 궁지에 몰려 자살을 기도한 미숙의 남편이 살아남아 병상에서 눈물 흘릴 때다. 그리고 최선을 다한 미숙은 승부던지기에 실패한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리라’는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
다소간의 판타지라고 추궁할 관객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한국영화들은 너무나도 ‘죽음’을 비장하게, 그리고 손쉬운 선택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걸 너무나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건 장르 법칙과 상관없는 문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제외하고 장르가 다른 네 편의 영화 모두 주요 인물들이 죽어나갔다.
어쩌면 한국 사회가 그 만큼 절박하다는 반증일지 모른다. 비약하자면 생계형 혹은 사회적 죽음과 맞먹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는 뜻일지 수 있단 얘기다. 그걸 장르 영화들은 장르 법칙이란 허울에 숨어서 반영하고 있는지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관객들은 현실을 비정하게 직시한 영화들도, 말랑말랑하기 만한 로맨틱 코미디도 외면하고 있는 중이다. 조폭코미디를 봐도 웃다가 꼭 한 번쯤은 울어줘야 하고, 비극적인 결말에도 적잖이 길들여져 있다. 상위 몇 퍼센트를 제외하곤 우리가 꼭 그렇게 불안정하게 혹은 감정의 진폭이 큰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영화는 그렇게 여전히 현실을 반영하는 중이다. ‘다이내믹 코리아’에서도 예외는 없다.
2008년 4월 14일 월요일 | 글_하성태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