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제를 다시 불러 세운 건, 정우성이다. <검우강호> 기자회견 현장에서 할리우드 진출계획이 없느냐는 질문에 정우성은 답했다. “할리우드 진출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할리우드 주류 영화에 지속적으로 출연하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기량이 아닌 성룡이나 이연걸처럼 무술 고수가 돼야 한다.” 여기에 수개월 전, 장항준 감독이 하려 했던 핵심이 있다. 본인이 쌓아온 개성 대신, 액션으로 진출하는 스타들에 대한 걱정과 충고가 그것이다. 할리우드에 진출하겠다는 도전 정신은 중요하다. 목적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길을 가는 방법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병헌은 연기파 배우다. 표정연기가 특히 일품이다. 중저음의 목소리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할리우드 영화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이하 ‘<지.아이.조>’)에 출연하는 대가로, (대부분의 씬에서)하얀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몇 마디 없는 대사에 빛을 바랬다. 전지현은 타고난 게 많은 배우다. 대중이 선호하는 외모와 신세대적인 모습은 그녀를 트렌드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전지현의 매력은 로맨틱코미디와 멜로드라마에서 유독 잘 살았다. <엽기적인 그녀>와 <시월애> 등이 이를 증명했다. 하지만 인기절정을 달리던 그녀는 갑자기 작품 활동을 멈췄다. 오랜 공백 끝에 선택한 건, 할리우드 액션영화 <블러드>였다. 그 속에 대중이 기억했던 엽기 발랄한 20대 여배우는 없었다. 우울한 분위기의 여전사만이 말없이 있었다. 로맨틱함 대신, 칼을 손에 든 결과는 참담하다 못해 암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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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자 어쌔신> 개봉을 앞두고 비는 ‘씨네 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닌자 어쌔신>을 빈약한 스토리라고 비난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이 영화로 레인이라는 캐릭터가 할리우드 시장에 얼마냐 각인되느냐 하는 문제다. 설사 흥행에 성공하지 못해도 이름은 남을 수 있다. 그럼 된 거다. 그럼,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영화는 미국 2,800개관에서 개봉했다. 그의 말대로 이름은 (엔딩 크레딧에 또렷이)남았지만, 흥행은 실패했다. 그리고 비의 다음 스텝은 할리우드가 아닌 수목드라마 <도망자 Plan.B>였다. <도망자> 다음도 국내 영화 <빨간마후라>다. <빨간마후라> 이후 최소 2년은 대안이 없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대에 가야한다. 아마, 국내 팬들은 2년이라는 시간동안 비를 기다려 줄 거다. <풀하우스>에서 ‘곰 세 마리’를 부르던 비를 추억하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인간미 넘치는 비를 기억하며 기다릴 거다. 하지만 비라는 사람의 매력이 아닌, 그의 육체만을 본 할리우드는 장담할 수 없다. 비가 할리우드에서 각인시킨 건, 20대 동양 남자의 건장한 몸이었다. 육체란 시간이 지날수록 쇄약해지기 마련이다. 2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할리우드가 비에게 강인한 체력만을 요구하다면? 그가 할리우드에서 보여준 건, 아직 육체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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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특색의 하나로 <워리어스 웨이>가 내세운 게 하나 있긴 하다. 로맨스다. (홍보자료가 뿌려 진건지, 어쩐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영화 개봉을 앞두고 나온 기사 10개 중 9개가 ‘동양 남성 배우 최초로 서양 여배우와 로맨스 펼친다’며 <워리어스 웨이>를 높이 샀다. ‘장동건이 동양 남성 배우에 대한 금기를 깼다’고 칭송한 기사도 있었다. 하지만 이 기사들의 팩트는 틀렸다. 장동건 이전에 <애나 앤드 킹>의 주윤발이 있었다. 그의 멜로 상대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 조디 포스터였다. 하정우도 있다. <두번째 사랑>에서 하정우는 <디파티드>로 알려진 베라 파미가와 지독한 사랑에 빠졌다. 영화는 프랑스 도빌 아메리카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도 수상했다. 90%의 영어 대사를 완벽하게 소화한 하정우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하정우의 도전을 기억 못한 건, <두번째 사랑>이 우리나라로 치면 저예산독립영화에 해당하는 작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스타들의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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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심형래 감독의 <라스트 갓파더>가 미국에서 개봉한다.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어떤 원성이 돌아올지 모를 멘트지만)<디 워>는 ‘명백히 못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게다가 ‘대부의 숨겨진 아들이 영구다’가 기본 콘셉트라니. 범우주적인 상상력에 웃음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에 있어서만큼은 심형래를 인정하고 지지한다. 적어도 심형래는 할리우드로 가기 위해 자신을 버리진 않았다. 1980-1990년대 추억의 한국영화로 기억되는 영구 캐릭터가 할리우드 땅에서 되살아날지 그 누가 상상했겠나. 어쩌면, 진정한 도전이란 이런 거다.
2010년 12월 8일 수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