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할아버지가 착한 어린이에게 선물을 가져다준다는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다. 그런데 정말 산타는 착한 어린이에게만 호의적일까? 잘은 모르겠다만, 적어도 극장가에서 이 소리는 속된말로 ‘구라’다. 자본주의 논리가 잠식한 극장가에서 착하고 못된 기준은 단 하나다. ‘돈이 되느냐, 아니 되느냐!’ 극장 입장에서 돈이 되는 영화는 ‘착한’ 영화고, 관객이 몰리지 않는 영화는 이유 불문 ‘나쁜’ 영화다. 그들 눈에 착하게 보인 영화는 ‘상영관’을 선물로 받아 홈런 칠 기회를 얻는 반면, 나쁘게 찍힌 영화는 삼진당하거나 애초에 강판되는 불운을 겪는다. 이러한 ‘몰아주기’식 분배는 독과점이라는 이름으로 올해에도 어김없이 되풀이됐다.
예상대로였다. 올해 크리스마스 극장가는 스크린을 양분한 <아바타>와 <전우치>의 쌍끌이 흥행으로 끝났다. <아바타>와 <전우치>가 확보한 스크린은 각각 838개와 692개관. 국내 스크린 수가 2,100여개임을 감안하면 ‘20세기폭스 코리아’와 ‘CJ엔터테인먼트’의 배급 영화가 전체 스크린의 70% 이상을 점령했다는 뜻이다. 전국 스크린의 과반수이상. 절대 공산국가 이야기가 아니다. 이 땅 위에서 벌어지는 100% 리얼 드라마다. 메이저 배급사의 스크린 독과점은 매 시즌 지겹게 되풀이 된 이야기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런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독과점 문제가 올해에는 유독 새삼스럽다. 이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달리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 요인을 추적해 봤다.
<아바타> 독과점을 바라보는 시선, “이건 유레카”
크리스마스 극장가 흥행 대결의 스타트는 <아바타>가 일주일 먼저 끊었다. 1998년 <타이타닉>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트로피를 치켜들며 “내가 이 세상의 왕이다(I’m King of the World)”를 외쳤던 제임스 카메론은 <아바타>로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집어삼키며 세상의 왕까지는 몰라도, 흥행의 왕임을 다시금 입증했다. <아바타>의 흥행 돌풍은 국내 극장가에도 가볍게 연착륙했다. 개봉 3일 만에 100만 관객을 불러들이며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 <2012>에 이어 올해 최단기 100만 돌파라는 고무적인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아바타>의 이러한 성공 이면에는 홀로 전국 911개관을 배불리 잡수신 스크린 독점의 혹독한 논리가 숨겨져 있다.
눈여겨 볼 건, <아바타>의 독과점을 바라보는 일각의 의연한 시선이다. 과거 <괴물>, <스파이더맨3>, <트랜스포머:패자의 역습>이 독과점으로 인해 영화계 안팎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던 것에 비하면 <아바타>를 향한 독과점 비난은 귀여운 애교수준이다. 이에 대해 <아바타>의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영화인 관계자는 말한다. "<아바타> 개봉 시기에 별다른 경쟁작이 없었던 게 우리로서는 호재였다. 러닝타임이 160분에 달해 하루 상영회차가 많아야 4-5회인 불리한 요인도 독과점에 대한 얘기를 줄이는 요소로 작용했다.” <아바타> 개봉 당시 독점의 피해를 받을 만한 한국영화가 없었고, 개봉 편수가 많지 않았던 만큼, <아바타>가 세몰이를 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비판이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단순히 ‘경쟁작 부재’와 ‘긴 상영 시간’만으로 <아바타> 독과점에 태클 걸지 않는 이번 상황을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특히 독과점의 폐해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를 높여온 충무로의 침묵은 더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점을 내포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기에는 좀 더 거시적인 경제논리가 개입돼 있다. 바로 극장 관람료다. 지난 여름 <트랜스포머:패자의 역습> 개봉을 앞두고 각 멀티플렉스들이 요금을 1,000원씩 인상한 것처럼 <아바타> 개봉을 앞두고 CGV를 비롯한 롯데시네마, 씨너스 등 멀티플렉스가 차례로 3D 상영관 요금인상을 단행했다. 이들 극장들의 요금 인상 시기가 <아바타>의 개봉과 맞물린 것은 그저 오비이락(烏飛梨落)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사실 관람료 인상은 투자사와 영화제작사의 오랜 숙원이자 마르지 않는 갈망이다. 물가 상승과 영화 2차 시장의 궤멸로 극장 수입에 전력투구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요금 인상을 할 만한 ‘꺼리’가 필요했다. 이 때 마침 등장해 준 게 <아바타>다. ‘영상 혁명’, ‘3D 영화의 신기원’이라는 평을 얻은 <아바타>는 티켓요금 인상에 대한 리스크를 최소화 할 수 있는 명분 있는 영화가 되기에 최상의 조건을 지닌 작품이었다. 게다가 3D 상영관의 수익이 일반 상영관에 비해 높다는 점은 <아바타>의 독과점에 대해 충무로와 투자사의 입을 틀어막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바타>가 당장은 한국영화 점유율을 떨어뜨리는 라이벌이지만, 멀리 보면 매출 신장에 혁혁한 공헌 세우는 녀석이니,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영화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러한 <아바타> 독과점에 대한 ‘침묵’은 충무로 뿐 아니라 증시계가 합세하며 ‘함구령’으로 이어지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증시 관계자들은 <아바타>의 흥행이 주식시장에도 흥미로운 시사점을 준다고 확신한다. <아바타> 이후 불어 닥친 3D 열풍이 3D 관련주들의 주가에 모멘텀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실제로 <아바타>로 인해 ‘케이디씨’와 ‘아이스테이션’ 등 3D관련주들이 순풍에 돛 닿듯 순항을 이어가고 있다. <아바타>의 흥행 성공이 단순히 영화 하나의 성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관심을 ‘턴어라운드’ 시키고, 영화 산업에 대한 투자를 이끈다는 점에서 <아바타>의 스크린 독과점엔 전에 없던 면죄부가 주어졌다.
물론 위의 평가는 어디까지나 가진 자들, 공급자들의 입장이 크게 반영된 시선이다. <아바타> 독과점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처럼 적대적이지 않음이 증명되기 위해서는 <아바타>로 인해 큰 피해를 보는 영화인들의 동의가 선결돼야 한다. 이에 대해 <아바타>와 같은 날 개봉한 독립영화 <좋아서 만든 영화>의 고달우 감독은 말한다. “<아바타>와 경쟁하는 것은 <2012>같은 기존 블록버스터와 붙는 것과는 다르다. 주류 상업영화에 염증을 느끼고 독립영화를 찾던 관객들마저 <아바타>가 가진 3D 기술에 반해 그 쪽으로 편승하는 실정이다.” <아바타>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걸프렌즈> 홍보사 아람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3D 영화의 포문을 먼저 열기는 했지만, 그건 아동용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아바타>는 다르다. 돈을 더 지불해서라도 보겠다는 관객이 많다보니 작은 영화들은 개봉관 잡는 쉽지 않다” 즉, 3D라는 신기술을 들고 온 <아바타>의 독과점은 기존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독과점과 다른 시선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이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보는 견해인 것이다.
<전우치> 독과점을 바라보는 시선, “국가대표 영화잖아”
<아바타>가 일찍이 고지를 선점한 상황에서 이를 추격하고 나선 건, ‘CJ엔터테인먼트’의 배급을 탄 <전우치>다. <타짜>, <범죄의 재구성>으로 흥행 감독의 반열에 오른 최동훈 감독과 강동원, 김윤석, 임수정 이라는 쟁쟁한 스타들이 뭉친 <전우치>의 물량 공세도 <아바타> 못지않았다. <전우치>는 23일 개봉 전날, 전국 약 560개관에서 전야 상영을 실시하며 <아바타>에 도전했다. 이는 한발 앞서 대규모 전야상영을 했던 <아바타>의 548개관을 넘어서는 규모였다. 이러한 <전우치>의 높은 스크린 점유율에 대해서도 논란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아바타>와는 다른 이유다. 그 중심에는 <전우치>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 도배질 된 크리스마스 극장가를 구원할 유일한 한국 영화라는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개봉 막바지에 접어든 <여배우들>, <시크릿>의 뚜렷한 관객 하락세와, 비슷한 시기 개봉한 <걸프렌즈>의 실망스러운 흥행 성적 역시 <전우치>로 스크린 수를 몰아주는 결과를 낳았다. 한 영화 관계자는 말한다. “수년간 침체위기를 겪다가 최근 <해운대>와 <국가대표>로 그나마 회복세에 접어든 한국 영화로서는 이를 이을 영화가 필요했다”고. 그것이 바로 <전우치>인 셈이다.
<워낭소리>, <똥파리>, <낮술> 등의 약진 역시 의외의 방향에서 반전을 선사했다. 이들 영화의 성공 이후, 제2의 <워낭소리>를 외치거나 <똥파리>의 후예를 꿈꾸거나 <낮술>처럼 취하고 싶어 안달 난 준비 덜 된 영화들이 개봉을 서두른 게 이유다. 양적 증가를 따르지 못한 질적 완성도와 다양성은 작은 영화에 대한 옥석가리기를 힘들게 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투자 배급사로 하여금 검증이 된 <전우치> 같은 상업영화로 눈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흥미로운 의견은 또 있다. “대목에는 영화도 영화지만, 팝콘 등을 파는 매점의 수익도 무시할 수 없는데, 매점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세력이 바로 가족 단위 관객이다. 극장가에서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가족 단위 관객을 가장 많이 끌어들일 영화로 <전우치>를 꼽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극장 관계자의 말이다. 이렇듯 한 편의 영화가 극장에 걸리는 데까지는 단순히 관객 머리수로만 평가할 수 없는 좀 더 복합적인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전우치>는 그 복잡다단한 이해의 그물망에 걸린 운 좋은, 아니 현 시스템이 낳은 예견된 영화이고 말이다.
<아바타>, <전우치>에 낀 영화들, “거기 누구 없소”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4년 만에 눈이 왔다. 제설작업에 동원된다는 군인 빼고 모두가 손꼽아 기다린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하지만, 극장가에서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맛본 건, 소수의 영화뿐이다. <아바타>와 <전우치>의 사연 있는(?) 스크린 독과점 속에서 <셜록 홈즈>가 그나마 함박눈의 분위기를 만끽했고, 작은 영화들은 그 눈이 녹아 질퍽해 진 거리에서 미끄러졌다. ‘퐁당퐁당(한 상영관에서 다른 작품과 번갈아 상영하는 것을 뜻하는 영화계 은어)’거리거나, 1-2개 스크린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 영화도 부지기수다. 하긴, 요즘 화제작이 못되면 극장에서 교차상영 되는 건 화젯거리도 못 된다. 스타가 나오지 않는 영화는 시장에서 잔인하게 외면 받기도 한다. 멀티플렉스(multiplex)가 그 용어의 정의인 '복합'상영관이 아니라 '복수'상영관으로 둔갑한 게,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이었던가. 하지만 적어도 예전에는 옳지 못한 건, 옳지 못하다고 분풀이라도 했다. 충무로가 언론이 영화인들이 그리고 네티즌들이 결과 도출은 못해도, 함께 머리 싸매고 눈앞에 놓인 문제를 푸는 시늉이라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신기술 앞에 너도 나도 ‘유레카’를 외치고, ‘한국영화 살리기’라는 명분 아래 독과점을 묵인했다.
<아바타>와 <전우치>가 어떠한 구구절절한 사연을 지녔든,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영화들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스크린 독과점의 비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더불어 생각해 봐야 할 건, 영화 산업은 점점 발전한다는 점이다. 제2의 <아바타>, 제3의 <아바타>가 계속해서 쏟아지지 말라는 법 없다. 그리고 그러한 할리우드 영화에 대응하기 위해 이번처럼 큰 영화에 힘을 실어주는 국내 개봉 시스템이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큰 영화들이 독과점에 대해 핑계 댈 만한 이유가 많아지는 상황에서 작은 영화들의 시름은 깊어진다. 이제는 어디 가서 하소연 할 곳도 없다. 뭐? 정부를 통해 문화적 다양성을 외치라고? 어디보자. ‘선 성장, 후 분배’라는 시장의 논리를 내세워 온 정부가 언제 독과점 논란에 대해 속 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한 적이 있었던가. 시장의 자유를 들어 대기업 편애나 하지 않으면 오히려 다행이다. <아바타>와 <전우치>의 동반 흥행으로 올 크리스마스 시즌 시장 규모가 작년 대비 30%이상 증가했다며 누군가가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을 때, 누군가는 허허벌판에 선 심정으로 외치고 있을 게다. “거기, 누구 없소.”라고.
2009년 12월 29일 화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