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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 불구경! <안나와 알렉스> 개봉 기념! 할리우드 리메이크작에 대한 ‘비카인드 리와인드’
2009년 4월 10일 금요일 | 하성태 이메일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콘셉트가 무엇이냐를 구름 잡듯이 쫓아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역시나 영화적인 상상력이 뛰어나면서도 보편적인 주제를 얘기해야 한다는 믿음은 더 강력해졌다” <거울속으로>의 리메이크 판권을 뉴리젠시 필름에 팔았던 제작자 김은영이 배운 것은 보편성이다. <미러>가 완성되기까지 3년.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완성된 시나리오를 읽고 약간의 조언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무기인 보편성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한 정신과 의사가 죽은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작은 소년을 도와야만 합니다.’ <식스 센스>의 한 줄 요약 버전이다. 지난해 서울국제가족영상축제에서 만난 프로듀서 댄 트램 뉴엔 또한 리메이크나 합작에 있어 이런 ‘하이 콘셉트 High Concept’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수퍼맨>과 <리셀 웨폰> 시리즈를 만들고 현재 <울버린>의 개봉을 앞둔 ‘도너스 컴패니’의 프로듀서다. “미국인은 물론 전세계인이 공감할 보편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는 창조적인 캐릭터를 겸비한 한국영화의 가능성 또한 높이 샀다.

관건은 콘셉트와 보편성이다. 한국으로 역수입된 네 편의 영화는 개별 특성에 맞게 ‘made in Korea’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레이크 하우스>부터 <안나와 알렉스 : 두 자매 이야기>까지 네 편이 선보인 지금. 어떤 ‘하이 컨셉’이 보편성이란 기준으로 변모됐는지 살펴볼 때가 됐다.

판타스틱 멜로 <레이크 하우스>의 경우

두 남녀가 우체통과 편지를 매개로 2년이란 시차를 뛰어넘어 교감을 나눈다는 설정은 분명 매력적인 판타지다. 여기에 <시월애>가 나레이션을 남발하며 고독한 두 남녀의 내면에 초점을 맞췄다면, <레이크 하우스>는 적극적으로 두 주인공의 관계를 부각시킨다. 그런만큼 <레이크 하우스>는 단일한 스토리를 통해 관객들을 편안하게 결말까지 이끄는 할리우드의 고전적 내러티브를 충실하게 따랐다. 캐릭터는 약간 다르다. 남자친구로부터 이별통고를 받고 2년째 우울하게 방황중인 사회초년생 은주(전지현)는 레지던트를 끝마치고 결혼적령기에 접어든 케이트(산드라 블록)로 바뀌었다.
 <시월애(2000)>
<시월애(2000)>
 <레이크 하우스(2006)>
<레이크 하우스(2006)>

반면 건축가 아버지에 대한 상처를 안고 사는 성현(이정재)과 알렉스의 이야기는 거의 변화가 없다. 이러한 은주와 성현의 성격은 <시월애>를 심리적으로 미성숙한 두 사람의 성장기로 읽을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준다. 반면 <레이크 하우스>는 편지를 통해 사랑을 싹틔운다는 설정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케이트(산드라 블록)와 알렉스(키아누 리브스)의 만남을 주선하고 키스 장면까지 삽입했다. 더 즉물적이고 현실적인 성인들의 로맨스를 지향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이런 비교는 원작과 비교할 때만 설득력을 갖는다. 판타지 멜로 <레이크 하우스>는 결과적으로 대중과 평단,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썰렁한 흐름, 극도의 축축함, 절정의 우울함, 클리셰로 가득 찬 로맨틱 드라마”라는 혹평까지 감수해야 했다. 북미에서만 넉 달 동안 5천만 달러라는 평이한 수익을 올리게 한 일등공신은 감수성 풍부한 10대 후반과 20대 여성 관객들이었다. 특이하게도 로저 에버트만이 시간여행이란 독특한 설정과 산드라 블록의 성숙한 연기에 흥미를 보이며 “근원적인 로맨스다운 추진력을 갖췄다”고 응원한 정도다. 한국에서의 상황도 다르진 않았다. <시월애>는 2000년 개봉 당시 역시나 비슷한 소재인 <동감>에 밀려 미지근한 반응에 만족해야 했다. 지극히 우울했지만 몽환적인 화면과 특유의 섬세한 분위기를 자랑했던 <시월애>. 그에 비해 <레이크 하우스>는 심심하고 평이한 할리우드 멜로 혹은 진중한 판타스틱 러브스토리로 받아들여졌다. 원작과의 비교를 떠나 <레이크 하우스>는 <이터널 선샤인>과 같이 분명한 장점이었던 판타지를 좀 더 말랑하게 풀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오컬트 호러 <미러>의 경우

<거울 속으로>의 컨셉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거울 속의 내가 현실의 나를 죽인다. 설명 할수록 난해하지만 다시 봐도 <거울 속으로>의 오프닝은 탁월하다. 그건 <미러> 또한 마찬가지다. 이 강렬한 시각적 충격은 공포영화 팬이라면 누구라도 솔깃한 ‘굿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주인공이 백화점 보안을 책임 진 전직 경찰이라거나 사고로 동료를 죽인 후 신경쇠약에 시달린다는 설정은 동일하다. 그러나 <거울속으로>의 영민과 <미러>의 벤의 캐릭터는 판이하다. 백화점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현수(김명민)와 대립각을 세우는 영민은 시종일관 시니컬하다. 그러나 벤은 훨씬 더 절박하다. 마치 드라마 <24>의 잭 바우어 마냥 집으로 침입한 악령에 맞서 가족들을 지켜내기 위해 동분서주 한다. 차이는 역시나 이야기를 푸는 방식에 달려있다. <거울속으로>는 호러를 가장했던 전반부와 달리 백화점 방화 사건의 진상을 밝혀 나가면서 미스터리 물로 전환을 시도한다. 그러나 결말은 당시 유행했던 ‘사다코’를 등장시켜 어이없는 치정 복수극으로 끝맺음으로써 관객들의 허를 찔렀다.
 <거울속으로(2003)>
<거울속으로(2003)>
 <미러(2008)>
<미러(2008)>

반면 <미러>는 우직하게 오컬트 호러의 관습을 차용한다. 거울과 더불어 물이나 창과 같이 빛이 반사되는 모든 물체를 악령의 전도체로 확장시킨다. 그래서 백화점으로 한정됐던 공포의 공간은 벤의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있는 집으로까지 확장 된다. 이는 한 소녀의 정신분열증에서 튀어 나온 악령의 존재가 현실의 거울 속으로 숨어든 결과다. 요약하자면 <거울 속으로>가 악령의 존재가 누구냐를 결말까지 감추며 이를 밝혀내는 과정에 중점을 뒀다면, <미러>는 타자들로부터 ‘우리’를 지키려는 벤의 노력에 방점을 찍는다. <미러> 개봉 직전 만났던 <거울속으로> 제작자 김은영은 “주인공이 사랑하는 부인, 아이들에게 위험이 다가선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세계관이 엿보이더라”라고 감탄했다. 그러니까 전자가 이성의 영화라면, 후자는 감성의 영화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러> 역시 잔상에 남는 것은 오프닝과 클로징의 강렬한 이미지뿐이다. 자기의 목을 칼로 긋는 오프닝과 에필로그의 목숨을 잃은 주인공이 갇혀 버리는 거울 속 세상의 뒤집혀진 이미지. <미러>는 분명 독창적인 <거울속으로>의 아이디어에 가족과 오컬트란 보편성을 녹여냈다. 그렇지만 <미러>란 영화 자체는 특색 없이 익숙한 장르적 관습들을 나열하는데 그치고 있다. 게다가 하드고어 <엑스텐션>으로 데뷔했던 알렉산더 아야는 이 정도로는 심심했는지, 턱을 완전히 갈라버리는 고어한 표현도 모자라 클라이맥스에서 지하에 출몰한 악령과 벤의 육탄대결까지 삽입해 놓았다. 한마디로 욕심이 과했다고 할까. 키퍼 서덜랜드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3000만 달러에 그친 저조한 흥행 성적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로맨틱 코미디 <마이 쎄시 걸>의 경우

“마케팅 과정에서 <마이 쎄시 걸>이 미국 관객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알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마이 쎄시 걸>은 한국영화를 리메이크한 영화 중 최초로 DVD로 직행한 작품으로 남게 됐다. 기획자 또한 패착이었음을 인정했으니 두 말 하면 잔소리일 터. 홍콩과 일본을 통해 캐릭터의 독창성을 인정받은 ‘그녀’가 왜 할리우드에서는 찬밥 취급을 받았을까.

<엽기적인 그녀>의 ‘그녀’는 분명 밀레니엄에 불시착한 ‘안드로메다’급 캐릭터였다. 2000년 당시 당당하고 새로운 여성상의 출현이라는 평가와 그녀의 엽기적인 행각이 죽은 첫사랑을 잊지 못한 방황이라는 점에서 구태의연하다는 비판적 해석 또한 존재했다. 어찌됐건 <엽기적인 그녀>는 전지현의 자유분방한 매력이 두고두고 회자되며 흥행에 성공했고, 전지현을 일약 아시아의 스타로 만들어줬다. 최소한 일본과 홍콩을 포함한 아시아권에서 ‘그녀’는 통통 튀는 매력을 갖춘 4차원 순정녀로 인증 받은 것만은 분명했다.
 <엽기적인 그녀(2001)>
<엽기적인 그녀(2001)>
 <마이 쎄시 걸(2008)>
<마이 쎄시 걸(2008)>

그런데 태평양을 건너가자 기이하게도 ‘쎄시 걸’ 조단(엘리샤 커스버트)의 매력은 반감됐다. 시도 때도 없이 와인 몇 잔에 만취하고, 그 덕분에 지하철에서 찰리의 등에 업히고, 천진난만하게 따귀 때리기 게임을 해도, 조단은 ‘엽기’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건 절대 전지현에 이은 반복학습의 결과가 아니다. 그러니까 ‘엽기’와 ‘Sassy’란 어감의 차이만큼이나 그녀와 조단은 미묘하게 다르다. 조단은 ‘그녀’처럼 과격하거나 대책 없는 ‘참견쟁이’도 아니다. 오히려 동양인의 눈에는 그저 쿨하고 스타일리쉬한 여성으로 비춰질 뿐이다. 그런 ‘뉴욕커’ 조단이 집안의 반대로 찰리와 헤어지다는 설정도 원작과 달리 어색하다. 얄미운 듯 귀여운 차태현의 건우와 달리 제시 브래드퍼드의 찰리는 대책 없는 ‘범생이’다. <엽기적인 그녀>가 유발하는 웃음의 많은 부분이 건우의 재치있는 나레이션임을 상기해 보라. 딱 그만큼 <마이 세씨 걸>은 심심하다.

더욱이 원작에서 공수한 에피소드들로 빼곡히 채운 내러티브는 이상하게도 헐거워 보인다. 전, 후반과 연장으로 나눈 <엽기적인 그녀>는 무규칙 이종 내러티브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의 개성과 함께 용서됐다. 그러나 좀 더 규격화된 내러티브를 요구하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이러한 에피소드의 나열은 오히려 단점으로 작용됐다. 엘리샤 커스버트가 반했다는 캐릭터인 ‘그녀’는 결국 동, 서양의 간극을 메우지 못한 채 나락으로 추락해 버렸다. <마이 쎄시 걸>은 할리우드의 강력한 보편성마저도 강한 지역성을 지닌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원해내지 못한 명백한 실패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심리 스릴러? 호러? <안나와 알렉스:두 자매 이야기>의 경우

영화 웹진 ‘E! Online’의 루크 Y. 톰슨은 이렇게 평했다. “평범한 한국 호러영화를 리메이크 한 미국영화로써는 평균 이상이다.” 그의 눈에는 <장화, 홍련>이 평범한 아시안 호러 중 한 편일지 모르지만, 미안하게도 <안나와 알렉스 : 두 자매 이야기>의 평도 그리 후한 편은 아니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재미도 없고 독창성도 없는 콜렉션”이란 최악의 혹평부터 “가드 형제가 기울인 노력은 소름끼쳤던 원작에 절대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밋밋하고 뻔한 정도다”라며 원작과 비교한 평까지 다양하다. <두 자매 이야기>는 3월 마지막 주까지 북미 흥행 3,000만 달러를 넘어서지 못했다.

물론 단순 비교는 곤란해 보인다. 광고 출신 가드 형제는 <미러> 만큼이나 확고하게 원작과 다른 이야기를 선보인다. 초현실적인 호러의 분위기가 강했던 원작과 달리 리메이크 버전은 심리 스릴러임을 분명히 한다. 두세 번 등장하는 귀신은 그저 지루함을 경계하는 쇼크 효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안나가 남자친구와 해변에 누워 키스를 나누는 영화의 오프닝처럼 틴에이저 호러물에 가까워 보인다. 아담한 호수가 아닌 탁 트인 수평선을, 고풍스러운 저택보다 좀 더 일상적인 2층집을 전시하는 식이다. 특히나 왠지 답답해 보이는 의상으로 심리적 압박을 표현했던 원작과 달리 시원시원한 민소매 의상을 입은 이 세 모녀는 분명 할리우드 슬래셔 영화의 단골 주인공들처럼 보인다.
 <장화,홍련(2003)>
<장화,홍련(2003)>
 <안나와 알렉스:두 자매 이야기(2009)>
<안나와 알렉스:두 자매 이야기(2009)>

한 편으로 <두 자매 이야기>는 ‘왕따’ 문제를 배제하고 본 다면, <캐리>처럼 위협적인 엄마의 권위에 짓눌린 10대 소녀의 반항에 초점을 맞췄다고도 볼 수도 있다. 그 동기가 섹슈얼한 관련된 터부에서 비롯됐다면, <장화, 홍련> 수미의 바통을 이어받은 안나의 심리적인 동인도 아귀가 척척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의아하다. 호러영화 <장화, 홍련>은 이미 수미의 신경증을 처연하게 그려낸 바 있지 않나. 염정아의 탁월한 연기에 힘입어 은주의 날카로운 웃음 또한 <장화, 홍련>에서 쇼크를 위한 음향효과보다 더 무서운 소리로 기억된다. 그런데도 이 리메이크가 과연 이 <장화, 홍련>의 심리 묘사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두 자매 이야기>는 팝콘을 들고 비명을 지를 준비를 한 대중들을 철저하게 배려한 영화다. 주인공, 악당, 희생자 세 가지 역할을 모두 담당했던 수미의 복잡한 감정들은 모두 제거해 버렸다. 무엇보다 수미가 아버지에게 품었던 미묘한 감정 또한 깔끔히 거세됐다. <두 자매 이야기>는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든 뒤, 누가 그를 죽였느냐 하는 논리적 귀결을 이끌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영화다. 그러니 기존의 관습적인 호러영화를 기대한다면 대략 낭패다.

성실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게으르지도 않다. 야심이 없는 만큼 심리 스릴러로서 제 몫을 다 할 뿐이다. 누구는 그걸 매끄러움으로 받아들일 것이고, 누구는 그걸 독창적이지 못하다고 평할 것이다. 그러니 부디 한국관객들이여, <장화, 홍련>을 예상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를 일이다. ‘청담동 호러’라는 신조어(?)를 낳았던 화려한 미술도 없고, 이병우의 가녀린 선율도 없다. 무엇보다 수미, 아니 안나의 내면 깊숙한 감정을 장르의 외피를 빌려 전시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니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라. 원작과는 지향점이 다를 뿐이다. <두 자매 이야기>의 지상과제는 90분이란 러닝타임 동안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군더더기 없는 스릴러를 만드는 것뿐이었을 테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발짝 물러나서 안나의 ‘심리’가 아니라 그가 벌이는 ‘행위’의 전, 후를 ‘감상’하기만 하면 된다. 이거, 생각보다 참 쉽다.

<미러>를 제외하고 리메이크작 세 편에 모두 참여한 버티고 엔터테인먼트의 로이 리는 최근 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주최한 ‘한국 콘텐츠의 가능성과 미국시장 진출 전략’ 워크숍에 참석해, “일본이나 홍콩에 비해 한국영화는 상업적 가치가 높다”며 “한국적인 특성을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올드보이>나 <추격자>는 미국에서 절대 만들어 질 수 없는 영화라고 예를 들었다. 이 얘기에 울어야 되나, 웃어야 되나. 미국에서 절대 만들어 질 수 없는 영화들이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우리는 또 목도해야 할 테니. <올드보이>는 스필버그가, <추격자>는 고어 버번스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해도 말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리메이크는 한 마디로 강 건너 불구경일 뿐이다. 할리우드는 보편성이란 전가의 보도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우리는 장르에 맞게, 지향점에 맞게만 평가해 주면 그만이다. 스콜세지도 했으니, 스필버그나 버번스키도 믿어줄 밖에.

2009년 4월 10일 금요일 | 글_하성태(무비스트)

12 )
ldk209
장화홍련은 그나마 리메이크가 잘 된 편이라고 하든데...   
2009-04-11 14:03
mvgirl
헐리우드로 간 한국영화는 그닥 성공적이라는 느낌은 아니네요   
2009-04-11 13:27
ooyyrr1004
리메이크작이 잘 되면 더 좋지만 원작이 잘 되고 원작 마니 팔리는게 더 좋은거 아닌가요 ㅋㅋ   
2009-04-10 21:44
kwyok11
할리우드 리메이크작 많아지면 좋은 거겠죠~~??   
2009-04-1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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