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남자 얘기만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래서 이번엔 여주인공 내세워서 영화 찍지 않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시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남편 찾아 월남에 간 여인 순이(수애)가 주인공인 〈님은 먼곳에〉를 찍을 때 사연이다. 빨리 찍는 것으로 유명한 이준익 감독답게 전작 〈즐거운 인생〉이후 겨우 1년만이다.
길게 살펴보면 기록이 더 대단하다. 스매시 히트작이었던 〈왕의 남자〉 이후 매년 한 편씩 영화관에 걸고 있다. 비판 받았던 대로 죄다 남자영화. 그래서 올해는 〈님은 먼곳에〉를 만들었다. 매년 영화를 내는 것도, 영화마다 합리적인 제작비를 쓰는 것도, (말 그대로 〈왕의 남자〉같은 의외의 성공이 있긴 했지만) 내내 나쁘지 않은 성적을 올리는 것도 대단하다. 괴력이다.
위대한 꾸준함, 토끼를 신경 쓰지 않는 거북이
강렬한 이미지에 극단적인 이야기 구조를 화려한 테크닉으로 영상에 옮기는 박찬욱 감독이나, 도발적인 소재를 정교하게 영화화하는 봉준호 감독처럼 엄청난 존재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강제규 감독이나 강우석 감독처럼 대형 흥행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수수하지만 꾸준하게 (데뷔작 〈키드캅〉은 논외로 치더라도 2000년 이후) 〈황산벌〉〈왕의 남자〉〈라디오 스타〉〈즐거운 인생〉〈님은 먼곳에〉를 차례로 찍었고, 그 중 후반 네 편은 매년 내놓았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많은 제작비를 투입하지 않았음에도 나쁘지 않은 흥행을 거두며 새로운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관객과 평단 양 쪽에서 ‘나쁘지 않은’ 평가를 거두는 놀라운 솜씨를 지녔다.
연령과 취향에서 관객층이 확 갈리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나, 호불호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강우석 감독의 영화 사이에서 ‘나쁘지’ 않은 평가와 흥행을 거둔다는 점이 이준익 감독의 미덕이다.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많은 스텝이 함께 영화를 만들고 그들의 호구지책 이상은 책임을 져야 하는 의무가 감독과 제작자에게 있다고 할 때, 이준익 감독의 미덕은 더욱 돋보인다. 자신의 말대로 미술을 전공했고 ‘그림’에는 감각이 있는 편인데도 제작을 오래한 노련함은 관객과 흥행과 평단과 제작비 사이의 균형을 놓치지 않는다. 미국 B급 영화의 대부 로저 코먼이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 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 푼도 잃지 않았는가〉에서 자랑한 것과 같은 위대한 꾸준함이나, 강제규 사단이 노렸던 (〈연애술사〉 〈튜브〉 〈최강로맨스〉 같이 원했던 것만큼 큰 성과는 보여주지 못해 아쉬운) ‘중간 영화’의 이상적 형태를 지금 한국 영화계는 이준익 감독에게서 찾을 수 있다.
삼부작 작가, 포장마차의 조지 루카스
화려한 작가와 요란한 흥행가 사이에서 모나지 않게 영화를 찍은 이준익 감독은 꾸준한 필모그래피 속에 영리하게 자기 자리를 잡았다. 지역감정과 사투리를 사극에 적용한다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찍은 영화 〈황산벌〉과 도발적인 연극을 원작으로 한 〈왕의 남자〉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후, 자신에게 주어진 (〈죠스〉 성공 이후 서른살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주어지고 〈터미네이터〉〈에이리언2〉 성공 이후 서른셋 제임스 카메론에게 주어진 권한과 같은 종류의) 재량권을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이나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천국의 문〉처럼 상업적으로 실패하기 쉬운) 개인적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일에 쏟아 부었지만, 여전히 절묘했다. 당시 46세였던 남자가 젊은 시절 즐겼을 법한 노래를 가지고 한 물 간 록가수 이야기를 다룬 〈라디오 스타〉와, 역시 비슷한 또래 아저씨들이 젊은 시절 꿈을 다시 꾸며 밴드를 이루는 〈즐거운 인생〉 모두 그 나이대 관객을 뛰어넘는 흡인력을 갖추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했던 그 시절 가수 김추자의 노래를 지금 젊은이들이 모른다는 게 아쉬워 기획했다는 〈님은 먼곳에〉로 이준익 감독은 70년대 가요 3부작을 완성했다.
충무로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만날 것 같은 감독에게 3부작이라니. 다르지 않다. 조지 루카스의 (프리퀄이건 오리지널이건) 〈스타워즈〉 3부작이나,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3부작이나, J. R. R. 톨킨의 (혹은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이나, 또는 세르지오 레오네 ‘달러’ 3부작까지 모두 같은 3부작이다. 묘하게도 남자 이야기 두 편에 이어 여주인공으로 마무리했다는 점에서 박찬욱 복수 3부작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마초 세계의 달인, 마주치다
여주인공을 내세워 신작을 기획할 정도로 의식했단 이야기는, 그만큼 이준익 감독의 영화가 남성적 시선이 강하다는 반증일 터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신작을 내놓는 곽경택 감독 또한 비슷한 땅을 밟고 있다. 다만 마초주의에 대한 혐의를 이준익 감독은 여주인공을 앞세운 신작으로 돌파했다면, 곽경택 감독은 장르물에 집중하며 피해갔다.
유학에서 돌아와 〈억수탕〉으로 장편 데뷔를 하고 심령의학물 〈닥터 K〉가 흥행 참패한 후에 픽션이 아닌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택한 〈친구〉가 스매시히트를 거둔다. 이후 곽경택 감독은 “자신에게는 픽션을 꾸밀 능력이 없으므로 철저하게 조사하여 사실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밖에 없다”며 사실주의 성향이 강한 드라마 〈챔피언〉과 〈똥개〉를 내놓았다.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기획에 비해 아쉬운 수준. 부산 사나이 곽경택에 대한 마초주의 비판은 사실적인 터치의 낭만적 갱스터 〈친구〉 때부터 있었지만, 흥행과 비평 모두 그보다 훨씬 힘이 떨어진 〈챔피언〉〈똥개〉에 이르러서는 훨씬 커진다. 여기서 곽경택 감독이 택한 길은 (자신이 했던 인터뷰와는 다르게) 작가가 아닌 장인이 되는 것. 대형 장르영화 〈태풍〉으로 장르영화를 잘 만드는 방향을 택했다. 여전히 결과는 (곽경택 + 장동건 + 이정재 조합에 엄청난 제작비 + 제작사의 올인 홍보라는 초강수에도 불구하고) 기대에 못 미친 흥행을 가져왔다. 그리고 나서 세번째 작품이다. 요란한 홍보없이 개봉한 〈사랑〉은 처절하리만치 장르 공식에 충실한 작품이었고 나쁘지 않은 흥행을 했다. 과장 심한 홍보의 역풍이 없다면 안정적인 장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장인이라는 점을 증명한 결과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장르 영화를 만든지 세번째 리스트에서 제작 상황에 맞추어 결과를 얻어내는 철저한 고용 연출로 신작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완성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노선을 정한 지 세번째 작품을 내놓은 두 감독이 만났다.
이준익 감독이 강우석, 김기덕과 같은 마초 라인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곽경택 감독의 프로페셔널 장르 감독 도전이 성공할지, 올 여름 영화 관람의 색다른 포인트다. 성공한다면 우린 또 다른 류승완의 〈피도 눈물도 없이〉나 또 다른 스파이크 리의 〈인사이드 맨〉을 보게 될런지도 모른다.
2008년 8월 4일 월요일 | 글_유지이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