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좋아하는 영화 감독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외국 감독 중에서는 누구, 한국 감독 중에는 누구 누구... 영화 감독과 개인적인 일면식이 있는 것도 아닌 바에야 어느 영화 감독을 특별히 좋아한다는 건 곧 그 감독이 만든 영화들이 좋았고, 앞으로 그가 만들 영화들에 대해 상당한 기대를 갖게 된다는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 영화 속에 담긴 내용이나 메시지가 마음에 들기 이전에 기본적인 작품의 완성도를 중요시 하기 때문에 특히 한국 감독의 경우 관객으로서 가질 수 밖에 없는 신뢰도를 매우 중요한 항목으로 내세울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작품의 완성도나 신뢰도라는 개념 자체가 몹시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영역이지만 말입니다.
솔직한 말씀을 드리자면 김지운 감독은 제가 '좋아하는 한국 영화 감독'으로 몇 손가락 안에 꼽아주는 그 몇 명은 아닙니다. 어떤 작품은 재미있었지만 어딘가 미진했었고 또 어떤 작품은 특별히 싫지도 않으면서 그리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 대체로 그런 식이었습니다. 물론 김지운 감독은 저의 호불호에 상관없이 한 때 주목받는 젊은 영화 감독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이제는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영화 감독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한국 영화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는 1996년 이후 많은 신인 감독들이 그 수혜 속에서 등장하고 이내 사라졌지만(그리고 더 많은 중견 감독들이 설 자리를 잃어버렸죠) 김지운 감독은 그들 가운데에서 몇 안되는 생존자인 동시에 현재까지 매우 성공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감독이라 하겠습니다.
아직 앞 날이 창창한 감독을 놓고 초기작이니 하는 말을 쓰기에는 뭐하지만, 김지운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시기적으로나 작품의 경향에 있어서나 나름대로 초기작으로 묶을 수 있는 작품들이 데뷔작 <조용한 가족>(1998)과 두번째 장편 <반칙왕>(1999)입니다. 장편 데뷔작을 내놓기까지 김지운 감독의 경력은 영화와는 좀 거리가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 흔한 단편 영화 하나 만든 것이 없고 다른 감독의 연출부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동을 하다가 97년 씨네21 시나리오 공모에 <조용한 가족>이 당선되었고 이 작품을 본인이 직접 연출하기로 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 감독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죠. 영화를 다른 누군가에게서 배우는 과정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 영화를 만드는 이로서 김지운 감독에게는 장점이자 단점이 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연극 무대에서의 경력이 영화를 만드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준 부분이 있다면 데뷔작에서부터 최민식과 송강호라는 걸출한 배우들을 캐스팅할 수 있었던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캐스팅은 투자를 받는 데에도 용이할 뿐만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와 관객 만족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 변수이지 않습니까. <조용한 가족>이 김지운 감독을 충무로에 안착시켜준 처녀작이었다면 <반칙왕>은 김지운 감독과 송강호라는 배우 모두에게 확실한 디딤돌이 되어준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설정과 줄거리의 영화들이었지만 우리나라 관객들이 요구하는 안정적인 기술적 완성도를 보여주면서 그 위에 확실한 코미디와 드라마를 펼쳐주시니 마다할 이유가 없는 작품들이 된 것이죠. 김지운 감독의 영화는 작가로서의 독창성 보다는 어디서 본 듯한 내용을 자기 방식으로 변주하는 데에 능한 감독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변주만 좀 하다가 작품 전체를 제대로 추스리지 못한다면 큰 문제이겠지만 김지운 감독은 자신이 작품 전체를 통제하고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내는 데에도 능하다는 사실을 두 작품을 통해 입증했습니다.
<커밍 아웃>(2000)은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리>, 장 진 감독의 <극단적 하루>와 함께 디지털 단편으로 만들어져 온라인으로 공개되었던 40 여 분 분량의 단편입니다. 장 진 감독의 <극단적 하루>는 2001년작 <킬러들의 수다>의 모티브가 되었고,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리>는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8)로 다시 만들어져 개봉을 앞두고 있죠. 김지운 감독의 <커밍 아웃>은 흡혈귀 소재의 영화인데 대단한 서스펜스를 일으키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만 김지운 감독이 진작부터 공포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진가신,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과 함께 했던 옴니버스 영화 <쓰리>(2002)에서 좀 더 본격적인 서스펜스를 실험하게 되는데요, 이 두 작품 이후에 만든 영화가 바로 <장화, 홍련>(2003)이었습니다. 김지운 감독이 호러 영화를? 그러나 <쓰리>가 먼저 있었기에 다들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김지운 전성시대를 열어준 두 편의 영화입니다. 줄거리와 메시지에서 감동을 주기 보다는 스타일 면에서 다른 한국영화들에서 볼 수 없었던 시각적 쾌감을 선사해주는 작품들이죠. <조용한 가족>과 <반칙왕>에 비하면 내러티브 보다는 공간 연출에 주력하고 있으며 이런 경향이 이른바 뮤직비디오 세대라 할 수 있는 새로운 관객층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요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장화, 홍련>(2003)은 전형적인 호러물을 기대했던 관객들에게는 다소 미흡한 감이 있었습니다만 스타일 면에서는 그야말로 일취월장을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영화의 내용도 수미(임수정)이 어찌어찌했던 것이다, 라는 것을 미리 알고 보면 오히려 잘 정리가 됩니다만 사전 지식 없이 영화를 보게 되면 다소 어리둥절한 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로 이런 부분이 김지운 감독의 약점으로 지적될 수 있을 만한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달콤한 인생>(2005) 은 장르 영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액션 느와르물이었죠. 보스의 애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킬러라는, 역시나 닳고 닳은 설정의 이야기였습니다만 잘 짜여진 내러티브와 밀도 높은 비주얼 등 기술적인 완성도에 있어 완전히 물 오른 연출 감각을 선보인 작품입니다. 전반적인 작품 수준에 있어서는 <반칙왕>(1999)과 함께 현재까지 김지운 감독이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른 감독들은 실력이 있어도 작가로서의 사명감이나 이제까지 구축해온 작품 경향의 일관성 때문에 좀처럼 잘 하지 않으려는 지극히 대중적인 장르에서 이처럼 분방한 활약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이 김지운 감독의 성공 비결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은 호러나 액션 느와르와 같이 대중적인 장르 영화를 김지운 감독 만큼 솜씨있게 만들어줄 사람들을 더 많이 필요한 것이 지금의 한국 영화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현재 상영 중인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입니다. 김지운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한재림, 임필성 감독과 함께 한 SF 옴니버스 <인류멸망보고서>(2006)가 더 있습니다만 영화가 중간에 엎어졌는지 소식이 묘연하군요. 2009년 개봉 예정으로 표시해놓고 있는 곳도 있으니 좀 더 기다려봐야 할 듯 합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저도 직접 봤습니다만 <달콤한 인생>(2005)에서 장르를 떡 주무르듯 하던 연출력이 다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빈 구석이 많은 작품입니다. 내러티브 보다는 통쾌한 액션을 즐기기 위한 오락 영화라 치더라도 관객으로서는 여전히 아쉬움이 많이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 정우성의 간지 넘치는 수퍼 액션에 감동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나름 만족할 수 있는 관람이긴 했습니다만 영화 전반에 대해서는 그리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국내 흥행에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니까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겠네요.
170억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인데다가 해외 로케이션까지 해야 했던 상황 등을 고려했을 때 <달콤한 인생>에서 보여주었던 능수능란한 솜씨를 온전히 발휘하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세트 미술이나 배우들의 연기, 그외 통제하기가 비교적 쉬운 장면에서의 촬영에 있어서는 우리나라 영화도 꽤 높은 수준에 올라와 있지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시도한 동적인 액션 장면들과 특히 넓은 공간을 활용하는 씨퀀스에서는 기술적으로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는 생각도 갖게 되었고요.(이명세 감독과 류승완 감독이 이 부분에서는 발군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차라리 중국 쪽과 합작 형태로 진행했으면 그런 부분에서 노하우도 배우고 일거양득이 될 수 있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한 기초 작업이랄 수 있는 각본 자체가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못했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작품이란 생각도 듭니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들 가운데 <반칙왕>은 장르의 매력에 앞서 이야기 자체의 힘이 훌륭했던 작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필름2.0에 실린 김지운 감독의 인터뷰는 "이제까지 장르를 먼저 생각하고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앞으로는 이야기를 먼저 생각하고 그에 맞는 장르를 찾을까 한다. 장르 훈련을 많이 했고 심리적인 이야기도 했기 때문에 이제 영화 청년에서 영화 성인으로 넘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한다. 그래서 <놈놈놈>을 하지 않았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더군요. 영화 감독으로서 훌륭한 성장기를 보낸 김지운 감독이 앞으로 보여줄 작품들에 더 큰 기대를 갖게 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2008년 8월 11일 월요일 | 글_신어지(영화진흥공화국 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