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단어의 힘, 어지간하면 그대로 간다
짧은 단어로 이루어진 영화 제목은 원어를 그대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번역 과정에서 제목이 가진 힘이 달아나기 때문인지, 두 단어 내외로 이루어진 제목은 발음을 그대로 옮겨쓴다. 얼마전 재개봉한 2008년 최고의 화제작 〈다크나이트〉같은 경우나 한국에서는 그다지 힘을 못 쓰는 저스틴 팀버레이크로 떡밥을 뿌린 영화 〈알파독〉같은 경우가 그 경우다. 직역하면 〈흑기사〉나 〈두목 개〉같은 제목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어지간히 용감한 마케팅 담당자가 아니고서는 선택하기 어려운 제목이다. 직역한 〈두목 개〉같은 경우 제목이 가진 원래 뜻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기는 해도 원제가 은유하는 분위기를 희화화하기 쉽다.
뭔가 있어보이는 〈다크나이트〉가 〈흑기사〉로 개봉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원작 격인 프랭크 밀러의 만화 〈The Dark Knight Returns〉를 국내 언론에서 소개할 때 〈흑기사, 돌아오다〉정도로 번역하는 경우는 꽤 있었지만 결국 2008년에 출간된 정식 번역본은 〈배트맨: 다크 나이트 리턴즈〉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영단어 'black'과 'dark'를 모두 '흑'으로 번역하는 탓에 백년전쟁의 영웅 '흑태자The Black Prince'나 아더 왕 전설의 '흑기사The Black Knight'와 구분이 안되는 이유도 있을 것이고, 이미 비슷한 한국어 제목을 달고 나왔던 마틴 로렌스 주연의 코미디 영화 〈흑기사 중세로 가다〉와 엮여 〈다크나이트〉 특유의 무게감이 옅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결과이기도 하리라.
원제가 담고 있는 은유적 매력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옮긴 사례는 한 두 단어로 이루어진 영화라면 셀 수 없이 많다. 이젠 현대 미국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이 된 클린 트 이스트우드의 신작 두 편이 모두 그런 경우로 제목은 각각 〈체인질링〉과 〈그랜 토리노〉로 개봉했고, 연기파 배우를 대거 포진한 의미심장한 제목의 수도원 스릴러는 〈다우트〉로 개봉했다. 연기파 명성에 대한 윌 스미스의 욕심이 드러나는 최신작 제목은 〈세븐 파운즈〉고, 십년 만에 〈타이타닉〉 커플이 다시 만난 점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은 샘 멘데스의 신작 제목은 〈레볼루셔너리 로드〉다. 개인기 충만한 코미디 배우 둘을 기용한 미셸 공드리의 기상천외 패러디 코미디 영화 역시 발음 그대로 〈비카인드 리와인드〉라는 제목을 달고 영화관에 걸렸다.
짧아야 하는 제목의 힘, 어지간하면 줄인다
문제는 짧은 단어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다. 한 두 단어의 영어야 멋있게 들리지만, 세 단어 이상을 쓰는 영어 제목을 발음 그대로 옮겼다가는 (두 단어 이하 영어 단어를 그대로 옮겼을 때는 잘 나타나지 않는) 나태한 제목 붙이기 논란에 휩쓸리기 일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디 앨런의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같은 용감한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나, 곧 '한심한 번역'이라고 두들겨 맞는다. 그렇다면 가장 무난한 선택은? 두 단어 정도로 제목을 줄여버리는 것이다. 충격이 강한 단어만 모아서 짧은 제목을 만드는 것.
전임 제임스 본드 피어스 브로스난 시절의 본드 무비가 한국에 들어올 때 흔히 그랬다. 아예 국제용 제목을 따로 쓴 〈007 언리미티드〉같은 경우나 두 단어로 이루어진 〈007 골든아이〉같은 경우도 있었지만, 은유가 담긴 유희로 만들어 놓은 원제는 곧잘 〈007 네버 다이 Tomorrow Never Dies〉나 〈007 어나더데이 Die Another Day〉같은 제목으로 줄어버린다.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의 절묘하게 어울리는 커플이 돋보이는 기발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도 마찬가지. 이런 축약형 제목은 영문 제목의 느낌은 살아있지만 의미가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점에서 발음을 그대로 옮기는 경우보다 더 좋지 않다. 없는 일은 만들어서라도 특종 독점 기사를 '예보'하는 가상의 신문 '내일 Tommorow'을 중심으로 광기어린 미디어 권력을 악당으로 삼은 본드 무비는 〈007 네버 다이〉가 되면서 요구르트 상표의 일종이 되어버렸고, 전통을 어기고 제임스 본드가 붙잡혀 고문 당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며 영화에서 사용하는 핵심 대사를 가져온 본드무비의 제목은 〈007 어나더데이〉가 되며 다른 날에 임무를 하는 비밀요원이 되어버렸다. 알렉산도 포프의 문구에 영감을 받았다는 제목이 〈이터널 선샤인〉에서 빛을 발할 수 없는 것 또한 당연하다.
번역하거나 새로 쓰거나
이런 경향때문에 1998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주연으로 화제가 됐던 2차 세계대전 배경 전쟁 영화는 〈프라이빗 라이언〉이라는 제목정도로 개봉할 것이라 예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 개봉 제목은 모두가 알고있는 것처럼 직역인 〈라이언 일병 구하기〉. 직역도 곧잘 어울리는 제목이기도 하여, 영화 개봉 후에는 제목의 '일병 Private'이 사실 '이병'이어야 옳다는 정도의 논란은 있었지만 무난한 제목으로 꼽혔다. 제목이 그대로 옮겨도 무게를 가지는 경우나, 긴 영문 제목인 경우에는 번역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또 다른 스필버그 작품 중에는 (지금은 대스타가 된 크리스챤 베일이 얼굴을 알린)〈태양의 제국 Empire of the Sun〉이나 〈잃어버린 세계 The Lost World: Jurassic Park〉가 그런 경우다. 마찬가지로 제니퍼 애니스톤의 신작 코미디 〈말리와 나 Marley and Me〉, 역시 제니퍼 애니스톤을 비롯한 제니퍼 코넬리, 드류 배리모어, 스칼렛 요한슨 스타 군단이 포진한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He's Just Not That into You〉같은 영화가 직역으로 같은 느낌을 주는 경우다.
난관은 번역을 해야하나 원제와 같은 느낌을 주기 힘든 경우에 발생한다.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괴물같은 완성도로 화제를 모은 두 작품이 그런 경우. 한 작품은 〈노인을 위한 나라를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처럼 직역을 택했고 다른 하나는 〈데어 윌 비 블러드 There will be Blood〉와 같이 발음을 그대로 적는 쪽을 택했다. 상징적인 힘이 강한 난해한 원제 앞에 고민한 번역가의 고뇌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두 선택 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아예 욕을 먹거나 칭찬을 듣거나, 의역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다. 의역 후 욕을 먹는 경우는 보통 로맨틱코미디 시장을 노리고 당차게 의역한 제목이 〈퀸카로 살아남는 법 Mean Girls〉나 〈사랑도 번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처럼 영화 주제를 잘 표현한 제목을 알아 볼 수 없게 만드는 경우다. 직역으로 살리기 힘든 원작의 느낌을 나쁘지 않게 살린 〈날 미치게 하는 남자 Fever Pitch〉나 원작의 말장난을 효과적으로 살리진 못했지만 제법 맛이 나는 〈사랑에 빠지는 아주 특별한 법칙 Laws of Attraction〉, 원제랑은 별 관련이 없지만 영화 분위기와 그리 동떨어지지는 않는 〈폭풍속으로 Point Break〉, 원제만큼 미니멀하지는 않지만 영화 분위기와는 잘 맞는 〈영혼은 그대곁에 Always〉가 무난한 경우. 원작 제목보다 강렬한 기억을 남긴 〈애수 Waterloo Bridge〉〈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사랑과 영혼 Ghost〉정도가 되면 전설이 된다.
센스있는 제목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사이에〈레볼루셔너리 로드>나 〈다우트〉같은 제목이 끼어있는 개봉작 목록은 못내 아쉽다. 번역가의 고심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대안이 없었을까. 나쁘지 않은 제목 〈레이첼, 결혼하다〉나 〈킬러들의 도시〉〈뉴욕은 언제나 사랑 중〉같은 영화가 있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2009년 3월 11일 수요일 | 글_유지이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