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설 특수는 없었다
올해 영화계 설 특수는 없었다. 할리우드가 여름과 크리스마스를 가장 큰 시장으로 본다면, 우리는 여기에 설과 추석이라는 명절도 포함시켰다. 나름 연휴랍시고 가족들이 모이는데 정작 할 일이 별로 없어 극장으로 향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물론 음식 준비하는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게다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의 경쟁도 덜해 나름의 부담도 덜 수 있다. 할리우드 가족 영화들이 있긴 하지만, 한국영화끼리 진검 승부가 펼쳐지는 기간이니까. 대대로 설이나 추석 대목에 개봉된 영화들은 괄목할만한 성적을 거뒀다. 흥행뿐 아니라 가족영화나 조폭 코미디와 같은 하나의 유행도 만들어냈다. 하지만 올해 설은 ‘특수’, ‘대목’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게 조용히 지나갔다.
작년 설과 비슷한 부분도 있다. 2008년 12월 3일에 개봉해 2009년 초까지 흥행을 이어간 <과속스캔들>의 여파가 남아있었고, <쌍화점> <예스맨> <벼랑 위의 포뇨> 등도 설 연휴까지 이어졌다. 설에 맞춰 개봉한 <유감스러운 도시>와 <적벽대전 2: 최후의 결전> <작전명 발키리> <체인질링> 등의 외화도 가세했다. 그나마 <워낭소리>가 1월부터 시작해 꾸준히 인기를 얻었지만, 설 특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전형적으로 설 특수를 노린 작품은 <유감스러운 도시>였는데, 매우 유감스러운 흥행을 기록하면서 명절 특수와 조폭 코미디의 확실한 결별을 보여줬다.
이러한 이유로 올해 설엔 조폭 코미디를 찾아볼 수 없고, 가족 영화만 남았다. <전우치>의 상승세가 설까지 이어졌고, <하모니>가 관객을 울렸으며, <주유소 습격사건 2>와 <식객: 김치전쟁>이 전편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했다. 외화로는 <퍼시 잭슨과 번개 도둑>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등 역시나 가족 영화가 강세를 보였다. 각자 나름의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설 특수 때문은 아니었다. 설보다는 방학의 끝물을 잡았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판단이다.
외형적으로는 ‘토-일-월’로 이어지는 애매한 날짜에도 이유가 있다. 설 연휴지만 보통의 주말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짧은 시간 동안 고향에 내려갔다가 와야 하는 이들에게 극장 나들이는 더욱 부담스러웠으리라. 짧은 연휴는 ‘대목’에 찬물을 끼얹었다. 또 계속되는 경기 침체도 가족 단위의 극장 방문에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 명절만 지내고 빨리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부담이 설 특수를 외면하게 만들었다.
한국영화의 침체와 대작 드라마의 득세
영화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에는 영화만큼 높은 완성도를 보인 대작 드라마의 영향도 컸다. 작년 <선덕여왕>은 물론이고, 최근 <아이리스> <추노> <공부의 신> <파스타> 등의 다양한 소재의 드라마들이 영화를 대신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영화산업의 최대 적은 TV, 즉 홈 엔터테인먼트였다. 최근에는 게임과 스포츠 등의 다양한 오락거리가 더해졌지만, 여전히 영화의 최대 경쟁자는 드라마를 위시한 방송 컨텐츠들이다. 특히 큰 규모의 고품격 드라마는 재미는 물론 컨텐츠 자체의 완성도도 높아 관객의 발을 TV 앞에 묶어둘 수 있다.
올해는 스타 감독들의 개봉작이 뜸하다는 것도 영화에 대한 관심이 적은 이유다.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류승완, 최동훈, 김용화, 윤제균, 나홍진 감독 등의 작품이 작년과 재작년에 몰렸기 때문이다. 2009년에는 <박쥐> <마더> <해운대> <국가대표> <전우치> 등의 작품으로 풍성한 한 해가 됐지만, 2010년은 상황이 다르다. 그나마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과 강우석 감독의 <이끼>가 올해 개봉작에 이름을 올렸지만, 2009년에 비하면 외롭게 느껴진다.
스타 감독들은 둘째 치고, 상반기 한국영화는 개봉 자체가 적다. <행복한 울릉인> <회오리 바람> <마녀의 관> <경계도시 2> <아마존의 눈물> 등의 독립영화와 <무법자> <육혈포 강도단> <이웃집 남자> <비밀애> <폭풍전야> <베스트셀러> <집 나온 남자들> 등의 작품이 있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사랑은 너무 복잡해> <인 디 에어> <셔터 아일랜드> <그린 존> <타이탄> <아이언맨 2> <로빈 후드>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 등의 외화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전우치>와 <의형제>로 확보했던 한국영화 관객을 외화에 뺏기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인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한국영화의 질적인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있다. 설, 여름방학, 추석, 겨울방학에 맞춘 기획 영화에 의존했던 풍토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영화는 수익을 내야하기 때문에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지만, 그동안 개봉 날짜 맞추기에만 너무 급급했던 경향이 있었다. 그런 탓에 빨리 찍을 수 있는 기획 영화들이 득세했고, 완성도보다는 시즌영화에 더 관심을 가졌다. 시기마다 비슷한 장르의 영화들이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양상도 보였다. 물론 개봉 시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개봉 시기를 맞추기 위해 다른 것들을 포기하는 일은 분명 지양되어야 할 일이다.
대한민국의 문화적 위축
설 특수가 사라지고 상반기에 한국영화 개봉이 줄어든 것을 영화만의 탓으로 볼 수도 없다. 현재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문화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야 한다. 문화란 결국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향유하는 모든 것들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문화가 등장하고, 같은 장르 안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생기기도 한다. 다양한 창작 활동은 문화의 다양성은 물론 삶의 질 자체를 바꿔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었다. 하지만 체제 억압과 획일화된 사고의 강요는 문화 자체의 발전을 더디게 만든 예가 많다.
문화라는 것이 정부 정책에 100% 의존적인 것은 아니지만, 현 정부와 문화체육관광부, 영화진흥위원회의 역할이 영화 산업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특히 이번 이명박 정부는 지난 정권에 비해 문화 사업의 비중이 높지 않기 때문에 창작 활동을 활발하게 유도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정권 초기부터 이어진 이른바 코드 인사는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으며, 불안의 조짐이 보이던 영화진흥위원회의 행보는 최근 독립영화 지원사업과 전용관 운영자 선정 등은 문제가 터지면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영화 제작 환경에도 영향을 미쳤고, 개봉작의 감소로 이어졌다.
그나마 한국영화의 점유율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몇몇 작품에 의해서다. 작년 <과속스캔들>이 <7급 공무원>으로 이어졌듯, 올해는 <전우치>에서 <의형제>로 이어지면서 관객을 모으고 있다. 이런 경향은 전체적인 성장보다는 수치적인 발전만을 보여줄 뿐이다. 유행 장르도 조폭 코미디에서 스릴러로 옮겨오면서 편향적으로 흐르고 있다.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트렌드라는 명목 하에 비슷한 영화가 반복 재생산되고 있다. 여기에 3D 입체영화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 당장 적극적인 변화는 힘들겠지만, 세계적인 경향에 대응할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 상황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달 한국영화 점유율은 39%였다. <아바타>라는 괴물을 상대로 했지만, <전우치> <용서는 없다> 등의 선전으로 나쁘지 않은 수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단순히 수치로 한국영화 전체를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예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든 개봉 편수, 사라진 설 특수, 신학기의 시작과 맞물린 비수기 등으로 인해 전반적으로 조용한 흐름이다. 여기에 4월이라는 다소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공습도 문제다. 위축된 문화계 전체의 분위기와 경기 침체, 정책적인 충돌과 시기적으로 호재가 없는 한국 영화 산업의 현재가 한국영화의 약세로 이어질까 걱정되는 부분이다.
2010년 2월 25일 목요일 | 글_김도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