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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이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최근의 한국영화
2010년 7월 6일 화요일 | 허남웅 이메일


유괴와 묻지마 살인을 소재 삼은 한국영화는 이제 하나의 현상이다. 특히 올해 두드러졌는데 <용서는 없다> <무법자>, 그리고 최근 개봉한 <파괴된 사나이> 등이 일군(一群)을 형성한다. 영화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할 때 이런 종류의 작품의 등장은 신문과 뉴스의 헤드라인을 빈번히 장식하는 연쇄살인, 아동성폭행, 유아살해와 같이 갈수록 험악해지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공익의 기능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다만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항상 선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지금처럼 영화에 대한 모든 평가가 숫자로 획일화된 상황에서 공익의 기능은 오락의 측면에 밀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유괴(와 묻지마 살인) 관련 영화를 만든다고 할 때 생기는 고민의 지점은 다소 교훈적으로 흘러갈 이야기를 얼마만큼 상업적으로 포장해 더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느냐에 달려있다. 그럴 때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 중의 하나가 바로 과도한 폭력성을 그대로, 때론 더 잔인하게 전시해 주인공이 느끼는 유사 공포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럼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운다는 영화적 연출은, 때에 따라 나쁘지 않다. 문제는 모든 영화가 한통속으로 그럴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최근의 해당 소재 한국영화들은 하나 같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다. 어쩜 그렇게들 닮았는지 <용서는 없다>도, <무법자>도, <파괴된 사나이>도 사이코패스를 가해자로 설정하고 그들에게는 성격을 부여하는 것조차 시간낭비라는 듯 단순히 피해자를 상대로 한 잔인한 장면을 늘어놓기에 바쁘다.
 히치콕 <사보타주(1936)>
히치콕 <사보타주(1936)>

그럴 때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꼭 그렇게 자극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느냐고. 선정적이어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물론 영화사 초기처럼 어린이 상대의 살해와 같은 장면을 암묵적으로 금함으로써 소재의 폭을 제한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도하게 이를 드러내고 전시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불순함이 감지된다. 유아 납치를 다루면서, 묻지마 살인을 소재 삼으면서 그것이 야기할 윤리적인 문제, 더 정확히는 유사 사건을 겪은 피해자 주변인들을 포함해서, 극중 주인공의 시점에서 영화를 보게 되는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고민이 없어 보인다. 일찍이 알프레드 히치콕은 <사보타주>(1936)에서 폭탄이 터져 아이가 죽는 장면에 대해 정작 소년의 죽음 자체가 관객의 분노를 사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대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고 반성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앞서 언급한 일련의 한국영화들은 관객들을 피해자의 자리에 위치시키고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일으켜 주인공의 복수에 동참하게 만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폭력에 맞서 폭력으로 응징한다는 이런 식의 논리는 당연히, 위험하다. 분노를 잠시간 극복할 수 있는 극약처방은 될지언정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 영화가 위험한 건, 그래서다. 무방비 상태의 관객에게 이야기의 내적 논리를 무의식적으로 주입할 우려가 있다. 더군다나 2시간여의 상영시간 동안 위안을 얻으려는 관객들에게 감정적인 방식으로 동의를 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쉽기도 하다. 그래서 히치콕은 <사보타주>의 아이의 죽음 장면과 관련해 “자칫 영화적인 힘을 남용하는 것이 된다.”라는 부정적인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파괴된 사나이(2010)>
<파괴된 사나이(2010)>

그럼에도 이런 식의 설정이, 아니 오히려 최근처럼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소재의 영화가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드러난 대중의 일시적 분노에 편승하겠다는 판단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속된 말로, 흥행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뻔하고 진부한 설정의 반복이다. 흔히 클리셰라고 하는 것은 장르의 규칙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흥행에 가장 최적화된 장면의 반복이랄 수 있다. <용서는 없다>부터 <무법자>, <파괴된 사나이>까지, 이 영화들은 흔하게 예상되는 설정과 장면들의 범벅이다. 공권력을 믿지 못해 잔인하게 변모하는 우리의 주인공들, 앞서 언급했듯, 사이코패스 하나로 캐릭터 설명이 모두 이뤄지는 악역(사이코패스는 흔히 감정이 없다는 이유로 웬만해선 디테일한 캐릭터가 부여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연출자들의 게으름을 포장하는 좋은 구실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의 잔인한 수법과 살해 묘사 등등.

물론 이를 두고 시대 반영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이들 영화들은 모두 원전이 존재한다. 한국영화로는 <그놈 목소리>(2007)가 있고, 할리우드에서는 이미 <모범시민>(2009)이 등장했다. 얼마 전 개봉한 <파괴된 사나이>를 예로 들면, 8년 전 유괴된 딸이 아직 살아있다는 설정이 참신하게 다가오지만 결국엔 동어반복 수준을 넘지 못한다. 잔인해진 아버지, 무능력한 경찰, 유괴당한 딸인지 알고 정신없이 쫓아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어머니(왜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어머니는 부재하거나 무기력한 걸까?),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사이코패스, 잔인함을 강조하기 위한 메마른 섹스, 신은 없다고 조롱하는 주인공 등등. 더 나열할 수도 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파괴된 사나이>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다. 오히려 <파괴된 사나이> 제목 대신 <용서는 없다>를, <무법자>를, 할리우드의 <모범시민>을, <테이큰>(2008)을, <엣지 오브 다크니스>(2010) 등을 넣어도 대충 모양새가 맞을 정도다.
 <시(2010)>
<시(2010)>

오해를 덜기위해 밝히자면, 유사한 소재를 남겨진 자의 슬픔과 복수심이 야기한 삶의 아이러니함으로 접근해 좋은 평가를 받은 <미스틱 리버>(2003)나 연쇄살인범의 행적을 통해 인간 내면의 본성을 탐구한 <복수는 나의 것>(1979)과 같은 영화로 왜 못 만드느냐고 불평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윤리적인 고민이 더 필요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을 뿐이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2007)을 만들 당시 극중 설정과 유사한 여중생 사건이 실제로 벌어지는 바람에 잠시 영화를 엎기도 했다고 전한다. 또한 <시>(2010)는 물에 떠내려가는 여중생의 시체를 보여주며 충격적으로 시작하지만 끝내 그녀가 죽는 순간만큼은 묘사하지 않는다. 이 같은 태도에는 죽음을 드러내는 것과 드러내지 않는 것 사이의 윤리적인 고민이 존재한다. 이는 <시>가 남은 자의 이야기인 까닭과 무관하지 않다. (어느 원로 감독은 자기였다면 옷을 모두 벗은 아름다운 여체가 떠내려 오는 식으로 연출했을 거라고 말한다. 유감이다. <시>의 주제를 완전히 오독해 이창동의 연출을 비난하는 만용에 불과하다.)

<그놈 목소리>의 경우로 좀 더 설명하자면, 이 영화는 흥행 결과와 상관없이 실제 유괴 사건의 전화통화를 그대로 노출하는 바람에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어떻게든 가해자를 잡고 싶다는 감독의 의도에 앞서 피해자 가족에게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배려하지 못한 부주의를 탓한 것이었다. <파괴된 사나이> 역시 결국엔 남은 자들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비록 실제 사건을 끌어들인 것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한 사건을 겪은 이들의 고통에 대해 감독은, 제작자는 어떤 고민을 했을까. 미안하지만 영화만 놓고 보면 흥행에 대한 강박관념은 보일지언정 윤리적인 고민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단순히 시대상을 반영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극과 선정주의의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은 자들의 심정을 좀 더 헤아리는 것, 그것은 또한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유괴와 묻지마 살인을 소재 삼은 최근의 영화들은 안타깝게도 인간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좀 더 필요해 보인다.

2010년 7월 6일 화요일 | 글_허남웅(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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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oy
아무래도 요즘 한국사회가 워낙 흉흉한지라 장르영화로만 유사소재 스릴러를 바라볼 수가 없게 되네요. 윤리적인 문제, 분명 인간으로서 그 정서를 건드리기에 중요한 가치죠;   
2010-07-06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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