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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지 모르겠다. 지난 9월 개봉, 연출력의 실종, 재미의 실종, 이야기의 실종 등 실종이란 실종은 모두 끌어다 안으며 큰 실망감을 안긴 <정승필 실종사건>을. (오래 지나지 않았으니 기억을 복기하기에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안 봤다면 다행이다 싶고) 왜, 시작부터 ‘정승필’ 운운 하는지, 눈치가 빠르다면 짐작했겠지만 <걸프렌즈>는 <정승필 실종사건>을 연출한 강석범 감독의 작품이다. 때문에 <걸프렌즈>는 누군가에게는 (선입견 때문에) 보기도 전에 피하고 싶은 작품일 수 있고, 누군가에는 오히려 (기대치가 워낙 낮기에) 생각보다 괜찮은 영화가 될 수 있겠다. 확실한건 <걸프렌즈>가 스토리, 캐릭터, 연출력 등 모든 면에서 <정승필 실종사건>보다는 나은 영화라는 것. 강석범 감독으로서는 <정승필 실종사건>으로 실추된 이미지를 다소나마 만회 시켜 주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29세 회사원 송이(강혜정)는 피겨스케이팅 같은 현란한 키스솜씨를 지닌 회사 동료 진호(배수빈)와 사내 연애를 시작한다. 하지만 얼마 후, 진호가 자신 말고도 유부녀 진(한채영), 대학생 보라(허이재)를 따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배신감에 사로잡힌 송이는 그녀들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드디어 삼자대면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미울 줄만 알았던 그녀들에게 호감이 생기니 말이다. 급기야 송이는 그녀들과의 ‘진호를 사랑하는 여자들의 모임’이라는 은밀한 커뮤니티를 이어가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진호가 언제 어디서 누굴 만나는가를 속속들이 알게 된다.
<걸프렌즈>는 제31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홍 작가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일부일처제의 고정관념에 태클 거는 독특한 시도로 큰 반항을 일으켰던 <아내가 결혼했다>에 이어, <걸프렌즈>는 21세기 젊은이들의 사랑에서 일부일처제가 얼마나 낡은 제도인가를 설파한다. 한 남자를 공유하는 영화 속 세 여인들은 신기하게도 복잡한 연애 사슬에 말려들지도, 흔히 있을 법할 치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히려 남자 때문에 싸우는 일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냐는 듯, 애인의 연인 앞에서 질투를 감추고, 서로를 독려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한 남자에 대해 비슷한 취향을 가진 여자들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이처럼 영화는 21세기에 잠복된 시대정신을 유연하게 포착, 전에 없던 방식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하지만 불만인 건, 그 소통의 깊이가 얕고 가벼운 수준의 소통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즉, ‘도발적인 소재 자체의 힘’ 덕분에 일정 수준의 재미는 전달하지만, 전개에 있어 개연성을 획득하지 못한 탓에 새로운 세대의 사랑과 소통이 해프닝에 그치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하나의 결과를 도출시키는 게 아니라, 결론을 내기 위해 사건들을 억지로 조합한 듯한 ‘뒤바뀐 인과관계’ 역시 극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다. 물론 ‘상업성에 방점을 찍고 경쾌하게 달리고자 하는 영화에게 뭐 그리 소통 운운하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비슷한 기조를 지녔던 <싱글즈>나, 유사한 소재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Vicky Cristina Barcelona, 우디 알랜)가 욕망과 좌절을 고루 섞어 전시함으로써 현실감을 잃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그러한 말이 핑계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웃음에 대한 지나친 강박과 작위가 <걸프렌즈>로서는 독이 된 셈이다.
그렇다고, '칙릿'(Chick-lit) 특유의 유쾌하고 발랄한 리듬을 무리 없이 구축해 낸 이 영화의 성과를 완전히 무시할 생각은 없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괜찮은 편인데, 개성 강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 해 왔던 강혜정이 정통 로맨틱 코미디를 맞아 농익은 매력을 선보이고, 한채영이 기존보다 많이 열린, 아니 상당히 많이 망가진 모습을 서슴없이 보여주며 극의 재미에 일조한다. 조은지, 최송현, 배수빈 등 조연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제 몫을 충분히 소화 해 낸 느낌이다. 원작 소설이 스크린위에 어떻게 구현됐는지 궁금한 사람이나, 배우들의 변신을 보고 싶은 사람, 그리고 쉽고, 편한 영화 한편을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걸프렌즈>가 안기는 웃음이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남성 관객들에게는 <걸프렌즈>가 ‘쥐약’과도 같은 영화로 받아들여질 공산이 크다. 이른바 '칙릿' 영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걸프렌즈>는 지독하리만큼, 성별을 타는 영화다. 로맨틱 코미디의 대부분이 여성을 타깃으로 한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걸프렌즈>는 특히나 여성 관객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연애는 하면서도 남자에게 얽매이고 싶지 않은 20-30대 여성들의 이 발칙한 상상을 속 편하게 봐 줄 남성관객도 많지 않겠지만, 세 여자 사이에서 철딱서니 없이 휘둘리는 (배수빈이 연기한) 진호 캐릭터 역시 남성관객들로서는 반갑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2009년 12월 17일 목요일 | 글_ 정시우 기자(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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