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년전에는 외국 영화에서나 보며 부러워하던 일이 대한민국 국민의 일상생활에 포함된 것은 결코 적지 않다. 이제는 화려함과 유행의 한복판 맨해튼의 생활이 몇 달 뒤면 서울에서도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그 중에는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 섞여있기 마련.
더 이상 테러에 대해 안전하지 않은 나라가 된 것이 그 중 하나다. 십년 전이었다면 헐리웃 영화 소재로나 쓰이며 즐길 거리와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에 대한 편견을 운운하며) 씹을 거리를 제공했을 테러리즘은, 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납치 당했다 돌아온 현실의 무게 앞에 이제 무시할 수 없는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러니, 영화를 보더라도 이젠 테러리즘에 대해 궁리하며 볼 수 밖에.
공포는 눈을 어둡게 한다
싸움에서 선방을 빼앗겼어도 쫄지 않으면 승산은 있다. 아 왜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지 않는가. 호랑이한테 선방은 빼앗겼지만, 쫄지는 말란 이야기다. 공포에 떨면 상대의 힘을 실제보다 높게 보기 쉽다. 한 번 공포에 마음을 빼앗기면 돌이키기 힘든 것은 그런 이유다. 상대에 대한 '무지'란 공포를 만드는 필수조건이다.
상대를 정확히 알지 못해 '공포'가 생기고, 그렇게 생긴 '공포'때문에 다시 상대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이성 박약의 악순환을 영화만큼 잘 그리는 매체도 보기 힘들다. 애시당초 훌륭한 영화는 감정을 움직이지 않던가. 무서움의 감정을 만들고 무서움에 떠는 등장인물을 영화 중심에 두는 것은 오랫동안 영화의 주특기였다. 대부분의 공포영화가 그렇다.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을 수록 무섭다.
영화 끝까지 공포의 근원이 되는 존재를 볼 수 없는 〈이블데드〉가 그런 속성을 영리하게 이용한 경우다. 공포영화를 만들며 필요한 예산을 절약함과 동시에, 제작비 대비 월등히 높은 공포를 찾아 냈으니까. 테러가 무서운 것도 마찬가지다. 예고 없이 나타나는 것이 극대화 될 때, 공포도 극대화 된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대라고 느끼고 모습을 볼 수 없게 되면,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할 여지 따위는 없어져 버린다.
약탈과 싸움에 능통한 집단이긴 하지만, 같은 인간이었던 바이킹을 초인적으로 그리는 영화가 그런 경우다. 도대체가 인간같지 않으며 귀신같이 나타나 순식간에 살육을 저지르고 약탈을 하여 사라진다. 압도적인 조직력과 전투 경험, 위압적인 덩치와 뿔을 단 투구같은 소품을 갖추고 있는 바이킹이 짙은 안개 사이에서 나타났을 때, 과연 그렇기도 하겠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13번째 전사〉에서 초반부 괴물같이 등장하는 바이킹이 그렇다. 아랍에서 넘어온 관찰자 아메드(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보기에도 그들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모습으로 바이킹을 다루는 〈패스파인더〉 역시 영화 초반 압도적이고 위압적인 모습으로 괴물처럼 등장하는 전투집단이 바이킹이다. 두 영화 모두 안개와 어둠 사이에서 나타나는 바이킹의 얼굴을 어둠 속에 감추어 버린다. 공포는 알 수 없는 곳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얼굴이 없으면 표정을 알 수 없고, 사람이 아니라 느끼면 무섭다.
해결책은? 사람이라는 증거를 찾아내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점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상대는 동등한 위치로 떨어진다. 불사의 존재가 아니며 약점이 있을 수 밖에 없고,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야만인 왕국에서 신으로 추앙 받던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주인공이 죽거나, 연쇄 살인을 하던 〈스크림〉의 악당이 주인공에게 죽는 것 역시 사람임을 증명하고 나서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벌어진 테러를 추적하기 위해 파견된 FBI 특별팀이 〈킹덤〉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찾아내려는 것 역시 배후에 있는 ‘아부 함자’의 정체, 곧 인간 이상의 신비를 벗겨내는 것이다.
맹목적인 공포, 죽음을 불사하는 돌진
사람인 것을 알아도 상대가 죽음을 불사하면,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괴로울 수 밖에 없다. 죽음을 불사하는 상대에 대해 목숨을 아끼는 순간 이미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탁월한 킬러였던 1973년 〈재칼의 날〉의 재칼(에드워드 폭스)이 똑같은 원작을 각색한 1997년 판 〈재칼〉의 재칼(브루스 윌리스)보다 무서운 존재인 이유도 음모가 드러나는 마지막에 죽음을 피하기 위해 지하철 역으로 도망가는 엉성한 탈출을 택한 신형 재칼보다 마지막까지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사살 당한 구형 재칼의 목숨 보다 앞 선 킬러 의식 때문이다.
때로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돌격하는 맹목적인 군중의 공포는 헐리웃에서 좀비로 묘사된다. (요새 좀비물은 그렇지도 않지만) 느릿느릿하고 별다른 완력이 없더라도 무서운 존재감은 목숨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좀비 집단의 맹목적인 살의가 가장 앞 서 다가오는 순간에 최고조에 이른다. 직접적으로 좀비를 공포의 대상으로 배치한 좀비물이 아니어도 마찬가지. 소말리아에서 민병대와 전투에 휘말린 〈블랙호크다운〉이 가장 무섭게 그려낸 장면은 언제였던가? 잘 훈련된 델타포스나 레인저가 민병대와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 아니다. 제목 그대로 격추된 블랙호크 안에 가까스로 살아나 최소한의 무기 밖에 지니지 않은 조종사가 수많은 (그리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고 의지 따위는 없어 보이는) 새카만 군중에게 둘러 쌓여 공격받고 있는 때가 아니었나.
처음에는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무차별 테러를 조사하기 위해 도착했던 〈킹덤〉의 FBI 수사관들 주위로 영화가 수사극에서 공포로 전환하는 순간도 똑같다. 미국과는 다르게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FBI는 눈에 잘 띄는 외인에 불과하다. 첨단장비와 팀워크로 배후를 알아내려는 어는 순간, 테러의 목표로 자신들이 결정된 것을 알게 되고 어떤 지원도 없이 예측 불가능한 테러가 벌어지며 팀워크는 무너지고 공포에 질린다. 좀비 사이에 몰린 FBI 요원, 공포 영화가 되는 수사극.
인간의 내면을 읽는 순간
사실 테러리스트를 상대하는 가운데 가장 더러운 순간은 일부나마 이해하게 된 순간이다. 상대가 아무리 무섭고 잔혹하더라도, 적개심이 있으면 철저하게 상대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내면을 읽고 똑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안 순간, 적개심은 흐트러진다.
아무리 대단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트루라이즈〉의 테러 두목 아부 아지즈는 무고한 여자를 인질로 삼고 협박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악당이다. 그가 제시하는 대의명분은 공감율이 한없이 0%에 가까울 정도로 엉성하고 가볍다. 그러나 똑같이 무차별 학살이 가능한 배낭형 핵폭탄을 뉴욕으로 반입하는 〈피스메이커〉의 코도로프는 같은 적개심을 가지기 힘들다. 영화의 내용상, 대도시 뉴욕 시민의 수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 주인공 톰 드보(조지 클루니)와 줄리아 켈리(니콜 키드먼)가 폭발을 막길 바라지만, 이미 영화 초반부터 그의 조국과 아이들이 어떤 희생을 치뤘으며 어쩌다 그가 광기 어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고자 한 행동은 끔찍한 테러지만 〈태풍〉의 최명신(장동건)이 관객 반의 호응을 맡는 주인공인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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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첩보전이 난무하던 냉전 시절에 첨예하게 대립한 양측이 얼마나 차이가 없는 존재였는지 〈굿 섀퍼드〉처럼 잘 보여주는 영화도 드물다. 명문 예일대에서 엘리트 조직 스컬스에 들었다가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끼어들면서 CIA 조직에 참여하는 에드워드 윌슨(맷 데이먼)의 일생을 따라가는 이 영화는 아예 적과 나 모두 도덕적인 감정 이입 가치가 없는 존재로 묘사한다. 냉전 시대의 첩보 조직이란 명분과 도덕보다는 불신과 공작으로 지탱되었다는 비인간적인 구조였다는 폭로.
정교한 편집과 이야기 구성으로 석유 이권을 둘러싼 아랍에서의 더러운 사건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시리아나〉는 어떤가. 석유 매니저와 공작원, 노무자와 한 나라의 왕자 모두 자신의 신념과 행동을 가지고 있지만 석유 메이저와 정부의 복합체의 음모를 벗어나지 못한다. 양심적이고 성실했던 개인이 조직에 의해 희생 당하고, 빼앗긴 것을 참지 못해 자살 폭사도 불사하는 테러범으로 변하는 평범한 아랍인을 보고 나면, 테러에 대한 소식이 그리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범인을 잡으러 갔다가 사냥감에 가까운 이방인이 된 FBI 요원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이 진실에 접근할수록 상대는 인간에 가깝게 느껴질까. 아니면 더 이상의 희생이 있기 전에 팀원부터 구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 지속될 뿐일까. 딜레마 앞에서 FBI 요원의 선택은 문명 충돌로 번진 대테러전 시대의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
2007년 10월 30일 화요일 | 글_유지이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