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준비하는 데 깜짝 놀랐다. <수상한 고객들>로 한 인터뷰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빡세게 했다.(웃음) 저번 주는 인터뷰만 했던 것 같은데.
다른 매체 인터뷰를 살펴보니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말을 많이 했더라. 이번 영화를 통해 뭔가를 느낀 건가?
이번 영화 때문은 아니다. 매번 영화를 찍고 나면 심경의 변화를 겪으니까. 원래 고민을 즐겨하는 성격이고, 최근에 계속 혼란기를 겪고 있어서 인터뷰마다 얘기한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고민 때문에 혼란기를 겪고 있나? 죽음을 소재로 한 영화 때문에 그런 건가했다. 캐릭터에 쉽게 빠져나오지 못해서.
영화가 끝나고 극중 인물이 아닌 인간 류승범으로 돌아오는 건 힘들지 않다. 매번 다른 가면을 쓰고 영화를 찍는 배우들과는 달리 그냥 나를 갖고 연기한다. 그래서 작품에 들어가면 본연의 모습이 어떻게 하면 인물에 잘 이입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차라리 연기와 실제 삶의 분리가 잘 됐으면 좋겠다.(웃음)
이번 영화에서 보험사원 배병우라는 역할을 맡았다. 처음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생명보험에 가입한 오부장(박철민), 복순(정선경), 영탁(임주환), 소연(윤하)을 찾아다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객들에게 봉사를 한다. 병우를 연기하면서 우리 주변에서 삶의 소중함을 잃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촬영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 극중 틱장애(특별한 이유 없이 신체 일부를 빠르게 움직이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는 장애)가 있는 영탁과 소녀가장인 소연을 만나면서 잊고 지냈던 어렸을 적 모습이 기억났다. 그리고 기러기 아빠인 오부장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한 사회인으로서 가장이 지니는 무게감을 생각해 봤다. 물론 환경은 다르지만 “나는 어떻게 이곳까지 왔을까?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까?” 이런 잡념까지 들더라.(웃음) 하지만 극중 인물들을 마주하면서 행복도 느꼈고, 배움도 얻었고, 삶의 소중함도 깨닫게 됐다.
인생을 잘 모르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 같다. 거기에 삶의 진리가 있는 게 아닐까.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인거지.(웃음)
병우는 전직 야구선수출신이다. 의도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살을 기도하는 네 명의 고객들을 살리기 위해 9회 말 마운드에 서는 구원투수처럼 보였다.
사실 모르겠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 말이다. 극중 병우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네 인물들의 구원투수는 바로 가족이다. 그 다리 역할을 병우가 할 뿐이지. 오부장은 딸과 통화하는 순간 다시 삶을 살고, 복순은 딸과의 만남을, 영탁이도 누나를, 소연이도 동생의 기타 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삶의 소중함을 느낀다. 아무리 삼자가 가까워도 가족만큼 하겠나. 역시 가족이 최고의 구원투수인 셈이지. 뭐 판단은 관객들이 하겠지만.
그럼 병우의 구원투수는 누구였을까?
물론 네 인물이겠지. 오히려 병우가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거다. 병우는 꿈에 대한 상실감이 큰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야구선수가 됐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를 맛본다. 그리고 보험회사를 다니면서 그 상실감을 보상받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10억을 벌려고 애쓴다. 그랬던 그가 네 인물을 만나서 잊고 있었던 꿈을 다시 찾은 거다. 그리고 그게 희망의 신호탄이 된다. 물론 영화가 그런 걸 모두 담기에는 인물들도 많고,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디테일하지 못했지만, 이런 의미들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영화가 끝나고 앞으로 병우는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생각도 들더라.
극중 이야기는 병우의 또 다른 시작을 암시한다. 나 또한 앞으로 병우의 삶이 어떻게 진행될까 생각해봤다. 아마도 병우는 원래 꿈을 향해 가지 않았을까. 원초적 꿈 말이다. 연봉 10억을 버는 게 꿈은 아니었을 거다. 현실에 안주하기 위해 턱없이 힘든 꿈을 쫓아가는 병우는 다시 원래의 꿈을 돌아갔을 거다.
얘기를 듣고 보니 마지막 장면에서 “고객의 꿈이 곧 저의 꿈 입니다”라는 병우의 외침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닐까 싶다.
아마 병우는 그 때 느꼈을 거다. 삶은 살만 한거라고. 그게 바로 삶의 행복이지.
차별성을 두지 않는 게 차별성이지 않을까(웃음). 그런 관념에서 자유스럽고 싶다. 극마다 새로운 가면을 쓰면서 새로운 느낌을 표출하기보다는 조금 더 나다운 것을 찾고, 그 모습을 영화에서 발현하려고 노력한다. 다양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기 보다는 하얀 종이 위해 나를 관찰하고 그리려는 화가인 셈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영화는 개인의 것이 아니고 대중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걸 충족시켜야 하되 그 안에서 배우가 추구하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연기는 100M 달리기가 아닌 마라톤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환경에 지배당하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안주하고 세속적으로 변하겠지만 스스로 안 변하려고 노력한다. 아마 작품을 나열하면 많은 관객들은 연기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모를 수도 있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씩 진화되어가는 모습을 마주하게 될 거다.
마치 지금 두꺼운 자서전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 그런가.(웃음) 배우라는 걸 결정했으니까 이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지.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 나이 때 ‘이런 연기를 했구나’가 아닌 ‘이런 인생을 살았구나’ 하는 걸 느꼈으면 한다. 사람들에게도 ‘어떤 작품에서는 이런 연기를 했구나’가 아니라 ‘류승범은 이런 인생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들을 줬으면 하는 거지. 어렵겠지만 해보고 싶다.
대중들이 원하는 인물과 자신이 보여주려는 인물. 매 영화마다 이 두 가지의 절충이 중요할 것 같다. 이번 영화에서는 어땠나?
영화가 개봉할 때면 관객과의 소통 문제가 고민된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있음에도 관객들이 보는 건 결과물뿐이니까. 물론 대중예술이 결과물을 놓고 판단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아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나! 상업영화에 출연하는 배우인걸. 직업이 배우인거지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는 대한민국 직장인과 별반 다를 게 없다.(웃음) 상업성과 예술성이 동시에 배합된 영화에 출연할 때도 있지만 상업성에 치우친 작품에 출연할 때도 있다. 그 때마다 배우의 욕심을 버리고, 관객들이 원하는 지점을 찾아 연기한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말이다. 연기를 하면서 배우 류승범의 가치와 인간 류승범의 가치를 극대화하기란 참 어려운 것 같다.
그냥 매순간 열심히 하는 거다.(웃음) 돌이켜보면 촬영장에서 ‘지금 연기가 돈을 벌기 위한 건가, 가치를 위해 하는 건가’에 대한 딜레마에 빠져 있을 때가 있었다. 그 순간 ‘생각을 집어치우고, 내 몫이 이거라면 열심히 하는 게 정답’이라 생각했다. 물론 영화는 보시는 관객들이 판단하겠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매 현장에서 열심히 한다. 당당하고 솔직하게.
현장에서 열심히 노력한다고 하지만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어려움이 많을 게다. 이번에는 추위가 많이 괴롭혔다고 들었다.
매번 영화를 찍고 에피소드를 말하라고 하면 참 난처하다.(웃음) 어떻게 보면 현장에서 매 순간 많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게 일상이 되 버리는 순간 잊혀진다. 그런데 이 영화를 찍으면서 팍하고 떠오른 건 ‘추위’였다. 진짜 추웠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거듭하게 되더라. 촬영기간 내내 추위와 싸웠다. 원래 추위를 잘 견디지 못하는데, 이번에는 정신적으로도 힘들더라. 세트촬영이 없고, 로케이션이 대부분이라 더했다. 그래도 어떤 일이든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성격이라, 참았다.(웃음) “오 그래 추워봐. 더 추워봐”하면서.
다른 영화 찍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다양한 지역에서 촬영을 했다. 그에 따른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은데.
원래 혼자 운전하는데, 다른 지역 촬영 끝나고 새벽에 운전해서 서울에 오는 걸 즐긴다.(웃음) 혹시라도 졸음운전하면 위험하다고 스탭들이 걱정하지만, 그게 버릇이 됐다. 고요하게 2~3시간 운전하면 너무 좋다. 하루를 보내면서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 없는데, 그때는 하루를 정리하는 느낌이 든다.
하긴 요즘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있겠나.
동감이다. 현대인들은 무의식중에 중독되는 게 너무 많다. 미디어, 핸드폰, 사람 등등 자신도 모르게 중독되고,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냥 혼자 덩그러니 있으면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거지. 몇 년 전. 중독된 것들을 버리기 위해 핸드폰도 없이 혼자 외국으로 여행을 갔다. 돈도 적당량만 들고. 외국이니까 누굴 만나야 할지도 모르겠고, 하루가 너무 힘들더라. 그런데, 버티다 보니까 그 시간들이 좋아졌다. 그 때 인간 류승범이 보였다.
그건 아니다. <수상한 고객들>은 상업영화이고, 자본의 시스템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 류승범이 원하는 연기를 보여주면 대중들도 주위 스탭들도 피곤해진다.(웃음) <수상한 고객들>에서는 온전히 대중영화에 맞는 연기를 보여줬고, 그 몫을 다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여행에서 얻은 배움을 통해 자체적으로 평가에 들어갔다.
혹시 그 평가의 답이 나왔나?
아직. 그래서 지금 무척 혼란스럽다. 한 쪽 측면에서는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걸 겁내고 있고, 또 한 측면에서는 계속 대중영화에 출연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아직은 어떤 것을 결정하고 정리할 나이가 아닌 것 같다. 계속해서 그 과정을 가는 나이다. 그래서 충돌한다. 아마도 이 충돌이 당분간은 가지 않을까. 지긋한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답이 나올 거다.(웃음)
30대가 되니까 그런 생각이 더 들것 같다.
다 마찬가지겠지만 30대가 되면서 힘들어졌다. 지금 받고 있는 질문도 현재로서는 정확한 답이라고 하기에 부족하다. 그냥 오기로 하고 있는 거지.(웃음) 일단 맞닥뜨리고 있는데, 그럴수록 더 혼란스럽다. 앞길은 깜깜한데 촛불 하나 없이 가는 느낌이랄까.
이거 너무 암울한데.(웃음) 화제를 바꿔서 류승범의 이름을 다시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영화가 바로 <부당거래>다. 류승완 감독과의 호흡이 너무 잘 이루어진 작품이라 생각되는데.
형과는 이제 감독과 배우로서 호흡이 잘 맞는 것 같다. 계속해서 작업을 하다 보니까 시너지 효과가 나더라. 온전하게 서로를 알고 가니까 가능한 거라고 본다. <부당거래>를 할 때 시작부터 기분이 너무 좋았다. 류승완, 황정민, 류승범이 모여서 작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흥분됐다. 그 흥분이 허했던 연기의 고픔을 채웠고, 카타르시스를 줬다. <부당거래>는 촬영을 마치고 즐겁게 내보냈다.(웃음) 땀 흘리고 열심히 일해서 얻은 수확물을 보고 기뻐하는 느낌이랄까. 평단의 평도 무섭지 않더라. 스스로의 연기와 인생의 성장보다는 감독과 배우가 의기투합해서 온전히 작업에 몰두했다는 것에 의미가 깊더라. 현장 스탭들도 호흡이 너무 좋았다. 아마 관객들도 그 기운을 느꼈을 거다. 그런 작업이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웃음)
아마 자유로운 생각과 용기일 거다. 많은 선배들이 조언도 해주고, 도움도 많이 주지만, 결국 깊은 성찰과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용기가 가장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 중 요즘 실천하고 있는 게 하나가 있다. 바로 정의라는 이름으로 ‘구린 삶’을 살지 않는 거다. 어느 순간 무언가를 선택할 시점에서 ‘진짜와 가짜가 아닌 득이냐 실이냐’를 따지게 되더라. 근데 이제는 용기내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삶을 살고 싶다.
앞으로 어떤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가?
진짜 배우인, 진짜 인간인 류승범을 보여주고 싶다. 앞으로 그 가치를 높이는데 주력할 것이다. 배우가 자기를 얘기하고 싶은데 스스로 가치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노련한 연기의 스킬이 아니라 세상에 연기를 통해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것. 이걸 보여주는 날을 위해 열심히 노력할 거다. 최대한 구리지 않게 살다보면 오지 않을까.(웃음)
2011년 4월 15일 금요일 | 글_김한규 기자(무비스트)
2011년 4월 15일 금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