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끈하지 못한 외모를 가진 배우는 보통, 영화 속 인생도 기구하다. 이미지의 예술인 영화에서 타고난 분위기와 외모는 그 배우가 맡을 배역에 강력한 제한사항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청춘스타 나이 대에 소속되어있고, 잘나가는 TV 시트콤을 거치며 경력을 쌓은 봉태규가 그런 경우다. 개성 강한 외모와 다채로운 표정을 지닌 이 젊은 배우는 동년배와 같은, 애잔한 연애를 최소한 영화 속에서는 가진 적이 없다. 이번에 만난 예쁘장한 외모의 그녀 역시 마찬가지. 미남 배우들과 절묘한 화보 조합을 자랑하는 여자 친구가 사실, 이중 인격의 소유자라니.
독특한 사건과 인물을 소재로 가져오기 좋아하는 장르 영화에 ‘다중 인격’은 쏠쏠한 재료 중 하나다. 효과와 성향이 지나치게 확연해서 그대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 않지만 ‘인격 변화’를 다루는 작품은 대부분 ‘다중 인격’의 영화적 변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애국심 넘치는 소년이 전쟁터에서 황폐한 인격으로 변해가는 〈플래툰〉〈씬 레드라인〉이나 사라진 기억이 되살아나며 현재의 온화한 모습과 전혀 다른 호전적인 인격이 드러나는 〈토탈리콜〉〈롱키스 굿나잇〉같은 영화처럼 대 놓고 ‘다중 인격’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인격 변형을 영화적 재료로 사용하는 작품은 장르에 널리 퍼져 있다. 간단하게 보면 가면 쓰고 수퍼 히어로로 변하는 영화(또는 그 작품의 원작인 만화)는 대부분 다중 인격을 변용한 작품이다. 그 중에는 팀 버튼 버전 〈배트맨〉처럼 수퍼 히어로 영화의 음울한 속성을 고스란히 이용하는 경우도 있고.
변신하면 위험한, 하이드의 자손들
하지만 역시 정통 ‘다중 인격’ 수퍼 히어로는 〈헐크〉가 으뜸일 것이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평소에는 숨겨 두었던 정의감 가득한 성품이 드러나는 여타 히어로에 비해, 이 남자는 확실하게 자아가 분리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만화적 상상력으로 덧칠한 〈헐크〉의 다중 인격은, 스판텍스 바지가 아니면 소화 불가능한 수준의 신체변화로 인격 변화를 드러낸다. 정도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아를 잃고 호전적인 〈헐크〉로 변하는 브루스 배너의 이야기는, 보통 사람이라면 정신과 치료를 받는 불쌍한 남자의 사례로 회자 되겠지만 초록색 피부의 거구가 닥치는 대로 부수고 다니는 이 경우엔 영웅이 되고 말았다. 만화에서 그린 파괴력에 가깝기는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이 안 감독 버전의 〈헐크〉가 단연 최고지만, 덩치 큰 보디빌더 루 페리뇨에게 푸른 색칠을 시키고 변신한 〈헐크〉를 맡긴 70년대 드라마 버전의 명성을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두 얼굴의 사나이〉라는 번역 제목으로 알려진 작품으로, 인기도 높았다. 곧 개봉하는 로맨틱코미디 〈두 얼굴의 여친〉에서도 사용하는 제목일 정도. 스판텍스를 입고 화나면 거칠어지며 윗도리를 찢는 〈헐크〉의 캐릭터를 프로레슬링에 도입했던 80년대 스타 레슬러 헐크 호건은 지금도 프로레슬링 판에 등장해 불쌍한 브루스 배너의 광포한 인격을 단단한 암내 근육으로 승화시키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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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이 기괴한 신체 변형으로 발전한 〈헐크〉의 기본 아이디어는 사실, 널리 알려진 다중 인격 소설의 걸작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온 것이다. 해적 동화의 걸작 〈보물섬〉의 원작자이기도 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기발한 착상은 당연히 수많은 각색을 통해 영화화 되었고, 19세기말 우울한 정서를 지닌 소설은 20세기에 〈헐크〉와 같은 극단적인 신체 변형을 거쳐 만화로 각색되었다. 애당초 약품을 통해 자신의 다른 인격을 밖으로 드러나게 한 지킬 박사의 이야기에서 밖으로 드러난 하이드 씨의 젊은 외모와 광폭한 성품은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수도 샐 수 없이 만들어진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영화판에서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그 중간 정도 나이의 배우가 동시에 맡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그런 이유. 하지만 〈헐크〉의 히트와, 가벼운 작품에서 원작을 응용하는 경우가 많아지며 〈젠틀맨 리그〉〈반 헬싱〉에서 등장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헐크〉급 변형을 하는 하이드 씨를 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강렬한 신체 변형과 성격 변화라는 발상은 〈너티 프로페서〉와 같은 코미디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원작 자체가 1908년부터 수없이 많은 영화로 만들어진 인기 레파토리이고, 그 중에는 현대로 무대를 옮긴 각색 버전이나 인종과 배경을 바꾼 작품, 공포 영화 분위기를 강조한 작품까지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그 중에서 근래 팬들의 기억에 있을 만한 작품은 모두 원작 그대로의 각색작이 아닐 것. 작년과 올해에도 계속해서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외국 B급 영화였거나 TV용이었고, 한국에서는 조승우 주연으로 유명한 뮤지컬 버전이 아니라면 메이저 영화로 개봉한 작품이 전무한 까닭이다. 그 중 하나는 향수 회사에 다니는 지킬 박사의 먼 후손이 선조가 남긴 약품을 먹고 숨겨진 자아가 깨어난다는 이야기 〈지킬 박사와 미스 하이드〉인데, 제목에서 보다시피 다른 자아인 하이드가 (아주 예쁘고 섹시하지만 악당) 여자인 코미디 영화다. 아직 경력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 섹시한 숀 영을 확인할 수 있는 범작. 또 하나는 오리지널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사건에서 비밀을 일찍 눈치채고 지킬 박사에게 묘한 애정을 가진 하녀가 있었다고 가정하고 만들어진 각색 작품으로, 주인공 하녀 〈메리 라일리〉를 줄리아 로버츠가 맡고 비운의 주인공 지킬 박사를 존 말코비치에게 맡긴 기대작이었다. 흥행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던 영화였지만.
전쟁의 수단으로 택한, 악랄한 무기
군산복합체에 대한 불신이 하늘을 찌르고, 조직에 의해 지배 당하는 암울한 세계관을 그리는 작품이 많았던 시기에는 음모 이론을 토대로 다중 인격을 동원하는 작품들도 꽤 있었다. 당시의 유행을 따라, 가혹한 세뇌 등의 방법으로 황폐화 시킨 사람의 머리에 새로운 인격을 심어 놓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 암살자로 계획되어 있는 등의, 극단적인 첩보물. 잃어버린 기억이 결정적인 살인사건과 연결되는 플롯은 60년대 고전 추리소설에서 잘 써먹는 트릭이었고, 보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응용한 작품도 많았다.
그 중 대표할 만한 작품이 존 프랑켄하이머의 1962년작 〈만주인 포로〉다. 원제를 그대로 가져다 쓴 조너던 드미의 리메이크작 〈맨추리언 캔디데이트〉도 같은 플롯을 쓰고 있지만, 40년만의 작품인 만큼, 무대를 현대로 옮겨 놓았다. 한국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있었던 동료들이 고문과 세뇌를 통해 암살자로 프로그래밍되었고,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음모를 파해 치는 주인공의 추적을 다룬 스릴러다. 조너던 드미의 리메이크도 무게감 있고 나쁘지 않은 작품이지만, 액션 명장 존 프랑켄하이머의 60년대 전성기 작품인데다 프랭크 시나트라와 자넷 리가 투입된 캐스팅까지 다중 인격 스릴러의 고전에 뽑아 놓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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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유행이었던 탓에 70년대 이후 〈만주인 포로〉와 같은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재능 있는 감독 중에는 절묘하게 자신의 스타일로 소화한 경우도 있다. 전쟁의 도구로 극대화하기 위해 군인의 정신을 조종하는 실험을 하고, 이로 인해 살인기계가 되지만 가까스로 살아난 희생자에 대한 이야기를 1990년에 영화로 만든 〈야곱의 사다리〉가 그런 경우다. 함께 전쟁터에서 살아난 동료들의 부음을 계속해서 듣고, 자신도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 희미하게 기억나는 과거를 추적하는 이야기를 몽환적인 화면과의 교차 편집과, 기괴환 분위기 연출을 통해 효과적으로 이끌어낸 애이드리언 라인의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평자에 따라 애이드리언 라인 최고작으로 꼽기도 하는 영화이며, 애이드리언 라인 자신이 가장 애착을 가지는 영화로도 알려진 〈야곱의 사다리〉에서, 지금 관객들은 허무함과 생존 본능 사이에서 초현실적인 괴로움을 느끼는 주인공 제이콥 역을 맡은 팀 로빈스의 연기를 보며 〈미스틱 리버〉의 그 소름끼치는 연기의 전주곡을 느끼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강력 범죄에 대한 다중 인격의 설명
코미디, SF, 전쟁영화, 수퍼 히어로와 같은 많은 변형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중 인격은 연쇄 살인과 같은 스릴러의 소재로 널리 사용된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 중에 다중 인격이 관계된 경우도 많을 뿐더러, 그에 대한 보고서도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작품이 다중 인격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근래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작품 중에 다중 인격 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자세한 플롯을 밝히면 심각한 스포일러가 될 〈아이덴티티〉같은 작품이 다중 인격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경우다. 영화 마지막에 의미심장한 장면이 이어지며 절묘한 트릭에 무릎을 치는 관객도 많았을 것. 밀폐 공간 스릴러처럼 시작하는 영화는 절정의 순간이 넘어가며 교묘하게 사이코 스릴러로 변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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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 정려원 양이 다중 인격을 가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인격이 변하며 옷이 찢어지는 퍼포먼스는 좋지만 근육질에 험상 궂은 얼굴로 변하는 것은 그리 즐거울 것 같지 않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수준에서 〈두 얼굴의 여친〉은 〈그 해 여름〉의 수애와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 정도 수준에서 변신한다고 해 두자. 호호, 이거 귀엽겠는걸?
글_유지이 기자 (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