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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탤지어를 부르는 얼굴 <건축학개론> 한가인
2012년 3월 23일 금요일 | 정시우 기자 이메일


영화에 대한 평가가 너무 좋다. 평들은 많이 찾아봤나?
안 봤다. 일부러.

아니, 왜?
그냥 지금 반응을 보는 게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아서. 그래서 찾아보지 않았다.

왜 반응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가. 배우라면 본인이 책임진 작품의 결과에 대해서 궁금해 할 것 같은데.
이미 촬영은 끝났고, 중간에 아쉬운 부분이나 좋았던 부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가까운 사람들의 반응을 듣는 건 중요한데, 많은 분들이 ‘좋았다, 나빴다’ 얘기하는 반응에 휘둘리는 시기는 아니라는 거지. 개봉을 하면 전반적으로 평이 어떤지 살펴볼 생각이다. 그리고 사실은 반응을 볼 시간이 없기도 했다. 인터뷰 하고 시사회 참여하느라 바빠서 볼 기회가 없었다.

영화를 본 가까운 지인들의 얘기는 들어봤겠다.
시사회 왔던 분들은 너무 따뜻하고 아련하고 좋았다고 얘기해 줬다. 이 영화가 나를 설레게 한다,고 얘기해 주는 사람도 있었고.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이 좋아해주셨다. 다들 비슷한 감성을 가지고 있구나, 싶었지.

<해를 품은 달>(이하 ‘해품달’) 촬영 전에 <건축학개론>을 찍었다. 서연에서 연우로, 다시 서연으로 돌아온 셈인데 오랜만에 만나는 서연은 어떻던가. 시간의 차이가 있기에 느끼는 바가 달랐을 것 같다.
일단 태웅 오빠의 유머가 반가웠다.(웃음) 태웅 오빠에게도 얘기했는데, “오빠 제가 이런 개그가 그리웠나 봐요” 이랬다. 태웅 오빠의 유치한 말장난이 현장에서 나를 풀어주게 하는 요인이었거든. 홍보를 위해 만난 첫날부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막 던지는데, 파안대소하면서 ‘내가 이게 되게 그리웠었구나’ 새삼 느꼈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서연을 만나니까 감회가 새롭더라. 뭐랄까. 되게 오래전 일 같다는 느낌이랄까. <건축학개론>은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른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심야상영으로 몰래보고, 앞에 나가서 인사를 해 볼 생각도 있다. 사람들이 어떤 포인트에서 웃고 어떤 포인트에서 슬퍼하는지도 직접 물어보고 확인해 보고 싶다.

개인적으로 당신이 만난 많은 남자 감독님들이 ‘이 예쁜 배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마녀유희>와 <신입사원>을 떠올려보자. 당신은 안경 하나 벗었다고 추녀에게 미녀가 된다.(일동 웃음)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설정이잖나?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 이용주 감독님은 당신의 미모를 오히려 역이용해서 잘 살렸더라. 욕도 그렇고, 캐릭터도 그렇고. 외모의 변화로 당신을 바꾸려 했던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다 생각한다.
단언하건대 나를 가장 꿰뚫어 보신 분이 이용주 감독님이다. 내 실제모습라든가 감정상태도 가장 세밀하게 보시고. 뭔가가 조금이라도 들썩들썩 박자가 안 맞잖아? 그럼 예민하게 바로 캐치하셨다. 연기를 조금만 다르게 표현해도 “가인씨 아까는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이번에는 요렇게 저렇게 하네?” 이러시고. 그래서 연기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좋았고, 기뻤고. “감독님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면, “음, 내가 알지” “역시 예민하셔. 감독님 생긴 건 곰인데 완전 센스쟁이.” 이러고. 감독님이 처음에 나를 보고 “아, 서연이다” 했다더라. “어떤 부분에서 그랬어요?” “가인씨 까칠하잖아” “어~ 저 안 까칠해요” “에이~ 그런 면도 있잖아요.” “사실 있긴 하죠.” “가인씨 AB형?” “네. AB형” 이러면서 대화를 많이 나눴다.(웃음) 관객들이 보이엔 의외인 나의 모습들을 감독님이 잘 끄집어 내 주셨다.
혈액형과 성격의 상관관계를 믿나 보다.
연관이 아예 없지는 않다고 본다. 나는 A도 B도 다 있는데, 감정 기복이 조금 심한 편이다. 솔직하고. 소심하다기보다 할 말이 있으면 다하는 스타일이랄까. 수지도 AB형. 태웅 오빠가… A형 아니면 O형 인데…

A형 같은데?(일동 폭소)
맞다! A형. 그것 봐. 혈액형에 따른 성향이 조금씩은 분명 있다니까. 우리 신랑 O형, (정)일우씨 O형, (김)수현씨 AB형. 그리고 전 작품 <나쁜 남자>에서 (김)재욱씨가 B형, (김)남길 오빠 AB형 이었다. 혈액형과 이미지가 조금씩 비슷하지 않나?

의외성을 얘기했는데, 관객입장에서 보면 한가인의 입에서 나오는 욕도 일정 부분 의외일 게다. 욕하는 부분 촬영할 때, 속이 시원하지 않았을까 싶다.
두 번 욕하는 게 나온다. “그 XX이 나야?”랑, “인생이 X같아” 할 때. 속 시원했지. 어쩌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욕하도록 허락된 시간이었잖나. 그래서 통쾌한 부분이 있었다. 욕해서 이미지 홀딱 깨지면 어쩌나 염려하는 분도 있는데, 이미지 변신에 두려움이 없는 편이라 상관없었다. “아하!” 이러면서 연기했다.

<건축학개론>은 설렘을 주는 영화다. 동시에 다시는 그 순수했던 첫사랑의 순간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서글픔을 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어떤 분은 우리 영화를 아름답다 애틋하다 아련하다고 표현하는데, 첫사랑이 마냥 아름답고 애틋하고 아련하지만은 않지 않나.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뿐이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씁쓸한 기억과 마주해야 할 거다. 30대 후반의 싱글여성분들에게 “왜 결혼 안 해요?”라고 물어보면, “이 남자와 결혼하려고 지금까지 기다린 건 아니야.” 혹은 “‘저 사람하고 결혼하려고 지금까지 결혼 안 한 거야?’라는 소리 들을까봐 못하겠다”고 하더라. 그런 걸 보면, 조건 없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어쩌면 그때가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나이 들수록 상대의 직업은 뭔가, 차는 뭘 타냐, 이런 것들이 더해지면서 순수한 사랑은 빛을 잃어간다. 순수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그때를 그리는 어떤 것들이 가득한 영화다.

누군가는 ‘남자들의 찌질한 날에 대한 찬가’라고 말하더라.
맞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연애에 너무 능숙해지고 능글맞아진다니까. 영화를 보고 나서 누가 그러더라. “순수했던 승민(이제훈/엄태웅)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렇게 능글맞아 진거야?” 많은이들이 순수했던 그때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승민이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

당신, 버스와 인연이 깊다. 과거씬이긴 하지만 극중 서연이 버스에 앉아 있는 모습에서 ‘박카스 CF’에서의 당신이 떠올랐다. 버스 안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그 모습 말이다. 그리고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현수(권상우)와 유진(한가인)의 인연이 만들어지는 공간도 통학 길 시내버스다. 나름 흥미로운 우연이라 생각하는데, 당신에게도 그런 버스 에피소드가 많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웃음)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었다. 여중 여고를 다녀서, 남자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버스밖에 없었다. 혹시 알지 모르겠는데, 그 시절에 ‘141 연락방’이라는 게 있었다. 개인 고유의 연락 방 번호가 있으면 거기에 삐삐처럼 메시지를 남기는.
안다. 내가 당신이랑 비슷한 또래라, 공유하는 문화가 비슷하다.(웃음)
아! 그 다음에 나온 게 삐삐였는데, 당시 버스에서 ‘141 연락방’과 삐삐 번호가 적힌 쪽지를 굉장히 많이 받았다.(웃음) 꽃을 받았던 기억도 있고. 그런데 그때는 내가 연애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비오는 날 검은 비닐봉투 뒤집어쓰고 버스타고, 젖은 실내화 신고 돌아다니는 완전 말괄량이였거든. 그러다가 대학 들어가면서 “그래 이젠 정말 멋진 선배를 사귀어 보는 거야!” 부풀었다. 당시에 내가 또 <느낌> 이라는 드라마를 엄청 재미있게 봤거든.

아, <느낌>! 나도 즐겨보던 드라마다.
“(주제가 흥얼거린다)그대여~ 나의 눈을 봐요~” 굉장히 풋풋한 드라마였는데, 배우들도 멋있고.

이정재!! 그때도 멋있었지.
맞다! 그 드라마 때문에 대학 생활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막상 가니까… 이게 뭐지?(웃음)

현실과 이상의 괴리지.
너무 격차가 크니까 혼란스러웠다. 오리엔테이션을 갔는데 내가 원했던 건, 이게 아니야~ 복학생 오빠들은 바지를 배 위까지 치켜 올려 입고, 이상한 운동화에 가방 메고.(웃음) 영화에서 납뜩이(조정석)가 나올 때마다 웃었다. 내가 봤던 선배 오빠들이 납뜩이 같았거든. 영화 보면서 괜히 소개팅 했던 기억도 나고. 아, 내가 첫사랑을 소개팅으로 만났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내가 다닌 경희대에서 어린 서연(수지)과 승민의 분량이 촬영됐다. 또 내가 배화여고를 나왔는데, 제작사 명필름이 그 부근이었다. 학교 앞 골목에 떡볶이 집이 쫙 늘어서 있는데, 거기에서 싹 돌면 바로 명필름 이었다.

인연이 깊은 영화네.
그러니까. 감독님 처음 미팅 하러 간 날, “와~ 여기야?”하면서 엄청 흥분했다. 옛날에 갔던 떡볶이 집에 가서 “이모!” 하고 불러도 보고. 이모가 너무 오랜만에 왔다며 떡볶이를 공짜로 주더라.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내겐 각별한 영화다.

스무 살 때 이야기와 서른다섯 살 때 이야기가 병렬구조로 나온다. 아무래도 관객 입장에서 과거와 현재의 인물을 비교해서 보게 될 텐데, 서른다섯의 서연을 연기하면서 스무 살 서연이 신경 쓰였을 것 같다.
수지를 보면 내가 <말죽거리 잔혹사> 하던 그 시절 생각이 많이 난다. 그립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웃음) 스케줄로 엄청 힘들었었거든. 젊음이 버거웠고. 그때 기억도 자세하게 남아있지 않다. 너무 정신없이 지내서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거지. 수지가 지금 영화와 가수 활동을 함께 하고 있고, 최근에 드라마 얘기도 나오는 걸로 알고 있다. 정신 없을 텐데. 내 옛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남 같지 않다. 짠하다.

공간을 굉장히 잘 이용한 영화다. 서울의 얼굴이 곳곳에 잘 드러나 있던데, 그래서 궁금하다. 당신의 취향. 서울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이 어딘가?
삼청동, 성북동, 북악스카이웨이, 인사동, 그런 쪽. 한옥도 좋아하고. 내가 조금 아날로그 적이다. TV보다는 라디오가, 오토바이보다 자전거가, 커피보다는 국화차가 더 좋다. 커피는 안 마신다. 마시면 바로 장에서 반응이 온다.
술은 마시나?
술은 소맥. 자주 즐기지는 않는다. 먹고 나면 다음 날 너무 힘들어서. 보통 특별한 상황에서 마시는 편이다. 예를 들어 작품 끝나고 쫑파티 할 때. 감독님 처음 만나서 친밀해져야 할 때. 그럴 때는 잘 마신다.

배우가 되기 전의 꿈이 호텔리어였던 걸로 알고 있다.
고 3때까지는 의대를 가고 싶어 했다. 수능을 봤는데, 참.(웃음) 내가 미쳤지. 만점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다. ‘큰일 났다. 어쩌지? 방송국에서 인터뷰 하러 올 텐데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이래야 하나? 학원을 다니지 않았어요, 이래야 하나?’ 그런 고민까지 했다.(웃음) 그런데 EBS로 채점을 해보니, 몇 개 틀렸더라고. 학교 갔더니 애도 잘보고, 쟤도 잘보고. ‘어쩌지? 다 잘 봤네.’ 재수하는 건 싫었다. 의대를 넣기에는 점수가 조금 불안했고. 교차지원을 생각하다가 네 군데를 하향 지원했는데, 다 붙었다.

한 군데는 높여 쓰지 그랬나.
용기가 없었던 거다. 떨어질 까봐. 결과 확인하고 나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때 지원한 과가 호텔경영학과와 교육학과 쪽들이었다. 내 성격에 교대는 아닌 것 같더라. 괜히 애들이랑 싸울 것 같아서 호텔경영을 선택해서 경희대를 갔다. 그렇게 1-2년 다니다가 휴학했는데, 내가 원했던 방향이 아니다보니 방향을 잃은 느낌이었다. 그러던 찰나, 아시아나 모델을 하면서 박카스 CF 찍고. 그 다음에 드라마로 이어지면서 쭉 이 일을 하게 된 거다.

의대에 갔다면 어땠을까? 확고한 꿈이었기에,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갔다면 안 왔을 가능성이 거의 90% 이상이었을 거다. 1년 더 공부했으면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됐을 수도 있지. 그런데 내가 “그때 의대 갔으면 어땠을까?” 비슷한 질문을 하니까, 우리 스태프들이 그러더라. “그래도 지금 방송하고 있을 걸요? 방송하는 의사!” 그 얘기를 듣고 그랬을 수 있겠다, 싶었지.

첫사랑은 기억에만 두는 게 좋다고 하지 않나. 첫사랑이 만나자고 하면 어쩔 텐가?
글쎄. 첫사랑을 만나면 환상이 깨진다고들 하던데. ‘내가 저 사람을 왜 좋아했지? 그때 미쳤지’ 이런 생각도 든다고 들었고. 흠. 만나면 할 말이 많을 것 같긴 한데, 그것도 아주 잠깐이지 않을까 싶다. 한 두 시간 정도? 그 다음은 아름다웠던 추억이 흐릿해져 가는 게 아쉬울 것 같고. 내가 좋게 기억하고 있는 그 상태 그대로 두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아마 내가 첫사랑을 만나서 환상이 깨졌더라면, <건축학개론> 찍을 때 굉장한 방해가 됐을 거다.

<해품달>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아까 인터넷의 반응은 잘 안 찾아본다고 했는데, <해품달>때는 어땠나? 말들이 많았는데.
대략적인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인터넷을 많이 찾아보지는 않았다. 시골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드라마 인기가 피부로 와 닿지도 않았고. 그리고 논란은 들어가기 전부터 예상했던 부분이다. 내가 하기에는 어린 역할이었고, 결혼을 했다는 단점도 있었고. “감독님 어떻게 해요. 저 안티 100만 이에요.” 그러니까 감독님이 “괜찮아요, 초반 3-4주 정도 인터넷 끊고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무던하려고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사람이다 보니 신경이 안 가지 않더라.
자극이랄까. 뭔가 얻은 것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자극이라기보다는 성향의 차이 같다. 칭찬을 해줘야 잘하는 사람이 있고, 질책을 해줘야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고,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서도 다르다. 어떤 여지가 있는 상태에서 비판의 말이 들어오면 좋은 효과가 날 수 있지만, 그런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들어오는 말은 오히려 그 사람을 흔들고 무너뜨릴 수 있거든. 그래서 그 안에서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게 힘들었다. 왜냐하면 일주일에 하루 집에 가서 빨래만 하고 나오는 상황이었고, 잠을 하루에 한 두 시간 밖에 못자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판의 말들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사람을 굉장히 예민하게 말들 수 있는 요소였다. 만약 내가 <해품달>에서 얻은 게 있다면, 그 시간을 견뎠다는 게 아닐까 싶다. 조금 더 단단해진 느낌이다.

당신이 나오는 영화와 드라마를 우연히도 거의 다 봤다. 느낀 점을 하나 조심스럽게 얘기하자면, 배우로서 당신의 캐릭터가 돋보이는 게 없었다는 느낌이다. 예컨대 <말죽거리 잔혹사>는 권상우의 영화로 기억된다. <나쁜 남자>는 김남길의 드라마로 <닥터 갱>도 양동근의 드라마로 기억되기는 마찬가지다. 이번 <해품달>도 김수현의 드라마로 기억되는 분위기인데, 그런 한계를 깨고 싶은 갈망은 없나?
그렇다면 내가 작품 선택을 잘못한 거겠지? 내가 드러나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면, 내가 메인이 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하는 게 맞았을 거다. 그런데 그런 작품을 선택하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돋보여야지 보다, 극의 전반적인 걸 봤기 때문이다. 그 역할이 내 포지션에서 적합한가, 이 역할을 했을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뭔가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을 하는 편이다. <건축학개론>도 같은 맥락인데, 서연이만 보이는 영화가 절대 아니다. 나만 보이는 영화를 원했다면 이 영화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오랜만에 하는 영화였고, 같은 듯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느꼈다. 앙상블이 잘 맞으면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해품달>의 경우 일단 원작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었다. ‘어, 이거 스토리라인 되게 좋은데’라는 기대가 있어서 선택해서 들어 온 거다. 내 롤을 생각했다기보다는 말이다. 작품마다 선택의 포인트가 약간씩은 다른 것 같다.

아내로서의 당신과 딸로서의 당신과 배우로서의 당신은 얼마나 다른가?
많이 차이난다. 딸로서는 꽤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어릴 때부터 한 번도 속 썩인 적이 없다. 엄마로부터 공부 해라라든가, 일어나서 학교를 가라라든가 하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내 스스로 일어나서 공부하고 스스로 학교가고 그랬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밤을 새워도 매니저에게 “일어나세요”라는 말은 안 듣는다. 혼자 하는 습관이 든 거지. 그리고 엄마에게 집을 사드리는 게 꿈이었는데, 결혼하기 전에 사드렸다. 물론 엄마가 나에게 해 준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마음을 쓰는 부분에서는 괜찮은 딸 같다. 그런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100점 만점에 98점 정도?

아내로선?
아내로서는 90점. 점점 낮아지고 있네.(웃음) 일 때문에 바쁘고 신경 못써줘서 점수가 10점이나 깎였다. 그래도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건, 결혼 생활이 지루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다는 거다. 집에서 나태하게 늘어진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옷을 아무 곳에서나 편하게 갈아입는다거나 하지 않는다. 남편으로 하여금 더 이상 가슴 떨리지 않게 하고 싶진 않다. 그게 되게 중요하다. 서로 뻔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말이다. 흔히들 ‘밀당’이라고 하는데 나는 죽을 때까지 할 거다, 그 ‘밀당’.
이제 하나 남았다.
사실 배우로서는 이제야 시작하는 느낌이다. 중간에 쉬는 기간도 길었고. 그런데 점수를 정하기가 어려운 게, 어떤 씬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98점이 나오고, 어떤 씬은 너무 좋다고 생각했는데 10점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게 섞여 있어서 평균 점수를 내기가 힘들다. 남편에게는 내가 정한 룰 안에서 행하는 매뉴얼 비슷한 게 있는데, 연기는 예측 불가능하다. 흥행이나 시청률도 전혀 예상할 수 없고 말이다.

방금 말한 그 공백 기간. 중간에 3년 정도의 공백이 있었는데, 그 시간은 당신에게 어떤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나?(한가인은 2007년 드라마 <마녀유희>로 큰 홍역을 앓은바 있다. 당시 <마녀유희>는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했고, 이에 한가인의 전 소속사가 시청률 부진을 PD와 작가의 탓으로 돌리는 보도 메일을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한가인은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았고, 여러 가지 일이 겹치면서 3년이라는 공백기를 가져야 했다.)
고통과 시간~! 정말 고통과 암흑의 시간이었다. 어쩌면 세상을 배운 것 같다.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없구나. 내 맘대로 세상이 되는 건 아니구나. 좌절했었고, 방황했었고, 힘들었었다. 그 시간을 다시 갖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 시간이 없었다면 ‘다시’라는 것의 즐거움 내지는 소중함을 지금보다는 덜 알았을 거다. 물론 아쉽지. 그 좋은 젊은 날에 왜 아무것도 못했을까. 회사는 왜 나에게 그랬을까. 하지만 후회해봤자 시간은 이미 지나간 거잖나. 그 안에서 어쨌든 나는 성장 했고. 그리고 그 안에서 재미있는 가정생활도 했다. 젊은 시절에 뭔가를 만들어간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시간에 둘이 만들었던 많은 것들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좋은 시간이었다. 신혼생활을 만끽할 수 있는.

3년 동안 작품을 꾸준히 찾았나 보다.
찾았지. 그런데 제약이 많았다. 함께 일해 줄 수 있는 회사도 없었고. 두 번이나 사람에게 상처 받으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중간에는 ‘이러다가 우울증에 걸릴 수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더라. 정말 그랬던 시기였다. 그래서 다시 찾은 지금이, 너무 값지고 고맙고 그렇다. 요즘 뒤 늦게 너무 재미있다. 나이 들어서 5춘기가 온 느낌이다.

2012년 3월 23일 금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2012년 3월 23일 금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    

12 )
exthunter
무대인사에서 봤는데 진정 여신급. 복귀해줘서 고맙습니다.   
2012-03-26 21:43
fyu11
오랜만에 봐도 이~~~뻐~! ㅎㅎ   
2012-03-25 20:51
tprk20
영화속의 그녀을 보고 있으면 왠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때문에....   
2012-03-25 02:03
mdj3186
한가인씨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무너무 아름다우세요~ 모든 남성들이 연정훈씨를 질투할만 하네요
해를 품은달도 너무 재밌었고 건축학개론도 좋던데~이렇게 좋은작품으로 앞으로도 많이 뵜으면 좋겠습니다   
2012-03-24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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