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수 감독의 <봉자> 이후 영화는 11년 만이다.
-그동안 영화를 하고 싶었는데, 많은 일들이 있다 보니 이제야 인사드리게 됐다.
얘기를 들어보니 전수일 감독과는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전수일 감독님을 처음 본 게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였다. 당시 <봉자>가 영화제에 초청되었는데, 박철수 감독님의 소개로 전수일 감독님을 만났다. 이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또 만나고. 알고 지냈던 감독이기는 했지만 작업은 처음이라 긴장을 좀 했다.
개인적으로 전수일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인가?
-물론이다. 그래서 참여한다고 했지. 특히 감독님 영화의 색감을 좋아한다. 잿빛과도 같은 음울한 영상이 인간의 상실감과 외로움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다른 인터뷰를 보니 전수일 감독님이 극중 ‘핑크’라는 색깔을 ‘우수(憂愁)’라는 의미로 해석했던데.
-극중 핑크는 페일 핑크다. 외로움이 느껴지는 색이지. 창백한 핑크라고나 할까. 영화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색이다.
<검은 땅의 소녀와>의 태백, <영도다리>의 부산 영도처럼, <핑크>의 배경이 되는 군산도 영화의 주된 분위기인 상실감과 외로움을 배가시키더라.
-극중 배경이 되는 곳이 군산 해망동이라는 곳인데, 폐가가 많은 산동네다. 폐가, 담쟁이 넝쿨, 잡초, 쓰레기 더미, 버려진 TV 등 시나리오에서 느꼈었던 정서가 그대로 이입됐다. 기가 막힐 정도로 최적의 장소였지. 영화의 주 무대인 선술집도 원래 있는 집이다. 어떻게 이곳을 찾았는지 감독님한테 물어볼 정도였다니까. 그냥 그 공간이 인도하는 데로, 연기를 한 것 같다.
선술집 ‘핑크’는 단순한 술집 이상의 공간으로 보였다.
-말하자면 병원 같은 곳이다. 환자들에게 약 대신 술과 노래, 대화로 상처를 치유한다. 해망동 사람들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에게 재개발은 절망 그 자체다. 타의에 의해 자신들의 삶터를 떠나야 하는 그들의 현실에 희망이 있겠나. 그들에게 핑크는 쉼터이자, 안식처다. 그리고 옥련(서갑숙)은 사람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돌팔이 의사지.(웃음) 환자를 치료하기 전 의사들이 가운을 입듯이, 옥련도 술집 문을 열 때 신성하게 몸을 닦아내고 마음을 정리한다. 옥련이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는 신을 대하는 자세와 동일하다. 돈이 있건 없건, 직업이 있건 없건 간에 모든 사람들은 고귀한 존재다. 그러나 세상의 찌든 때 때문에 편견이 생기고, 아픔과 외로움을 느끼는 거다. 어떻게 보면 핑크는 사람들이 살면서 묻은 세상의 때를 벗겨주는 신성한 공간이고, 그곳을 관장하는 사람이 옥련이라 할 수 있다.
옥련은 사람들만 보듬어주는 게 아니라 해망동이라는 공간도 보듬어 준다.
-극중 옥련은 시간이 날 때 마다 폐가를 청소한다. 폐가를 청소한다는 건 부질없는 짓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폐가도 하나의 인격체라 보는 거다. 소외된 사람에게 손 한 번 내밀어주는 것처럼, 누구도 찾지 않는 폐가를 보듬어 준다.
옥련은 대사보다는 표정이나 움직임으로 이야기나 감정을 전달한다. 시니리오를 읽고 연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전수일 감독님의 전작들처럼 <핑크>는 영상과 이미지를 펼쳐놓고, 이를 멀리서 바라보는 작품이다. 대부분의 연기자는 대사가 아닌 표정이나 움직임만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걸 힘들어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개성 넘치는 인물들을 맡았기 때문에 주로 과장된 연기를 해왔다. 방법은 하나. 예전 연기 방식을 아예 버리는 거였다. 촬영 내내 연기 같지 않은 연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자연스럽게 영화에 녹아드는 연기를 한 거다. 각 장면마다 감정을 쏟아내려는 욕심을 버리고, 인물이나 상황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임했다.
전수일 감독과의 호흡은 어땠나?
-감독님은 절대 설명을 하지 않는 분이다. 정확히 말하면 설명을 잘 못한다.(웃음) 감독님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영상이나 이미지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하더라. 그래서 촬영 전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나 스스로도 영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 때부터 감독님이 원하는 걸 알아차렸다. 왜 ‘거시기’라는 단어가 있잖나. 사전적 의미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것’인데, 감독님이 원하는 거시기를 이해하고, 거시기 하게 연기했다.
연기가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건 극중 옥련의 삶을 통해 실제 서갑숙의 삶의 고통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어서였다.
-<핑크>는 나와 유기체적으로 이어져있다는 느낌이 많이 든 작품이다. 그동안 고통과 상처를 많이 안고 살아온 내 과거가 옥련을 연기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술집을 열기 전 몸을 닦을 때 축 처진 젖가슴이나 뱃살, 여기 저기 고통의 흔적이 보이는 상처 등이 옥련의 삶을 대변한다. 말로는 설명되지 않지만 그 아픔이 잘 느껴졌다. 삶을 관망하듯 담배를 피면서 먼 바다를 바라보는 옥련의 모습도 있는데, 그 모습이 바로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기도 하다.
그 눈빛이 참 묘하던데.
-삶은 핑크 빛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거지.
-옥련은 몸으로 이야기 하는 인물이다. 삶의 고단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밤마다 술을 마시고, 일부러 자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옥련에 맞는 표정이나 시선처리가 되더라.
하긴 몇 장면은 눈이 충혈 되어 있더라.
-보였나? 사실 촬영장 들어가면 힘이 쭉 빠져서 고생 좀 했다.(웃음)
옥련의 삶을 유추할 수 있는 인물 중 하나는 자폐아 아들 상국(박현우)이다.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에서 최민식씨가 끌고 다니는 여행 가방처럼, 상국은 옥련에게 있어 버릴 수 없는 삶의 짐이다. 또한 살아가는 목표이기도 하다. 상국은 누구보다 순수하다. 계란을 갯벌에 버려진 냉장고에 넣으면 새가 될 거라고 철석같이 믿는 아이다. 꿈 또한 갈매기처럼 하늘을 나는 거다. 옥련은 항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아들을 따뜻하게 품는다. 극중 상국이 옥련의 젖을 빠는 장면은 모자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 장면 촬영 당시 상국 역을 맡았던 박현우군이 어색해 할 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걱정을 안 할 수 가 없었지. 현우의 연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기 위해 리허설 할 때부터 가슴을 오픈했다. 리허설임에도 내가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니까 현우도 잘 따라왔다. 자폐아 연기가 쉬운 게 아닌데, 잘해줬다.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는 재능이 있더라.
상국 말고도 핑크에서 일하게 된 수진(이승연)은 옥련이 돌봐야 하는 또 한명의 인물이다.
-수진은 어렸을 적 친부의 성폭행으로 상처를 안고 사는 여자다. 수진은 옥련에게 자신의 속내를 말하지 않지만, 옥련은 뭔가 아픔이 있는 여자라는 걸 알았을 거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남자들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볼 때 어렴풋이 느끼는 거지. 촌구석 선술집까지 흘러들어왔을 때는 사연이 있기 마련이니까.
옥련은 그런 수진에게 예전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수진에게 핑크를 맡긴다.
-물론 그것도 있겠지만,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상국이나 핑크를 돌봐줄 사람이 수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옥련은 재개발 반대 농성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우는데, 그 때마다 수진이 그의 역할을 대신한다. 홀로 있는 상국과 놀아주며, 저녁마다 핑크의 문을 연다. 옥련은 평생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수진이 세상에 소외되고 슬픈 사람들의 심정을 더 잘 알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핑크를 맡겼을 거다.
-배설에 대한 질문은 부산국제영화제때 GV(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도 받았었다. 감독님은 별 뜻 없이 그냥 한 거라고 말하더라.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옥련이 터널이나 폐가에서 소변을 보는 건 영역 표시라고나 할까. 거리낌 없이 소변을 본다는 건 그 만큼 자신에게 편안한 장소라는 뜻도 된다.
과거 얘기로 돌아가 보자. 그동안 영화나 TV에서 볼 수 없었던 이유는 1999년도에 나온 책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의 영향이 컸다. 당시 자전적 성고백서였던 책 때문에 사회적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책을 썼던 건 인간 서갑숙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그리고 오랜 시간동안 외로움과 싸워야만 했다. 힘든 시간동안 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문제의 근원은 나한테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생각해보면 당시 사람들의 시선을 회피한 게 문제였다. 남들에게 이해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책을 썼기 때문에 나름대로 기대감이 컸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정 반대로 사람들은 질타했고, 그로 인해 상실감이나 외로움을 더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지금은 힘든 시기를 벗어난 상태다. 이제는 그 때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잊어버리게 되더라. 그 일을 통해 한 단계 성숙한 거지.
개인적으로 <봉자>에서 맡았던 봉자 역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그 인물을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봉자라는 인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인물이라서 그렇다. 봉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김밥을 마는 거다. 그는 하루 종일 사람들은 어떤 김밥을 좋아할지, 어떻게 하면 더 맛있는 김밥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한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고, 한 가지 일에만 열심히 하는 그 모습이 너무 좋다. 봉자와 옥련은 성격이 다르지만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있다는 점은 닮았다.
2010년 연극 <남편이 냉장고에 들어갔어요>라는 작품에 출연했다. 이 작품을 보고 전수일 감독이 캐스팅 제의를 했다고.
-6년 만에 연극출연이었다. 어느 날 감독님이 공연장에 오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화 캐스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남편이 냉장고에 들어갔어요>은 권위적인 남편들에게 한 방 먹이는 세 아내들의 이야기인데, <핑크>와는 정 반대되는 블랙코미디 연극이다. 아마도 나에게 옥련 역할을 제의한 건 연극보다는 실제 삶의 모습과 상충되는 부분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최근 대학교에서 강의를 한다고 들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재미는 어떤가?
-신선하다. 내 딸들보다 더 어린친구들과 호흡하니까 기분이 너무 좋더라. 그리고 재미있다. 그러다 보니 매번 강의 시간을 오버하게 된다.
-차마 끝내달라고 말은 못하지.(웃음) 강의 제목이 ‘매체의 연기술’인데, 주로 이론이 아닌 실습위주다. 카메라 앞에서 실전 연기를 가르치는 거라 다들 관심 있어 하고, 열성적이다. 애들한테 그런 기회는 많이 없으니까. 현장에 가서 잘 적응할 수 있게 조언도 많이 해주는 편이다.
열성적으로 배우려는 학생들을 보면 보람을 느끼겠다.
-요즘 힘의 원천이 애들이다. 처음엔 강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지금은 잘 맞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오늘 교수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느낌인데.
-매번 남동생이 불만을 터트린다. 대화할 때 가르치는 투로 말한다고.(웃음) 알고 보니 동생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내 말투를 그렇게 느꼈다고 하더라. 계속해서 고치려고 하는데, 쉽진 않다. 이제부터라도 옥련처럼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줘야지.
연극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모노드라마다. 드럼, 북, 징 등 악기를 사용하면서 관객들과 소통하는 연극이 될 것 같다.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움직여서 체력이 문제인데,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히 할 거다. 그동안 오래 쉬었으니까.
2012년 3월 16일 금요일 | 글_김한규 기자(무비스트)
2012년 3월 16일 금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