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이런 말 듣게 되면, ‘아, 그렇구나.’ 생각하게 돼요. (웃음)
스크린을 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서 색다른 감상을 얻지 않을까 궁금하네요.
<파주>는 스크린으로 봐도 화질이 선명하지 않고 뿌옇잖아요. 현장에서 봤던 모니터가 굉장히 작아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감정적 표현들로만 오케이라 느끼고 갔죠. 배우들도 스크린을 통해 처음으로 모니터한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가끔씩 불쌍해 보이려고 한 말이 아닌데도 어떤 대사를 할 때 너무 불쌍해 보인다는 느낌이 든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었어요. 들고양이 같다는 말씀이 최은모에겐 굉장히 잘 어울리는 표현 같아요. 항상 눈동자에 누군가를 경계하는 게 드러나고, 조금은 불안해하기도 하잖아요. 어쩌면 은모가 불완전한 인간형, 불안정한 사람이란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눈빛을 통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표현하고, 그렇게 해야 했던 것 같아요.
최근 방영된 드라마 <탐나는 도다>를 비롯해서 <미쓰 홍당무>와 <파주>에서 연기적으로 좋은 평가를 얻었어요. 일단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겠죠. 하지만 그만큼 약간의 긴장감이 어깨에 지워진다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어요.
약간이라기 보단 너무! (웃음) 그런 칭찬 자체가 저한테 큰 응원이 되지만 사실 무섭기도 하고, 굉장히 큰 짐이 되기도 하니까요. 저는 아직 영화를 두 작품 밖에 못했고 이제 조금씩 뭔가를 보여드리면서 아직은 좀 혼나도 괜찮다고, 지금은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그런 얘기들을 듣게 되면 겁이 나요. 칭찬을 못 받아도 속상하겠지만 칭찬을 받아도 그런 생각이 들죠. 나중에 분명 큰 질책을 받을 때도 올 거라고 보거든요. 너무 큰 기대를 얻다가 거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면 어쩌나, 벌써부터 이런 걱정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주연을 많이 맡으셨던 선배님들이 작품을 선택하기 어려우실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은 분들에게 받은 연기적인 믿음과 신뢰를 저버릴 수 없는 입장일 테니까요.
시나리오를 보고 캐릭터를 접했을 때도 욕심과 갈등이 교차했을 것 같습니다.
<파주>를 선택할 때도, 아직 연륜이나 경험이 부족한 내가 이렇게 좋은 작품을 해낼 수 있을까 걱정됐어요. 만약 제가 못하면 7년 동안 써왔다는 이 시나리오가 망가지는 거고, 많은 분들에게 죄송한 일이 될 거 같아서 주저했죠. 이거 놓치면 후회야, 라는 욕심으로 염치불구하고 뛰어들었던 작품이죠. 아직 난 조금씩 공부하면서 가도 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내기도 했고요. <파주>덕분에 많은 분들에게 또 다른 용기도 얻을 수 있었죠.
일단 운명적인 타이밍이었던 거 같아요. 시나리오를 받은 게 <탐나는 도다>찍고 있을 때였고 촬영이 중단되기 직전 상황이었거든요. 만약 <탐나는 도다> 촬영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면 <파주>를 찍지 못했을 거에요. 그리고 <파주>를 찍으면서 <탐나는 도다>를 병행했다면 굉장한 영향을 받기도 했겠죠. 그런데 <파주>를 찍고 나서 다시 <탐나는 도다>에 복귀했기 때문에 저에게 <파주>는 서우라는 사람에게 들어온 운명 같았어요. 그때 제가 육체적으로도 마음으로도 고생하고 있었던 때이기도 했고요. 전 원래 미친 듯이 밝은 성격이거든요. (웃음) 힘들어도 겉으로 표현하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 마음을 잘 모르기도 하고요.
박찬옥 감독님은 서우 씨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봤을까요? 혹시나 그런 부분에 대해서 묻거나 추측해본 적은 없었나요?
박찬옥 감독님을 처음 뵙는 미팅 자리에서 힘든 넋두리를 했어요. (웃음) 그때 마음 고생이 너무 심했거든요. 물론 그땐 제가 최은모에 대해서 분석을 했다거나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을 때였죠. 박찬옥 감독님이 그런 제 모습을 보고 김중식처럼 저를 보살펴주고 싶은 동정심을 발견하셨던 것 같아요.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보단 제 이야기만 했거든요. (술에 취한 듯 혀가 꼬인 목소리로) “제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몰라요. 언니는 몰라.” 막 이러면서. (웃음)
이선균 씨가 간담회에서 그런 말을 했죠. 카메라만 돌아가면 사람이 변한다고.
(웃음) 제가 평상시에는 장난도 많이 치는데 은모는 워낙 저와 많이 다른 캐릭터다 보니까 카메라 돌아가면 은모가 돼있어야 하잖아요. 그런 면에서 어쩌면 제 이중성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선균 오빠인 거 같아요. 사실 버진이할 때는 제 일상이 워낙 버진이스러워서 카메라가 안돌 때나 돌 때나 다를 게 없었을 거에요. 예전에 처음 연기 시작할 때 한번 웃음이 터졌다가 슛 들어가도 제가 그걸 못 참아서 크게 혼난 적 있어요. “서우 집중 안 해?” 그렇게 따끔하게 혼난 덕분에 슛 들어갈 때 집중력이 커졌나 봐요.
방금 말씀하신 <탐나는 도다>의 버진은 서우 씨와 가장 닮아있는 캐릭터처럼 보입니다.
제일 가깝죠. 그렇지만 서종희도, 버진이도, 은모도 다 저로부터 시작한 캐릭터에요. 셋 다 저와 따로 있는 게 아닌 거죠. 감독님과 제가 같이 만들어나간 가상 인물이지만 어차피 다 저에요. 서우란 사람이 세 명 있다는 건 아니지만 어느 하나를 뺀 나머지는 제가 아니라고 말할 순 없는 거죠. 버진이가 저와 좀 많이 가까웠을 뿐이고, 저와 많이 달라 보이는 은모 또한 저의 한 모습인 거에요.
본인에게서 가장 쉽게 드러날 수 있는 캐릭터인지, 아니면 쉽게 드러날 수 없는 캐릭터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겠죠. 은모는 단지 후자 쪽 캐릭터였나 봐요. 그런데 <탐나는 도다>가 조기 종영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표했더군요.
감독님께서 그러셨어요. “야, 우리 조기 종영돼서 이렇게 매니아층도 생겼으니까 좋게 생각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래도 좀……(웃음)
흥행적 지표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회자되는 작품이 있죠. 어쩌면 <탐나는 도다>도 그런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미쓰 홍당무>나 <파주>역시 두고두고 이야기될 작품이 될 거라 생각하고요. 어쩌면 그런 작품에 출연했다는 것이 언젠가 배우로선 좋은 기회였다 말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 역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행운이 맞을 거라 믿어요. 그런데 한번 더 생각해보면 그런 작품에서 중요한 인물로 출연했지만 그때도 사실 저는 연기의 ‘연’자도 아예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연기할 때마다 현장에서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 창피할 정도로 부서지듯이 혼나고 눈물도 많이 흘렸거든요.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서 보이는 모습이 다가 아닌 거죠. <파주>에서도 스크린에 있는 최은모는 너무나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 뒤에서 연기했던 서우라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많이 배워가면서 찍었고, 많은 부족함을 느꼈죠. 그래서 그런 힘든 시간들을 끝까지 이겨냈고, 작품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힘이 나요. 뒤늦게 행운이라 생각하지만 그 행운을 갖기 위해서 많이 힘들었어요. (웃음)
사실 저희는 찍을 때 그런 느낌을 굉장히 많이 배제한 느낌으로 갔다고 생각했어요. 은모가 언니의 죽음을 의식하는 건 중식을 밀어내기 위한 방편이라 생각했고, 방패막처럼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묻으려는 심리가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또 한가지는 언니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계속 얘기해주는데도 그걸 믿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말조차 배제한다고 할까요? 감독님께서 선악을 왔다 갔다 하는 최은모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최은모라는 캐릭터의 모호함이 그런 정서에 일조하는 부분도 있었겠죠.
굉장히 모호하죠. 저는 솔직히 약간 음흉하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제가 이전에 했던 다른 캐릭터들은 연기적으로 굉장히 세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그런 게 독특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최은모가 오히려 더 독특한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너무나 모순적이고 반어적인 복잡미묘한 점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이니까, 이게 독특하지 않다면 무엇이 독특하겠어요. (웃음) 최은모는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사람이고 소위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캐릭터보다 독특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최은모를 연기하는 기분은 어땠나요?
연기를 하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죠. 평생 살면서 이런 캐릭터를 또 맡을 수 있을까? 박찬옥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 이상 그게 가능할까? (웃음) 은모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사실 많지 않을 거에요. 감독님께서 누구보다도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주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었고 그만큼 어려운 캐릭터였던 것 같고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까 정말 똑똑하게 얘기하는 거 같아요! 와, 내가 되게 이런 생각을 했나? (웃음)
말씀 잘 하시는데요. (웃음) <미쓰 홍당무>나 <탐나는 도다>에서 연기한 서종희와 캐릭터는 뭔가를 밖으로 드러내고 만들어가는 캐릭터였다면 <파주>의 최은모는 뭔가를 안으로 자꾸 삼켜야 하는 캐릭터였던 것 같습니다. 서사적 흐름도 궁극적인 것을 감춘 채 의심을 갖게 만들고요. 그러니 아무래도 앞선 두 캐릭터를 연기할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겠죠.
연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감독님께서 주신 디렉션이 많은 공부가 됐고요. 능동적으로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되라고 하셨거든요. “그냥 연기하지 않으면 돼. 네가 그냥 최은모여야 해. 그걸 보는 관객들이 네 연기를 단면적으로 받아들이더라도 그 가운데서 우리가 목표한대로 감정적인 요동치는 감정만 느끼게 만든다면 그게 맞는 거야. 네가 진짜 느끼면 그게 오케이야.” 이런 얘기를 하셨죠. 중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고, 너무 아프고, 그 사람 얼굴만 봐도 주체가 안 되는, 그런 은모의 감정을 제가 느꼈어요. <파주>에서 그걸 배웠죠. 그래서 그런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걸 보는 관객들이 느꼈을 거라고 생각해요. 만약 정말 못 느낀다면 제 연기에 문제가 있는 거겠죠?
아무래도 그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 없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답답함을 많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쩌면 최대한 표현하지 않는다기 보단 표현을 못 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표현하지 못하는 인물을 제가 그냥 맡았던 것뿐이에요. 은모는 슬퍼도 슬픈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인간인 거 같아요. 언니 무덤에 갔을 때도 은모는 슬퍼하고 있었고, 가슴 속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거 같은데 울지 않잖아요. 너무 담담하게, “그만 내려가요.” 하고 내려가는데 전 그 때 너무 짠했어요.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어떤 톤으로 말을 해야 할까, 이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게 꼭 명확하게 전달되는 것 같지 않더라도요.
종희나 버진이는 톡톡 튄다고 할까요? 굴곡이 굉장히 심한 캐릭터였어요. 좋은 연출과 스토리 덕을 본 것도 있지만 캐릭터를 오고 가면서 컨트롤해야 할 숙제들이 있었죠. 은모를 생각하면 그와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중고등학생에서 스물 세 살까지 성장하는 과정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더해지는 나이 대마다의 과정을 표현해야 했죠.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는 점에선 말을 하지 않고 표현하는 법을 생각해볼 필요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말수도 없어지고 밥도 잘 못 먹었어요. 제가 그런 사랑을 하고 있다 생각하니 밥이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한번은 3일 동안 거의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많은 스태프 분들 걱정을 끼치면서 촬영했던 적도 있었어요. 선균 오빠도 식사를 많이 못하시더라고요. 정말 가슴 아픈 사랑을 하는 은모처럼 제 모습도 그렇게 돼가고 있었나 봐요. 감정적으로 화가 났을 때, ‘악!’하고 소리 지를 수도 있겠지만 (담담하게) ‘알았어.’하고 말 때도 사실 화난 게 느껴지잖아요. 표현의 차이랄까? 이번에는 그걸 배웠고, 표현했던 거 같아요.
<미쓰 홍당무>에 이어서 <파주>에서도 교복을 입었네요.
심지어 광고에서도 입었어요. (웃음)
아까 말한 대로 <파주>에선 10대에서 20대까지의 나이 대를 표현해야 했으니까 교복을 입어야 했죠. 물론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사이에 외모적으로 큰 변화가 필요하지 않은 시기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겨도 될 문제였을지 몰라도 정작 연기하는 당사자로선 어떤 특별한 구분을 보여줘야 할 거란 의무감을 느꼈을지 모를 일이죠.
일단 최은모를 연기하면서 뭘 보여주려고 부담 갖지 말자, 뭘 하려고 하지 말자, 라 생각해서 어떤 특별한 고민은 옆에 놔두고 연기했던 거 같아요. 하지만 꼭 해야 할 숙제가 있었죠.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스물세 살까지의 성장배경을 보여줘야 하는데 사실 그 시기가 사람이 가장 많이 변할 때잖아요. 그리고 제가 중학교 때 찍었던 영상을 보면 지금 제가 말하는 것과 완전히 달라요. 고등학교 때도 또 다르고, 또 스물 세 살 때도 다르고, 너무나 많이 다른 거에요. 외형적으로 보기에도 전혀 다른 모습이 발견되기도 하고요. 사람은 똑같아도 조금씩 다른 느낌이 나야 할 것 같았어요. 게다가 <파주>는 리얼리티가 중요한 영화였기 때문에 그런 걸 외부적인 효과를 빌려서 과하게 표현할 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분장 팀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분장팀의 황현규 선생님께서 그런 제 고민을 인정해주셨던 부분이기도 하고요. 점점 머리가 커진다고 하잖아요. 중학교 때 별 생각 없던 아이가 점점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사물에 감정을 담기도 하는 거죠.
<파주>는 두 인물의 오해와 착오를 통해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전되는 사건을 그린 영화에요. 사랑이란 감정의 이타적인 영역과 이기적인 영역이 잔인할 정도로 발가벗겨지는 느낌도 들고요. 어쩌면 그만큼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것도 중요한 과제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사실 서우 씨는 경험적으로 사랑을 이해하기엔 아직 부족한 나이라서 그런 경험적 깊이에 대한 갈망이 생기지 않았을까 궁금합니다.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한번이라도 제가 누군가를 죽을 만큼 사랑해봤다면 좋았을 걸 싶더라고요. 누군가가 나를 떠나갈 때 내 팔다리가 찢겨나가는 것 같이 가슴 아프고 뼈저리다고 하잖아요. 배우는 그런 게 연륜인가 봐요. 나이가 많아서 연륜이라기보단 그런 경험이 많이 필요한 건가 봐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경험이 한번도 없는 거죠. 그게 너무 속상했어요. 그래서 영화 끝나면 정말 그런 사랑을 꼭 해볼 거야, 마음 먹었어요. 물론 금지된 사랑은 하고 싶지 않지만, (웃음) 누군가를 정말 뜨겁게 사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사람을 오랫동안 가슴 속 깊이 담아둘 수 있을까, 이런 사랑이 가능할까, 이렇게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 이게 사랑인 건 맞는 것일까, 확인하고 싶어졌거든요. 그래도 어쩌면 미성숙한 감정이 최은모를 연기하는데 있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기 때문에 가족을 배신하거나 양심을 어기는 사랑을 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아직 최은모 안에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미완성적인 순수성이 남겨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게 가능한 거죠. 그런 제 모습이 최은모에게서 보이는 거 같아요.
그 신을 찍을 때 정말 고생했어요. 원래 달아나기 전에 “형부를 잘 모르겠어요. 형부, 누구세요?” 이런 대사가 있었는데 감독님께서 그 대사를 쓰면서 닭살이 돋아서 빼셨다고 하셨죠. (웃음) 그냥 그 신에서 이미 은모의 마음이 정리된 거 같아요. 형부 앞에서 뛰쳐나가서 거리를 걸어갈 때, 형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느끼면서 ‘사랑하지 않을 거야. 너를 미워하는 방법을 찾아낼 거야. 널 밀어낼 거야.’ 그런 단호한 다짐을 하고 있고, 입술을 꽉 다물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그런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다음 신에서 언니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건 ‘난 너를 사랑할 수 없다’는 암시적 질문이기도 하고요. 나한테 말해달라면서 울부짖는데 그렇게 중식을 대하는 은모의 모습은 한편으로 초라해 보였어요. 어쩌면 중식에게 매달린 은모의 모습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컷이었던 거 같아요. 은모는 평생 중식에게 의지하면서 위만 쳐다보고 있었던 아이였고, 지금도 스물세 살이 됐지만 아직도 예전에 그렇게 살아왔던 은모를 벗어나지 못한 흔적이 보이고요. 일단 9년 동안 몰랐던 중식의 감정을 뒤늦게 알게 됐다는 게 은모에겐 막상 나쁘지만은 않았을 거 같아요.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게 단순히 기쁨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그런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니까요. 그렇지만 형부라는 사람이 처제에게 키스했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언니에 대한 배신적 행동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중식을 밀어내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거죠. 그런 많은 감정들이 공중전화 박스로 가기까지의 과정에서 조금 드러나는 것 같아요. 원래 키스신에서 은모의 감정을 보다 친절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지만 편집으로 잘랐어요. 수치심을 느꼈다거나 정말 이 사람을 떨쳐버리기로 마음 먹은 듯 보이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사실 <파주>가 설명적이거나 친절한 영화는 아니잖아요. 많은 분들이 상상하시기 나름이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많은 감정들이 돋보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해요.
사실 그 이전까진 은모 혼자 중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철저하게 감정을 숨긴 중식과 달리 은모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갈등하는 감정을 노출하니까요.
은모를 얘기할 때 의심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사실 은모는 다 알면서 듣고 있죠. 보험회사 직원이 직접 얘기해줘도 그걸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밀어내는 거 같아요. 그래서 중식을 의심하고, 그러면서도 그 사람 얼굴을 보면 자기가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고 그런 현실이 너무 미운 거에요. 그러면서 언니의 죽음을 다시 느끼게 되니까 언니 죽었을 때 얘기해달라고 말하는 거죠. 어쩌면 중식 입으로 “너 때문에 죽었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물어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약간 의심하는 감정이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다음에도 누군가는 분명히 얘기해주지만 은모는 그걸 듣지도, 믿지도 않죠. 끝까지 은모를 그게 사실이 아닐 거라 생각하고 떠나버리는 거에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이 현실이 너무 미운 거에요.
끝없는 자기 부정 같은 것 말이죠. 감정을 통해 선악을 구별 짓는 건 불필요하겠지만 그로 인한 가해와 피해의 상황은 발생합니다. 결국 오해나 착오로부터 발생하는 상황들도 그로 인한 피해가 되겠죠.
제가 어제 영화를 다시 보고 생각난 건데, 은모가 중식을 그렇게 만든 건 사실 중식이 감옥에 갇히지 않을 거란 확신 때문이 아닐까요? 중식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은모는 알고 있으니까요. 은모가 중식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떠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타적인 행위인 거죠.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에 그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하게 된 행위일 뿐이고요.
유배이자 보호에 가까운 거죠. 자신의 마음에서 밀어낼 수 없으니 물리적으로 가두는 동시에 철대위의 책임을 중식이 혼자 떠맡지 못하게 하는 기능까지 염두에 둔 행위랄까요.
철대위에서 중식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할 때, 은모는 ‘절대 그렇게 돼선 안돼.’라는 표정을 짓고 있어요. 제 가족이 너무 미워도 그 가족이 만약 경찰서에 있다고 하면 마음이 불편하잖아요. 은모에게 중식은 사랑하는 남자인 걸 떠나서 형부와 처제라는 가족이기도 하고요. 적합한 관계는 아니지만 그걸 내버려둘 최은모는 아닌 거 같아요.
적은 필모그래피만으로도 나름대로 인상적인 평가를 얻고 있어요. 앞으로 예상치 못한 굴곡을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과정은 스스로를 고무시키고 긴장시키는 결과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그런 기대들이 달갑지 않게 느껴지는 제가 미워요. (웃음) 스스로 능력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이런 과정을 노련하게 이겨내고 거쳐내면서 또 다른 모습으로 극복해나갈 수 있을 만큼 똑똑하고 강한 사람이 아닌 거에요. 그래서 서우라는 사람이 묵묵히 연기를 잘 해나갈 수 있는 배우다운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2009년 11월 8일 일요일 | 사진: 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