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예련은 1년 전과 변함이 없었다. <여고괴담-목소리>로 영화계 데뷔를 갓 치룬 이 예쁜 신인여배우는 모든 신인이 그렇듯 신인의 그 단내 나는 풋내를 풍기며 무비스트와 1년 전에 인터뷰를 했었다. 그 후 딱 1년 만에 다시 만난 차예련은, 여전히 그 눈에 띄는 외모와 긴 생머리를 고수한 채, 그때와 똑같은 향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올해 22살, 차예련은 배우보다 스타를 꿈꾸는 게 어울릴만한 나이이다. 자신의 생각을 용이하게 전달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큰 손동작과 주위 시선 아랑곳하지 않고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에선 그 또래 동년배들의 모습이 쉽게 겹쳐진다. 때문에 그때로부터 딱 1년이 지난, 지금쯤 차예련은 각종 의류, 모바일 CF를 점령한 신세대 스타가 돼있을 줄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남들도 다 그렇듯 당연히 그런 수순을 밟으면서 세속적인 연예계에 뿌리를 내리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었죠. 아직 나이도 어리니깐 발랄하고 예쁜 역할 맡아서 하지 왜 굳이 나이 많은 선배들 틈에 끼어서 만만치 않은 영화에 출연하냐고”
“스텝들하고 다른 배우 분들이 그랬어요. 예련씨는 다른 현장에선 못 견디겠다고. 이문식 선배님이 아빠처럼, 삼촌처럼 정말 많이 챙겨주셨거든요. 물론 다른 선배님들도 외진 곳에서 나이 어린 여배우가 추운 날씨에 고생한다고 많이 챙겨주셨지만 이문식 선배님은 유독 저를 예뻐해 주셨어요.”
그의 어떤 점이 현장에서 모든 선배 배우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게 만들었을까? 여기서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여고괴담-목소리>로 차예련과 같이 데뷔한 김옥빈, 서지혜는 그 싱그러운 외모와 연기자로서의 재능을 스크린이 아닌 브라운관에서 그 후 더 많이 선보이며 좀 더 빠르고 쉽게 스타 혹은, 배우로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물론 김옥빈은 <다세포소녀>라는 차기작 개봉을 기다리는 상황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의외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구타유발자들> 시나리오를 처음 본 순간 뭐랄까? 느낌이란 게 왔어요. 이런 영화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만들어지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그 독특함이 저를 매료시켰어요. 독특하다고 꼭 출연해야 하는 법은 없다고 주위에서 많이 그러셨는데 전 지금까지 제 선택에 후회 없어요”
가만히 다물고만 있어도 남들 보기에는 고집스럽게 보이는 그녀의 유별나게 작은 입술이 야무지게 질문을 되받아 치는 순간이다. 일순 차예련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그 풋내 나는 향기를 빌미삼아 그녀를 마냥 어리게만 보고 싶은 기자의 고집스런 착각임을 말이다.
<여고괴담>과 <구타유발자들> 사이에 생긴 1년이란 시간 동안 차예련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구타유발자들에 출연한 배우들은 영화 촬영이 끝난 후에도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그만큼 현장분위기도 좋았다는 소리겠지만 배우들 간에 끈끈한 정이 생겼다는 말일 게다. 그는 그 모임에서 총무를 맡고 있다. 회비는 무려 5만원! 세상 물정 모르는 나이 어린 처자에게 그것도 돈 적인 부분의 일을 맡긴 걸 보면 차예련은 현장에서 귀여움만 독차지 한 게 아니라 나름대로 신임도 톡톡히 받은 듯하다.
“제가 잘해서가 아니라 워낙에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 주셨어요. 선배님들 앞에서 어떻게 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어요. 쟁쟁한 배우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선배님들 연기 열심히 쫓아갔죠.”
나름대로 두 가지 질문의 답이 여기서 나온다. 차예련이 선배들한테 이쁨 받은 이유는 딴 데 없다. 못하는 걸 억지로 잘하는 척 안한데서 오는 솔직함과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겸손함 때문이다. 그건 차예련이 배우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기 전에 인간 됨됨이를 먼저 인정받았다는 말이 된다. 아무리 허구라도 스크린에서 배우는 캐릭터의 삶을 실제로 불러들여야 한다. 이 영화적 현실성은 배우의 실제 삶과 가치관 그리고 경험에서 복합적으로 결합돼 나온다. 갓 스무살을 넘긴 이 여배우는 나 홀로 외로이 빛나는 스타보다는 확실히 사람과 사람이 만나 관계가 생기고 거기서 인생이 만들어져가는 그 오묘한 과정에 더 재미를 느낀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그 재미가 배우로서의 삶을 지향하게 만들었을 테고. <여고괴담>을 시작으로 <구타유발자들>까지, 차예련에겐 이런 변화들이 생겼던 거다.
위에서 그는 선배들의 연기를 열심히 쫓아갔다는 말을 했다. 사실,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 너무 튀거나 처지지만 않는다면 신인이란 꼬리표는 쉽게 떨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만만치 않은 이 영화를 차예련은 촬영 전부터 꽤나 정확히 분석하고 있었고 인정이란 캐릭터를 세세하게 연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인정이가 교수를 따라 나간 이유는 이 인간이랑 밥 한번 먹어주면 뮤지컬 배역 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 까 싶은 마음이었을 거여요.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인정이는 순진하진 않지만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순진한 애였던 거죠”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린 저 느끼한 교수 영선(이병준)을 왜 인정이 만났으며, 정말로 영선의 징그러운 속내를 처음부터 몰랐나? 에 강한 의문을 품게 된다. 지역 토박이들의 진저리나는 폭력을 다루고 있지만 그 폭력을 폭발하게 만든 것은 인정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영화는 끝끝내 인정에 대해서 알듯 모를 듯 시원하게 풀어주지 않는다.
“키스씬이요? 생각보다 너무 더티하게 나와서(하하) 막상 저도 놀랐어요. 이병준 선배님(영선 역)은 딱 봐도 교수님이잖아요. 정말 그렇게 연기하실 줄 몰랐어요. 싫다는 인정 얼굴에 그런 식으로 침 발라가면서 연기하실 줄은 몰랐어요.(호호)”
차예련은 교복을 벗고, 어떻게 보면, 중간과정 없이 막 바로 성인연기에 도전했다. 낯설고 사나운 지역 토박이들 사이에서 그가 연기해야 했던 인정은 거친 세상에 내던져진 측은한 고아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느낌이야말로 그가 ‘구타유발자들’ 사이에서 폭력을 형상화시키는 교두보 역할을 했음을 방증하는 잣대일 것이다.
엄청난 연기내공을 가진 선배들은 외관상으로 차예련에게 어디 가서도 못 배우는 말 그대로, 산연기를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차예련은 자신이 알짜배기 연기만 배웠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한다. 그 스스로는 <구타유발자들>을 통해 겸손을 배웠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해야 할지를 배웠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결국 배우로서의 첫 번째 성숙의 단계를 무사히 통과했다는 사실을 그녀만 빼고 남들은 다 안다.
“지금도 길거리 다닐 때 선글라스 안 끼어요. 전 별로 변한 게 없는 듯해요. 아니다. 제 가치관이 달라졌어요. 온전히 한 편의 영화로 남는 영화가 너무 좋아졌거든요. 그렇다고 영화만 고집하는 건 아니고요. 이 영화를 하기 전에는 내 갈 길에 대해 확신이 없었는데 지금은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게 됐거든요. 확실히 가치관이 달라진 것 맞죠?”
차예련의 발랄섹시한 사진컷을 더 보고 싶으면 여기를!
글: 2006년 6월 5일 월요일 | 최경희 기자
사진: 권영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