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컨디션, 어떤가?
좋다. 사실 오전에는 힘들었다. 어제 시사회 끝나고 뒤풀이 하면서 무리했거든. 내가 술을 잘 못 마시는데, 테이블 돌아다니면서 한잔씩 얻어먹다보니 정신을 놨다. 집에 어떻게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술 마신 날은 또, 잠을 일찍 깬다. 2시간 정도 자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다. 오늘도 뒤척이다가 아침에야 한 시간 눈 붙이고 겨우 나왔다.
뒤풀이 분위기가 어땠길래 못 마시는 술을 그렇게 마신 건가.
영화가 별로라고 했으면 안 마셨을 거다. 그런데 다들 너무 잘 나왔다고 하니까.(웃음) 내가 기분을 타는 편이다. 기분이 좋아서 주는 대로 마시다보니 한 순간에 ‘훅’ 갔다.
살인참회 자서전으로 스타가 된 연쇄살인범 이두석을 연기했다. 영화로 확인하니, 이두석은 비밀이 참 많은 남자더라. 인터뷰 하는데 애를 좀 먹겠다 싶었다. 질문을 자칫 잘못하면…
스포일러 때문에? 맞다. 그래서 시사회 이전에는 스토리를 최대한 함구했다. 기자들이 “반전 있죠?”라고 물어보면, “없는데요…” 얼버무렸다. 왜냐하면 기자들도 영화를 볼 텐데, 괜히 영화에 대한 인상을 미리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시사회 이후에 기자들도 그렇고 블로거들도 그렇고, 다들 ‘반전의 반전!’이라는 얘기를 쏟아내더라.(웃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동안 입이 간지러워서 어떻게 참았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영화가 어떻게 보면, 마피아게임과 흡사하다. 범인행세를 하는 인물이 있고 이를 파헤치려는 사람들이 있고. 마파이게임 하는 느낌으로 이두석을 연기했다. 이 사람이 정말 참회의 반성을 하려고 나온 건지, 인기를 얻으려 나온 건지, 돈을 벌려고 나온 건지. 관객들의 궁금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스터리한 면에 초점을 맞췄다.
기자간담회 때, 이두석을 <프라이멀 피어>에서 에드워드 노튼이 연기한 사이코 패스와 견주어 얘기했다. 그런데 정병길 감독님 인터뷰를 보니, 감독님은 이두석을 <다크 나이트>의 조커처럼 그리고 싶어 한 것 같더라.
그래? 얼핏 들었던 것 같기는 한데,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그리고 조커는 완전 악역 아닌가.
왜, 조커는 고담 시민들을 대상으로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벌이잖나. 배 두 척에 폭탄을 숨겨놓고, 살고 싶다면 서로의 기폭장치를 누르라고 유혹한다. 이두석 역시 자신의 살인을 공표하면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살핀다. 그런 면에서 감독님이 조커 이미지를 떠올린 게 아닌가 싶다.
아, 그럴 수 있겠다. 사실 이두석의 캐릭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씬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출판사 여사장을 향해 “웃겨요? 살인마가 10명이나 죽여 놓고 자기 몸 관리하니까 웃겨요?”라고 일갈하며 공포를 조성하는 씬. 그보다 조금 더 섬뜩한 장면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게 편집됐다. 아쉽다. 조금 더 살인마 적인 강렬한 느낌을 보여줄 수 있었는데. 드라마에서와는 다른 강렬하고 소름 돋는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는데.
그럼. 집중하고 고민하지. 그리고 영화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잖나. 드라마는 생방송 수준으로 전달되는 쪽대본으로 인해 상황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하고 연기해야 할 때가 많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없다. 디테일을 살리며 연기할 수 있는 건 확실히 영화의 장점인 것 같다.
큰 스크린으로 본 자신의 모습은 어떻던가?
나쁘지 않던데?(웃음) 조명감독님이 신경을 써 주셨는지, 비주얼적으로도 흡족하게 나왔다. 그리고 큰 스크린에서는 뭐든 들통 나기 쉽잖나. 그래서 걱정했는데, 오히려 이두석이라는 섬세한 인물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됐다. 눈빛의 흔들림이라든가, 복잡 미묘한 미소라든가, 의문 가득한 눈빛이라든가. 섬세한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신경 썼다.
촬영 당시를 회상하고 있는 당신, 굉장히 즐거워 보인다.
어우. 지금은 추억이라 하는데, 당시에는 쉽지 않았다. 그때 생각하면 어쩔 땐 ‘욱’ 할 때도 있다니까. 감독님 때문에.(웃음) 감독님이 액션스쿨 출신이다. 그러다보니 액션에 있어서는 조금 무감한 게 있다. 우리 영화의 액션 난이도가 꽤 높다. 대본 보면서 ‘이게 과연 가능한 액션씬인가’할 정도였다. 달리는 앰뷸런스에서 승용차로 뛰어내리고, 이 차에서 저 차로 왔다 갔다 하고, 심지어 차 본네트 위에서 뒤엉켜 싸우고. 정말 상상이 안 가는 거다. 당연히 세트장에서 크로마키 대놓고 싸우겠거니 했다. 그런데 아뿔싸. 실제 달리는 차 위에서 싸우게끔 하는 거다. “시후씨 소화하기 힘들면, 스턴트맨으로 가죠”라고 하셨으면, ‘아, 이거 스턴트맨으로 교체해도 되는 거구나’ 했을 텐데, 그런 발언이 일체 없었다. 어쩌나. 직접 해야지. 그리고 배우가 힘들어하면 “괜찮냐”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그런데 와서 한다는 말이 “한 바퀴 더 돌죠!”(일동 폭소) 나중엔 서운하기까지 했다.
하하하. 서러움이 마구마구 느껴진다.
느껴지지?(웃음) 당신이 할 수 있는 액션은 배우도 쉽게 소화할거라 생각했나보다. 그건 아닌데. 그렇다고 투덜거릴 수도 없었던 게, (정)재영이 형도 너무 고생하는 게 아닌가. 선배가 비 맞아가며 고생하는 걸 보니까, 후배 된 입장에서 뭐라 할 수 없었다. 재영이 형은 또 후배가 말도 안 되는 장면 찍는 걸 보고, 본인도 힘들다 얘기하지 못하는 눈치였고. 그러고 보면 감독님이 지능적이야. 배우 심리를 잘 이용한 거지.(웃음)
정재영씨에게 “영화가 원래 이렇게 힘들어요?”라고 물어봤다고 들었는데, 이유가 있구나.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겠나.
물음에 대한 정재영씨의 답은 뭐였나?
“어, 원래 이래~”(일동 웃음) 당신도 안 그러면서.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제대로 치렀다. 수영복 차림에 가운 하나 달랑 걸치고 열흘간 와이어에 매달릴 줄이야.
안 그래도 궁금했다. 가운 차림으로 달리는 본네트 위에 매달린 심정은?
정말 추웠지~(일동 폭소) 감기 안 걸린 게 다행이다. 그래도 그건 수영장씬에 비하면 나은 거다. 수영장씬, 그건 정말… 그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야.(다시 함께 폭소) 한 겨울, 찬물에 18시간 들어가 있어 봐라. 정말 고통스럽다. 뜨거운 물은 기대도 안 한다. 미지근하게라도 데워줄 줄 알았는데, 참.(웃음)
감독님이 워낙 말이 없으시다. 낯도 굉장히 가리시고. 대화를 많이 하면서 했다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신기하긴 하다. 쑥스러워하시면서 시킬 건 다 시키시니 말이다.(웃음)
배우들은 고생했지만, 덕분에 보는 즐거움이 컸다. 영화 전체적으로 액션씬이 정말 잘 나왔다. 차 본네트에 매달린 카체이싱 액션씬은 창의적이기까지 했다.
맞다. 액션이 정말 잘 나왔다. 섭섭했던 마음이 막상 완성 본을 보니까, 사그라지더라. 감독이 고집이 있어야 작품이 잘 나오는구나, 했다.
영화에서 놀란 건, 의외의 B급 정서들이다. 조‧단역 캐릭터가 다소 비현실적이기도 했고.
코믹적인 요소들이 많다. 나도 놀랐다. 시나리오 상에서는 그렇게 많이 느껴지지 않았었거든. 개인적으로 더 마음에 든다.
호불호가 나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긴장이 조성되려는 찰나, 난데없이 유머코드가 불쑥 끼어든다. 그게 재미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긴장감을 와해시켜버리기도 한다.
그런 장치가 이 영화의 장점이라고 본다. 너무 긴장만 가지고 가면 관객이 쉽게 지치지 않나. 스릴러라고 해서 너무 무게만 잡는 건 아닌 것 같다. 취향에 맞지 않다고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많은 분들이 만족해하는 분위기다. 감독님이 웃긴 스타일이 아닌데, 이런 코미디 요소를 참 잘 넣으셨다.
영화는 매스미디어의 횡포와 외모지상주의를 은근히 꼬집고 있다. 이두석의 핸섬한 외모에 현혹되는 사람들을 통해서 말이다. 당신도 외모 덕을 본 적이 많을 것 같다. ‘내 외모가 참 고맙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지?
식당에 가면 아주머니들이 굉장히 잘 해 주신다. 반찬도 더 주시고.(웃음) 데뷔전부터 그랬다. 그런 관심들이 있어서 뭣 모르고 연기를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었으면 내 성격에 연기자는 꿈도 못 꿨을 거다. 어머니도 그러시더라. 내가 연기 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를 안 한 이유가, 내성적인 성격이 활달해 질 것 같아서였다고. 그래서 가만히 놔뒀던 건데, 계속 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셨던 모양이다. 내가 그래도 끈기가 있다.
어머니 바람처럼 성격은 많이 활달해 졌나?
그럼. 이제는 나에 대해 얘기하는 게 덜 어색하다. 초반에는 이런 인터뷰도 굉장히 쑥스러웠다.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내 얘기를 한다는 게 불편했었는데, 지금은 적응이 됐다.
사실, 오늘 만나서 놀랐다. 상당히 쾌활해서. 드라마 상에서는 뭐랄까…
실장님 스타일?
맞다. 무게 잡고 그러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다.
이렇게 즐겁게 얘기할 때도 있지만, 다운 될 때도 있다.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남자기자 분들 중에 가끔 뭔가를 캐려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럴 땐 아무래도 조심하게 된다. 그 외에는 솔직하게 얘기하는 편이다. 솔직한 게 좋지 뭔가를 숨기며 얘기하는 건 별로다. 음...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인터뷰로 만난 기자 대부분이 여기자다.
아마, “박시후 인터뷰는 제가 가겠습니다” 하는 여기자들이 꽤 있을 거다.(웃음) 그런데 아까, 당신에게 뭔가를 캐내려 했다는 거. 그게 어떤 건가?
여러 가지다. 연기적인 부분도 있고, 생활적인 부분도 있고. 아, 그런 분들도 있다. 자기는 도무지 모르겠다고. 시후씨가 여자들에게 왜 인기가 좋은지 모르겠다,고. 그런 질문을 받으면 사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는데, 어쩌라고.(웃음)
정말 그렇긴 하다. 내 주위를 살펴봐도 여자들은 박시후 하면 환호성부터 지른다. 그런데 남자들은 별 반응이 없다. 그건 당신이 남자들에게 매력을 충분히 어필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 일수 있다. 술‧담배 안하고 반듯해 보이는 이미지가 여성들에겐 판타지지만, 남자들에겐 반감이 될 수도 있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뜨거운 남자가 있다고 치자. 그걸 보면서 나도 그럴 때가 있다. “쟤가 왜 인기 있지?” 반대로 여자들이 “쟤, 별로야”하는 여자 연예인에게 남자들이 빠지는 경우가 있다. 결국은 같은 거다. 그건 동성에겐 안 보는 거다. 이성이 봐야 아는 어떤 매력인 거다.
남자들에게 더 지지받는 배우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나?
남자 팬들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하하. 그건, 취향의 문제니까. 내 외모 자제가 그렇게 남성적인 것도 아니고. 남자들은 ‘정말 남자답게 생긴 남자’를 선호하는 것 같다. 재영이 형 같은 스타일도 좋아하고.
구수하고 편한?
그렇지! 하하하. 함께 있으면 남자기자들은 재영이 형에게, 여자기자들은 나에게 집중 질문한다.
드라마 얘기를 잠시 해 보자. ‘서변앓이’를 낳은 <검사 프린세스>를 시작으로 <역전의 여왕> <공주의 남자>까지 ‘공주’, ‘여왕’같은 달달한 단어가 들어간 작품을 연달아 세 편했다.
제목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러네. 이번에 들어가는 드라마는 또 <청담동 앨리스>다.
<내가 살인범이다>를 통해 이미지 변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사실 변신에 대한 시도를 조금 늦게 했다는 생각도 든다. <검사 프린세스>와 <역전의 여왕>이 끝난 후, 또 멜로드라마 <공주의 남자> 선택했다. 멜로적인 이미지가 굳어질까 염려돼서, 다른 모험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공주의 남자>는 사극이라는 차별성이 있었다. 사극이 아니었다면, 안 했을 거다. 비슷한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소진 돼 버리니까. 신선한 맛도 없고. 그러던 찰나에 <공주의 남자>가 들어 왔다. 장르가 사극이고, 대본이 탄탄한 게 마음에 들었지만 김승유라는 캐릭터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초반은 한량 같은 컨셉이지만, 뒤로 갈수록 복수의 화신으로 바뀌는 인물이었다.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번 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왔는데, 처음에는 안 하려고 했다. <공주의 남자> 종용 이틀 뒤가 영화 크랭크인이었거든. 작품 끝나고 이틀 만에 다른 작품에 들어가는 게 어디 쉽나. 체력적으로도 버겁고. 그런데 캐릭터가 살인범이야. 살인범인데, 그 안에 드라마도 있어. 욕심이 났다. 내가 또 좋은 작품은 놓치기 싫어하는 게 강하다. 연기를 시작하고 자리를 잡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거든. 비중 있는 역할을 맡기까지 10년 정도의 시간이 걸려서 작품 욕심이 많다. ‘이건 기회인데. 이 작품 놓치면 후회 할 텐데’ 무리한 일정임에도 출연을 마음먹었다.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 영화라는 건 섣불리 해서는 안 되는 작업이구나. 왜냐하면 그 후로 1년을 놀았거든. 드라마 <결혼합시다> <넌 어느 별에서 왔니> 마치고 바로 영화 캐스팅이 된 건데, 당시 드라마 제의가 연타로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드라마를 한편 더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나는 영화를 선택했다. 몇 개월을 준비했을까. 촬영을 앞두고 갑자기 배우가 교체됐다. 인지도도 없고, 검증이 안 됐다는 이유로 하차를 당한 거다. 영화의 세계는 정말 냉정했다. 가족같이 지내다가도 한 순간 말 하나에 딱 바꿔버리더라. 이후 1년이란 공백기가 생겼다. 드라마를 하고 싶어도 타이밍을 놓쳐서 당장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치 않게 작품이 들어왔는데, 그것도 며칠 지나서 또 다른 배우로 바뀌었다.
조급해지지 않던가.
내 성격이 워낙 낙천적이다. 나쁜 일은 액땜했다 생각하고, 빨리 잊어버린다. 캐스팅이 엎어지면 ‘더 좋은 작품이 오겠지’ 하며 기다리는 편이고. 실제로 다음 날 다른 PD님에게 연락이 왔다. 나를 캐스팅 하고 싶었는데, 다른 작품에 먼저 캐스팅 돼서 포기하고 있었다고 하시더라. 그러다 내가 하차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연락했다고. 결과적으로 하차한 작품보다 더 비중 있는 역할로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다. 그때부터 한 단계 한 단계 올라 왔던 것 같다.
연기의 시작은 연극이었다. 사실 연극 무대 위에 서 있는 박시후가 잘 상상이 안 된다.
고향이 시골이다. 시골에서 상경한 후 처음 발을 디딘 게 연극 극단이었다. ‘이상파 극단’이라고, 아는 분을 통해 들어갔다. 연극 포스터 붙이고 초대장 나눠주며 지내다가 더블 캐스팅으로 덜컥 주연이 됐다. 연기는 못 했는데, 이미지가 깔끔하니까 시켜주더라고.(웃음) 굉장히 운이 좋았다. 그렇게 일단 프로필에 주연타이틀을 달았다. 이후 프로필을 더 쌓기 위해 엑스트라로 드라마에 출연했다. 그렇게 드라마 이름을 하나하나 프로필에 적어나갔는데, 그게 적지 않게 도움이 됐다. 왜, 프로필만 보고는 단역인지 뭔지 구분이 안 가잖나. 게다가 캐스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얘가 연극 주연을 했어. 생긴 것도 멀쩡해. 어디 가서 엑스트라 했을 얼굴은 아닌데?’ 보는 눈이 달라졌다.
역시, 외모 덕을.(웃음)
처음에는 제의가 들어오면 큰 역할이든 작은 역할이든 무조건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안 되겠더라고. 아무거나 하다보면 평생 단역만 할 것 같았다. 그때부터 배역 비중을 생각했다. 전화가 오면 “역할이 어떤 거예요?”부터 묻는 거다. 부잣집 아들이나, 안기부 요원, 주인공 옆에 있는 친구 같은 역할을 노린 거지. 그러다보면 감독님 눈에 들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자신의 가치를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어디를 가면 주목은 받았었거든. 뭘 하든 반응이 오니까, 자연스럽게 자신감이 붙었다.(웃음) 길거리에서 매니저 명함도 많이 받았다. 그때 왜 안 찾아갔는지 모르겠다. 나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뭣도 모를 때.
정말 부품 꿈을 안고 올라왔다. 탄탄대로를 걸으리라는, 자신감을 안고. 그런데 우물 안 개구리지. “넌, 배우해도 잘 되겠다”는 시골 어르신들 말씀 하나 믿고 올라왔으니, 몰라도 한 참 몰랐던 거다.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땅히 기거할 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당시 외삼촌이 방배동에서 헬스클럽을 운영하셨는데, 지하 통로에 음료수 박스를 쌓아두는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에 간이침대를 하나 놓고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는 그게 너무 행복했다. 땡전 한 푼 없이 올라와서 쉴 곳을 마련했다는 게,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게, 밤에 그 넓은 공간을 혼자 쓰면서 운동 할 수 있다는 게. 낮에는 극단에 나가고, 밤에는 운동하며 그렇게 생활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새벽에 잠들려고 하면, 누군가 철문을 쾅쾅 두드리는 거다. 운동 나오는 할아버지였는데, 5시에 나오는 게 아닌가. ‘쾅쾅쾅쾅’. 그 소리가 그렇게 공포스러울 수 없었다. 그렇게 1년 반을 생활하니까 살이 빠지는 거다.
잠을 못 자서?
못 자서. 잠을 못 자니까 사람이 사람이 아니더라. 그러다가 드디어 방을 얻게 됐다.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하숙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보증금을 찾을 수 없었다. 시골에서는 2~3일 여유를 주니까, 당연히 월요일에 줘도 되겠지 하는 마음에 가서 “문 좀 열어주세요” 했는데, 절대 안 열어주는 게 아닌가. 가져 온 짐들은 어떻게 하라고. ‘아, 서울이라는 곳이 이런 곳이구나’ 서울의 정서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PC방에서 밤새고, 다음 날 돈을 찾아서 방에 들어간 기억이 난다.
당신의 기억 중에 공소시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 있나? 그러니까 당신 인생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기억이 있다면?
아직은 없다. 당시에는 잊고 싶은 순간이었겠지만, 그 일이 없었으면 지금의 내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일까. 연기를 시작하고 나서, 다른 일을 해 보겠다,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앞만 보고 달렸다.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영화도 이번이 처음이고.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다보면, 언젠가 원하는 자리에 오를 수 있으리라 믿는다.
2012년 11월 10일 토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2012년 11월 10일 토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