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네. 낯 두꺼운 것도 비슷하고.(웃음) 그나저나, 영화를 봤다고? 시사회 전에 하는 인터뷰라 영화를 본 기자분이 없었는데, 봤다고 하니까 편하다. 즐거운 인터뷰가 되겠는 걸. 영화 어땠나?
아, 내가 도리어 인터뷰 당하는 건가?(웃음) 첫 공개 후, 1년이 지났는데 개봉이 늦어진 셈인가?
개봉이 늦어졌다기보다는, 후배급 영화다보니 이렇게 됐다. 우선 영화 자체가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이 목적이었다. 저예산이기도 했고. 촬영에 어려움도 있었는데, 권칠인 감독님 영화다보니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내 경우엔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 걱정도 많았는데, 스케일이 크지 않아서 오히려 부담을 덜었다. 그리고 운도 따랐다. 부산국제영화제까지도 나쁘지 않았는데, 갑자기 개봉이 결정되고, 상영관이 200개관이나 잡혔다. <실종> 때도 그랬는데, 시발점은 작았던 영화들이 이렇게 큰 결과로 돌아오니까,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가? 릴레이 인터뷰고, 이게 막바지라 지치기도 할 텐데, 그런 내색이 전혀 없다.
기자님들이 나를 너무 찾아주시니까~ (크게 강조하며)나~를!(웃음) 영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해서 그렇다. 나는 조금 특이한 경로로 연기자가 된 케이스다. 연기를 꿈꾼 아이도 아니었고, 단연을 거쳐 힘들게 데뷔 한 것도 아니거든.
길거리 캐스팅으로 데뷔 할 걸로 알고 있다.
응. 고등학교 때, 길거리 트렌드잡지에 사진이 찍히면서 이 길에 들어섰다. 연기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카메라 앞에 선 거지. 그러니까 연기가 매력 있는 거라는 걸, 데뷔를 하고 나서야 알았다. 연기자가 되고 나서야 연기에 대해 꿈도 꾼 거고. 그런데 어린 나이에 데뷔를 했기 때문인지, 역할에 한계가 있었다. 또, 어린 나에게 무슨 깊이 있는 연기를 요구 하고 기댈 했겠나. 딜레마에 빠져서 연기를 계속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다. 나는 호불호가 강한 편이다. 아닌 것 같으면 일찍이 다른 일을 찾자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 때 영화를 만났다. ‘방송국에서 ENG 카메라로 찍는 게 드라마고, 제작사에서 필름으로 찍는 게 영화다’ 이거 딱 두 개만 알고 있는 무식한 아이에게, <사생결단>이라는 영화가 들어왔다. 느와르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말 미친 듯이 했던 것 같다. 그 때 영화가 이런 거구나, 느낀 거지. 아~ 내가 원했던 게 이거였어! 내가 꿈꾸는 배우가 이거야! 더 놀라웠던 건, 아직 배우라고 말하기 부족한 나에게 기자님들이 영화배우라는 수식어를 달아주시더라. 이제야 영화를 알 것 같은 아이에게, 상도 주고. 그런 관심에 부끄럽지 않도록,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런 에너지를 전달해 주고 싶은 나에게, 인터뷰는 좋은 중간 다리다. 그래서 인터뷰를 즐기는 편이다.
나는 못했다. 안 했다. 그러니까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내가 소화를 못하는 건 안 한다. 예를 들어 <미인도> 같은 경우, 신윤복이라는 역할을 한 번 정도는 탐냈을 수 있잖나. 그런데 한 번도 그런 마음이 안 들었다. 이제야 영화가 뭔지 감을 잡은 내가, 극 전체를 끌어가는 역을? 무리수를 두고 안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조선 최고의 기녀 설화가 끌리더라. 나는 내가 못한 것에 대해 변명하는 거 되게 싫어하고, 후회하는 거 되게 싫어한다. 내가 잘할 수 있을 때, 준비가 돼 있을 때 하자, 고 생각했다.
그 느낌이 온 게 <참을 수 없는.>이었나.
<참을 수 없는.>을 20대에 만났다면, 공감을 못했을 거다. 명원(극중 친구의 남편을 연기한 정찬)이라는 인물에게 뭔가 느껴가는 지흔의 마음을 20대 때 어떻게 이해했겠나. 100일 기념일 챙기는 게 중요한 20대에 말이다.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는 건, 불륜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글쎄. 멜로? 경린(한수연)과 동주(김흥수)는 모르겠지만 지흔과 명원은 멜로라고 한정지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걸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됐기 때문에 이 영화에 공감했다. 그리고 30년을 살아 온 추자현이가 지흔이라는 친구에게 그리고 내 또래 관객들에게 뭔가를 알려 줄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서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30대 중후반 언니들에게도, 내가 뭔가 ‘점. 점. 점.’을 알릴 수 있었으면 했다.
말했듯, 명원과 지흔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단순 사랑은 아니다. 가장 친한 친구의 불륜을 지켜보고 난 후에, 지흔의 감정이 조금 더 변하는데, 연민도 있었을 것 같다.
맞다. 그런데 명원에 대한 연민은 “아니, 저 남자, 지 와이프는 바람피우는데, 그것도 모르고 바보처럼!”이런 류의 단순한 감정은 아니다. 지흔이라는 인물은 거침없이 앞만 보고 가는 아이다. 낯 두껍게 신혼인 친구 집에 들어앉고, 실력도 안 되는데 작가를 하겠다고 한다. 그에 비해 의사인 명원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아내와 토끼 같은 아이를 낳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는 인물이다. 그렇게 완전히 다른 두 인간이 만났는데, 이게 남녀 관계다 보니까 여러 가지 미묘한 감정이 들어선 거다.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지흔이 “당신 왜 그러고 있냐~ 빨리 달려가라.”고 하니까, 명원이 “누구한테? 내가 달려가면 어디로 달려가야 하는데?”라고 한다. 거기에서 지흔이 “네?” 하고 말문이 막히는 거지. 내가 옳고 그가 답답하다고 생각했던 지흔이가 명원이를 통해서 “아, 내가 정답이 아니구나.”를 알게 된 거다. 그 사람을 통해 자극을 받으면서 오묘한 감정을 느끼는데, 이게 사랑인지, 연민인지, 혹은 그 이상의 감정인지 헷갈리고 20대 때에는 막말로 호감이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30대는 그게 쉽게 안 되는 나이다. 그런 복잡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고자 싶었고, 그래서 이 영화를 멜로라고 단정 짓고 싶지 않다.
영화는 은근히 결혼에 대해 옹호적이지 않는 자세를 취한다. 의사와 결혼한 품절녀 경린은 누가 봐도 결혼을 잘 한 케이스지만, 실상을 보면 그렇지 못하다. 보통 우리는 좋은 직장을 가진 남자와 결혼한 친구들에게 결혼 잘 갔다고 하는데, 그러한 생각에 경종을 울리는 셈이지.
약간 빗나간 답변이긴 한데, 주위에 결혼한 언니들이 많다. 어떤 언니 같은 경우는 남편과 정말 친구같이 산다. 그런데 이 언니는 나에게 “야~ 다 필요 없어. 남자는 역시 돈이야. 제발 돈 많은 남자 만나!” 이렇게 말한다. 반대로 경쟁력 있는 남자에게 시집간 언니가 있다. 그 언니는 “역시 남자는 나를 이해해주고 챙겨주는 사람이 최고야!”라고 한다. 그걸 보면, 결혼은 해도 고민 안 해도 고민, 이라는 아주 단순한 멘트가 인생인 것 같다. 그리고 또 결혼 안 한 언니들은 “너 예쁠 때, 남자 많이 만나. 일? 일 다 소용없다, 너” 이러는데, 결혼을 일찍 한 언니들은 “야, (결혼)할 수 있으면 늦게 해!” 이런다. 이런 얘기를 가장 많이 듣는 게 30대인 것 같다.
부담은 크게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즐기니까. 즐긴다는 게 뭐냐면, 나는 내가 어떤 게 부족한지 잘 알거든.
부족? 뭐가?
많지. 예쁜 것 빼고는, 다?(웃음) 농담이고, 연기도 많이 부족하고, 영화에 대한 이해도 아직 부족하다. 대신 나는 모르는 건 빨리 인정하는 편이다. 모르는데 아는 척 하는 걸 안 좋아 한다. 그리고 실수 한 건, 바로 바로 인정하는 스타일이다. 확실하다고 믿는 건, 아예 행동으로 보여줘 버리는 식이지. <참을 수 없는.>과 이전 작품의 가장 큰 차이는 이거다. 이번에는 내가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다는 거. 지흔이를 통해서 표현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거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부족하더라도 그거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표현하자는 생각으로 즐겼다. 아마 내가 다 잘 하려고 했으면, 오히려 많은 걸 놓쳤을 거다. 앞으로도 이 마음 자세는 놓치고 싶지 않다. 40대가 된 배우가 갓 입문한 신인 보다 더 못하는 게 있다고 생각하니까.
결혼 적령기의 여성들이 보면 공감할 부분이 많은 영화다. 권칠인 감독님이 ‘여자들에게 있어서 30대는 선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나이’라고 말하던데 공감이 갔다.
미혼 직장여성과 전업 주부인 지흔과 경린. 가장 기본이 되는 여성군이다. 그 중 지흔이는 2010년이기 때문에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캐릭터다. 요즘은 딸이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가도 부모님이 터치를 크게 안 하시잖나. 옛날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지. 거기에다 담배 꼬나물고 다니는데, 이런 주인공 캐릭터는 2010년이니까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경린이라는 인물은 예전부터 항상 있어 왔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들도! 닫혀 있다고 생각했던 그녀들도 그들 나름대로, 장바구니 들고도 나이트클럽 가서 놀 건 다 논다는 거지. 왜? 그들도 끼들이 다 있으니까. 그게 잘못 된 게 아니라는 걸, 영화는 두 여성을 통해 보여준다. 공감할 부분이 많으니, 30대 여성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
제작보고회 때, 모든 배우들이 가장 에너지 넘치는 사람으로 당신을 지목했다. 지금 인터뷰 중에도 그 에너지가 느껴지는데, 혼자 있을 때도 그런가?
아니다. 많이 다르다. 출연 계약을 한 후, 시간이 없었다. 촬영 들어가기 전까지, 주어진 시간이 2주 정도 됐나? (김)흥수랑 (정)찬이 오빠는 그 때 처음 봤고, 감독님을 뵌 것도 서너 번 밖에 안 됐다. 지흔이를 맡기로 한 이상, 연출자에게 지흔이를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소스를 주는 게 정답이라고 봤다. 그런데 아직도 여배우라고 (손을 얌전히 모으며)이러고 있어?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어떻게 하겠나. 지흔이가 돼야지. 그래서 감독님 만난 첫 날부터 술 마시고, 망가지고, 필름도 끊기고 그랬다. 소스를 막 던져준 거지. 그리고 나는 “큐” 하면 연기하고, “컷” 하면 바로 풀어지는 그런 건 못 한다. 드라마라면 가능할지 모르겠다. 브라운관이기 때문에 얕은 수나 순발력이면 커버가 되니까. 그런데 영화는 큰 스크린으로 보여 지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가는 바로 들통 난다. 특히 요즘 관객들 눈이 얼마나 높나. 그래서 큐가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지흔이로 살려고 했고, 그러다보니 지흔이처럼 에너지가 넘치는 인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때는 완전히 끽하고 죽어 있었다. 일단 마약 중독자의 느낌을 살리는데 주력했고, 행여 황정민, 류승범에게 누가 될까봐 열심히 했다. 또 콘티 보는 법도 몰랐기 때문에 영화 현장을 많이 배우려고 했는데, 그게 너무 좋은 게 아닌가. 한 컷을 찍기 위해 스탭들과 한 시간을 상의하는 그런 것들이 너무 신선했다. 왜 드라마는 찍어대기에 바쁘잖나. 주연 배우가 다음 스케줄이 있으면 빨리 보내줘야 하는 시스템에 있다가 영화라는 걸 만나니, 아유~ 너무 행복했던 거지. 반면 <실종> 같은 경우에는 역할이 역할인지라, 스탭들과 한 번도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미인도>는 개봉 날짜가 정해져서 촬영에 들어간 영화다보니 빨리 찍고, 바로 홍보를 해야 해서 정신이 없었다. 그 때 내가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건, 현대적인 장소에 가지 않는 거였다. 산에 올라가서 가채 올리고 연기해야 하는데, 촬영 전날 와인바 가서 와인 마시면, 그 연기가 나오겠나. 나는 “기생 연기를 위해 가야금을 배웠다”거나, “신윤복을 연기하기 위해 그림을 배웠다” 이런 건, 연기를 위해 노력한 거라고 생각 안 한다. 그건 노력이 아니라 당연히 갖춰야 하는 거고, 중요한 건 디테일이라고 본다. 지흔이를 연기하기 위해서 막걸리를 끊임없이 마신 것도 나만의 노력이라니까~(웃음)
(웃음)친한 친구들 같은 경우에는 당신이 밝은 역을 맡았으면 좋겠다, 생각 하겠다.
작품에 따라 분위기가 많이 변하니까, 지인들은 밝은 걸 하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다중적인 면이 있다. 내 안에 내가 몇 개인지 모르겠다. 중국에 다녀 올 때도 정말 많은 애들을 담아가지고 온다. 홍콩 말 하는 애, 대만 말 하는 애, 이런 식으로(웃음). 선답인데,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하나는 정말 코믹한 거. 그냥 바라만 봐도 웃긴 거 있잖나. 송강호 선배가 아무리 진지한 연기를 해도 일단 미소부터 나오는, 그런 걸 해 보고 싶다. 또 가슴 아픈 연기에 대한 욕심이 있다. 중요한 건, 슬픈 게 아니라, 가슴이 아픈 거다. 두 가지는 다르다고 보거든. 영화에서 슬픔 감정들은 많이 보인다. 예컨대, 가족의 죽음 같은 것들. 그런데, 심장이 아픈 연기는 쉽게 볼 수 없다. 기회가 오면 그런 역을 해 보고 싶다.
내 생각에, <미인도>의 설화는 슬프다기보다 가슴이 아픈 역이었다.
맞다. 내가 그런 얘기를 했다. 여자가 미술을 못 하는 시대에 태어나서 여성성을 버리고 미술을 택한 신윤복의 아픔과, 사랑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기생이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설화의 아픔은 다르지 않다고. 그걸 표현하고 싶었는데, 내 씬이 너무 작아서 힘든 게 있었다. 결국 표현하고 싶은 건 많은데, 시간이 없다 보니 의욕이 앞서 버렸다. 표현하기에 급급하다 보니, 튀는 부분이 있더라.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걸 좋아하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자현아, 너무 오바했다”고 자책했다.
가마 씬이었나? 김홍도(김영호)를 향해 “여자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대사 했을 때. 그 때 눈이 빨갛게 됐었는데, 그 임팩트가 굉장했던 기억이 난다.
그건… 그건 ‘이제야 말할 수 있다!’인데, 눈이 빨갛게 된 건, 연기가 아니라 우연이었다. 제작부 이것들이 가마 안에다가 왁스칠을 해 놓은 게 아닌가. 그것 때문에 눈이 너무 매웠다. 원래는 눈물은 고이는데 얼굴은 웃는, 그런 장면을 연기하고 싶었다. 일반 규슈였다면 울면서 아프다고 했겠지만, 외유내강인 설화는 그 상황에서도 울지 않았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눈물을 참았는데, 너무 맵다 보니까 결국 눈이 충혈됐다. 현장에서는 모니터가 작아서 몰랐는데 시사회에서 보니까 진짜 빨갛더라. 당시 만나는 기자님들마다 그 씬에 대해서 물었었다. 심지어 CG로 처리 한 게 아니냐고 묻는 기자님도 있었다. 왁스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연기자의 ‘가오’가 있어서 당시에는 “여자의 피눈물이다” 이랬지.(웃음)
전혀! 둘 다 아니다. 이상하게 강하고 임팩트 있는 캐릭터에 끌린다. 그런 캐릭터를 잘 해 냈을 때, 묘한 쾌감이 있다. <실종>의 경우 작품적으로는 논란이 있었지만, 그런 연기를 언제 또 해 보겠나, 하는 생각이 있었다. 이미지 때문에 하고 싶은 걸 안한다는 건, 모순이 있잖나. 이런 연기는 강해서 안 하고, 이건 안 예뻐서 안 한다? 그럴 거면 배우가 아니라 연예인을 해야겠지. 트렌드에 맞게 예쁜 옷 입고 가서 “안녕하세요” 해야겠고.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내 자신을 다 버리고 캐릭터에 몰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40대에도 임팩트 있는 걸 표현할 기회가 오면 주저 없이 할 거다. 예를 들어 <마더>의 김혜자 선생님 같은 역할. <바람난 가족>에서 노출을 강행한 윤여정 선생님 같은 역할을 할 거다. 우리는 그런 걸 하고 싶어서 배우를 선택한 게 아닌가. 그게 아니면, 돈이나 광고를 찍기 위해서 했겠지. 나는 배우 추자현이고 싶다.
예전, 지금의 이미지를 가지기 전에 당신은 <카이스트>가 만들어 놓은 중성적인 이미지와 싸워야 했다. 그게 발목을 잡기도 했던 걸로 아는데, 어땠나?
그 때는 딜레마에 빠졌었다. 나는 <카이스트>라는 드라마를 열심히 한 것 밖에 없는데, 그 캐릭터를 보고 많은 분들이 “너는 그런 애야”라고 매정하게 단정 짓더라. 인생을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스무 살짜리 어린 아이에게 말이다. 특히 방송은 이미지라는 게, 굉장히 크게 작용하는 시장이다. 그런 딜레마 속에서 고민 할 때, 영화라는 해방구를 만났다. 물론 지금도 이미지라는 것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다. 센 이미지 때문에 역할이 선뜻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고민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데, 중요한 건 그 때의 이미지 각인과 지금의 이미지 각인은 다르다는 거다. 예를 들어 그 때는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만 연기를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나이였고. 그런데 지금은 내가 먼저 감독님에게 작품에 대해 얘기 할 수 있는 나이가 됐고, 노하우가 생겼다. 이미지 때문에 슬럼프에 빠질 시기는 지났다.
당신만큼 배우 이미지의 중요성을 통감하는 배우도 드믈 것 같은데, 배우에게 이미지는 뭐라고 생각하나?
배우에게 이미지는 포장지다. 그런데 그 포장지, 굉장해 중요하다. 속이 꽉 찼는데 포장지도 화려하면 너무 완벽하겠지. 하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포장지는 화려한데, 속이 텅 빈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뭔지 아나? 사람들은 안에 든 내용물을 기억하지, 포장지는 크게 기억하지 않는 다는 거다. 포장지는 아주 짧다. 그래서 이미지만을 좇는 배우가 되고 싶지 않다.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온 것 같은데, 그래도 묻고 싶다. 사실 드라마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이하 ‘<신불사>’)출연은 의외였다. <신불사>에서 맡은 역은 조연이었다. <실종>으로 생애 첫 주연을 맡은 상황에서, 바로 조연을 선택하다니. 쉽지 않는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
사실 드라마 쪽은 마음을 접었었다. 영화를 계속 하고 싶었는데, 마땅한 시나리오가 없더라. 나를 써주는 분이 없기도 했고. 가슴 아픈 얘기지. 어쨌든, <신불사>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출연을 결정한 이유는 되게 단순하다. 주인공 송일국씨의 어릴 때 헤어진 여동생역인 미수라는 역할에 딱 꽂힌 거지. 여형사라는 직업도 마음에 들었지만, 남매인 줄도 모르고 사건에 엮이는, 그런 비극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 드라마가 16부작이었으면 안 했다. 그랬다면, 나에게까지 순서가 안 왔을 테니까. 이제 그 정도는 보는 눈이 생긴 것 같다. 원래 미수라는 역할은 후반에 나오고, 24부작이니까, 막판 마무리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에 오케이 했다. 그런데 회당 계약금을 많이 안 준다고 해서, 우리 대표님이 통으로 계약 한 게 약간 문제였다. 많이 나오든, 적게 나오든 그 돈이 그 돈이니까 제작사에서 1부부터 나를 돌리기 시작하더라. 더 웃긴 건, 내가 앞부분에 한 씬 두 씬 나왔는데. 그게 예고편에 다 나오더라고. 솔직히 스트레스도 받았다. 주위에서 “추자현, 저거 왜 해?” 하는 시각도 있었거든.
거기에 참여 할 수가 없었던 게, 그러면 주인공 여동생이라는 게 까발려져 버리는 거잖나. 그러다보니까 갈 수 없었다. 주위에서 여러 말들이 있었지만, 내 선택을 믿기로 했고, 선택한 걸 제대로 해내려고 했다. 또 뒷부분은 잘 해낼 자신도 있었고. 다행히 마무리를 잘 해 줬다는 소리를 들어서 만족한다.
인터뷰를 하다보니, 문득 당신 인생은 예측이 잘 안 되는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공감한다. 나도 모르겠다. 어디로 갈지. 내가 다음 작품에서 어떤 친구를 만나서 어떤 얘기를 할지, 나도 궁금하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배우 추자현을 주목하기 시작한 건, <사생결단>이다. 당신은 개인적으로 어떤가. 만약 당신 작품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작품 하나를 추천해야 한다면, 어떤 걸 할 텐가?
<참을 수 없는.>! 연기를 잘했다 못했다, 작품이 좋다 나쁘다, 기대작이다 아니다, 를 떠나서 내가 뭔가를 알고 찍은 영화 같아서 <참을 수 없는.>을 추천하고 싶다. 예전에는 “이번 영화 잘 나왔어요.”, “이번 영화 기대해 주세요.”, “앞으로 예쁘게 봐 주세요.” 이런 말을 안 했다. 그런데 이번에 생각이 달라진 게, 나라는 아이에 대해 스스로 기대가 생겼다. 뭣 모르고 연기를 시작해서 먹고 살기 위해 연기를 했던 애가, 이제야 비로소 연기가 뭔지를 알고 느낀 거지. 선입견이라는 게 빠르게 전파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저의 창피한 과거를 잊어 주세요”라고 하긴 힘들다. 창피하다는 건, 다른 게 아니라 내가 몰랐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다. 몰라서 어색한 부분들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의 저를 지켜봐 달라고 말하고 싶다.
2010년 10월 21일 목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2010년 10월 21일 목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