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와 <육체의 약속>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작품이라면 김태용 감독의 <만추>를 꼽을 만하다. 한국에서 가장 잘 생긴 배우 현빈과 <색,계>(2008)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탕웨이(그녀는 직접 부산을 방문해 개막식 레드카펫을 밟았다.)의 동반출연으로 화제를 모았다. 게다가 이만희(<만추>(1966)), 김기영(<육체의 약속>(1975)), 김수용(<만추>(1981))에 이은 네 번째 리메이크라는 점에서 올해 한국영화의 최고 기대작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이번 영화제를 통해 김태용과 김기영 감독의 작품이 동시에 소개된 까닭에 동일한 이야기가 어떻게 네 번이나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간접적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만추>와 <육체의 약속>은 특별 휴가를 받은 여죄수가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던 중 정체가 묘연한 남자를 만나 서로에게 잠시간의 위안이 된다는 내용을 공유한다. 그것은 이만희의 작품도, 김수용의 작품도 별 반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시대를 달리하며 다시 만들어지는 이유는 무엇보다 주인공 남녀의 전사(前史)가 희미하게 다뤄지는 탓에 감독이 개입할 여지가 넓다는 게 주요한 이유다. 남모를 사연 빼면 뭐 하나 제대로 소유한 것 없는 텅 빈 유리 같은 인물들을 감독 각자의 개성에 맞춰 채워가는 구조의 연출은 누구라도 탐낼만한 소재인 것이다. 실제로 김기영 감독이 숙영(김지미)에 이어 훈(이정길)까지, 어떻게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추적해 들어간다면 김태용 감독은 중국인 애나(탕웨이)가 남편을 살해한 후 자기처럼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는 한국인 훈(현빈)을 만나 상실감으로 텅 빈 마음속에 뜨거운 점 하나를 찍는다는, 원작에 가까운 내용을 보여준다.
쓸쓸함을 캐릭터로 내세운 도시는 많지만 그중 시애틀은 비와 안개, 그리고 자살로 유명한 도시라는 점에서 인간의 고독을 묘사하기에 이곳만큼 적당한 도시를 찾기 힘들다. 김태용 감독은 흡사 에드워드 호퍼의 황량한 도시 풍경을 연상케 하는 구도 속에 삶의 동력을 잃은 애나의 우울한 소외를 포착하는데 주력한다.(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만추> 간의 상관관계는 영화 개봉 즈음 더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이처럼 <만추>가 도시 속에 갇혀 헤매는 인간의 절대 고독을 응시하는 것과는 반대로 <육체의 약속>은 ‘늦가을’(晩秋)의 풍경을 인물에게로 흡수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이 또한 미술 작품에 빗대어 설명이 가능한데 <만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라면 <육체의 약속>은 텅 빈 거리에 휘날리는 낙엽이 화면을 꽉 채운 수채화의 풍경 속에서 극중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 한국 영화계에 리메이크 시도가 심심찮게 이뤄지고 있다. 김태용의 <만추>는 대표적일 뿐만 아니라 시대를 달리하며 리메이크가 시도된 작품의 계보를 잇는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하게 자리매김한다. 특별히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함께 공개된 <만추>와 <육체의 약속>은 한국영화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긴밀하게 이어져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사례다. 과거의 감독과 영화를 현재에 다시 거론하고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3인의 자객>과 <아웃레이지>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가장 인기를 모은 두 편의 일본 영화는 미이케 다카시의 <13인의 자객>과 기타노 다케시의 <아웃레이지>이었다. 워낙 거물급 감독의 작품인데다가 한국에도 많은 팬을 보유한 이들이기 때문에 두 편의 영화에 대한 관객 반응은 역시나 뜨거웠다. 다만 영화 상영 후 이어지는 관객의 평가는 상이했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는 오랜 영화 경력이 빚은 매너리즘을 돌파하는 두 감독의 방법론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결과라는 사실에 비춰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실은 지난 몇 년 동안(보다 정확히는 <이조>(2004) 이후) 미이케 다카시는 예전의 악동스러움을 잃고 평작과 졸작 사이를 오가며 위태로운 행보를 보여 왔다. <13인의 자객>은 다행히 그의 걸작은 아닐지언정 오락영화의 진수를 선보이며 미이케 다카시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이끌어낸다. 140분의 상영 시간 중 1/3에 해당하는 50분을 마지막 전투씬에 할애하며 박진감과 비장미 사이에서 오락의 진수를 뽑아내고 무엇보다 현실에 대한 은유로써 극중 전쟁을 들여다보는 그의 안목은 주목할 만하다. 타인의 죽음에서 희열을 얻는 영주와 이에 잔인하게 희생되고 고통 받는 평범한 백성의 일상을 교차하며 전쟁에 미친 세태에 이게 대체 모하는 짓이냐며 일갈하는 것.(미이케 다카시는 주인공 신자에몬(야쿠쇼 코지)이 폭군의 목을 베는 장면에서 떨어져나간 목이 똥간으로 굴러가는 것으로 설정, 죽지 않은 악동의 면모를 과시한다.)
이처럼 미이케 다카시는 (<13인의 자객>으로 판단컨대)말초적인 감각 대신 마음을 울리는 감정을, 검의 잔인함보다 펜의 부드러움이 연상되는 연출력으로 이제는 거장의 시기에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하나비>(1997) 이후 여러 장르를 전전하며 창작의 고갈에서 허덕였던 기타노 다케시는 <아웃레이지>를 통해 본인의 주특기였던 야쿠자 세계로 귀환했지만 여전히 안쓰러운 예술가의 초상을 보여준다. (2편에게 계속)
2010년 10월 22일 금요일 | 글_허남웅(영화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