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를 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8월과 크리스마스를 섞어놓은 제목에 호기심을 느끼며, 흔한 멜로이겠거니 했지만,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회화의 콜라주 기법처럼 이질적인 8월과 크리스마스가 만나 멜로영화 역사에 새로운 발자취를 남긴 것이다.
그리고 3년 후, 허진호 감독은 '봄날은 간다'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 영화 역시 장르는 멜로다. 그러나, 제목의 범상치 않음만큼이나 상투적인 멜로는 절대 아니다. '봄날은 간다'는 전작 '8월의 크리스마스'와 스타일 적으로 일관돼 있다. 정물화의 느낌을 주는 고정된 한 컷 한 컷, 인물들의 삶을 한 걸음 물러서서 관조하는 자세, 일상을 담담하면서도 세밀하게 담아내는 연출력, 서민적 배경, 주인공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 마당과 마루가 있는 집, 스케일의 미니멀리즘, 계절의 변화 등.
이 두 영화를 본 후 가진 공통된 느낌은 시간은 가고, 일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나간다는 것이다. 죽음과 이별의 아픔은 시간의 흐름을 막지 못하고, 일상에 파묻혀 잊혀진다. 그렇다면 현실에는 꿈이 없는 것 아닌가? 모든 게 담담하게 지나간다면 삶의 의미란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나? 그러나 허진호는 꿈이 있는 곳을 알려준다. 그곳은 추억이다. 사람은 추억을 간직하므로써,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된다.
허진호 월드에는 사랑을 이어주는 독특한 모티프가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주차단속원으로 일하는 다림은 매일 비슷한 시간에 단속차량을 찍은 필름을 맡기러 정원의 사진관을 찾는다. 사진이라는 매개를 통해 둘은 만나고 사랑의 느낌을 공유한다. 정원이 찍은 다림의 사진은 정원과 다림의 사랑의 징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봄날은 간다'의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와 지방 라디오 방송국 아나운서 은수는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기 위해 만나고, 함께 소리를 채집하는 과정에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이처럼 사진과 소리는 남녀를 이어주고, 둘의 사랑을 심화시키는 촉매 작용을 한다.
허진호 감독은 두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일관된 스타일과 톤을 보여주고 있다. 현란한 편집이나, 효과를 쓰지 않고 우리 주변의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또한 카메라 움직임이 많지 않은 롱테이크의 화면과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 서정적 멜로디의 음악과 편안한 자연의 소리는 관객의 마음에 소박한 울림을 준다.
필자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서 선조 문인들이 읊던 시조의 나른함과 단아함, 화선지 위에 그려진 수묵화 여백의 넉넉함을 느낀다. 영상의 톤은 바삐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느낄 수 없는 고향의 포근함과 평안함, 차분함이다. 그러면서,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국 사람의 가족애와 안타까움, 한의 정서 담겨있다. 이처럼 허진호 영화에는 한국 고유의 요소가 담겨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정원이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다림을 유리 너머로만 지켜봐야 하는 심정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숭고한 사랑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8월의 크리스마스'는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아름다운 우화이다. 반면 '봄날은 간다'의 상우와 은수는 사랑이 일상화 돼가면서 이별을 맞게 된다. 죽음과 같은 극적인 상황이 사랑을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일상으로 퇴색하는 변화로 인해 이별에 이른다. 이런 사랑의 과정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봄날은 간다'는 '8월의 크리스마스'보다 보편적이고 사실적이다. '봄날은 간다'는 이처럼 보편적인 사랑의 과정을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영화를 본 관객이 상우와 은수의 사랑이 자신의 경험과 비슷하고 자신의 일인 것만 같다고 털어놓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쨌든 두 작품은 사랑의 형태와 과정이 다르지만, 이별과 이별 뒤에 남은 추억으로 매듭을 짓는다. 결말은 추억으로 인해 낙관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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