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칸느 영화제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영화 괴물이 드디어 관객들에게 포문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 관객의 반응은 두가지로 나뉘고 있다. 하나는 한국영화에 있어 신기원을 이룩한 괴물영화라는 관점이고, 다른 한 관점은 "살인의 추억"과 비교하여 내공이 떨어진다는 관점 - 혹은 칸느가 왜 이 영화를 주목했는지에 관해 의구심을 가지면서, 언론플레이에 낚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이렇게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뉜다.
-
바야흐로...여름 영화계의 승자는 과연 누가 될지 참으로 궁금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 "괴물"은 액션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비주얼로 승부하는 여타 괴물 영화가 아니다. Piranha나 Alligator,Godzilla와 같은 괴물을 묘사한 작품들은 괴물의 모습과 더불어 괴물이 사람 혹은 사회를 어떻게 파괴하는가 하는 괴물이 주축이 된, 액션 위주의 시퀀스를 보여준다. 괴물의 활약으로 인해 사람 또는 사회를 얼마나 처참하게 유린해가는가를 즐기는, SFX의 진보를 향유케 하는 것이다. 오락적 재미 혹은 극대화된 인간 상상력의 비주얼을 관객은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괴물의 활약, 비주얼에 포커스를 맞춘 영화는 아니다. 물론 봉 감독이 봉테일이라는 닉네임을 지녔듯이, 영화 속의 괴물은 한국영화에서 제일 진보된 비주얼로 관객들의 시선을 잡기에 충분하다. 괴물의 생김새와 몸놀림은 다른 외국 영화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을 비주얼을 지닌다. 하지만 그는 괴물이라는 보조장치를 통해 다른 이야기 하기를 원하고 있던 것이다.
만일 비주얼적 감각으로만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다면, 이 영화는 전자의 관점으로 승부했을 것이다. 얼마나 잔혹하게 사람을 해칠 것인가, 첨단 무기 혹은 탁월한 액션으로 보는 이들을 시원하게 만들 것인가에 주목하고 이 영화를 관람한다면, 분명 김빠진 탄성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을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서두에서 밝힌 관객 반응 중 후자에 속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Aliens와 같은 괴물 액션 영화는 아니다!
- 그렇다면 가족애를 다룬 영화인가?
이 영화에는 분명히 CG와 SFX가 적용되긴 했지만, 괴물영화 특유의 시각적 쾌감보다는 봉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현실의 이야기를 보다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한 보조장치로, 심하게 표현하자면 괴물의 존재 이유도 봉 감독의 의도를 전하기 위한 보조장치인 것이다.
무엇을 그는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제일 먼저 관객들의 눈에 띄는 이야기는 모래알 같았던 가족들이 현서를 되찾기 위해 벌이는 과정에서 동질감을 회복한다는 코드를 제일 먼저 찾을 수도 있다.
현서가 실종되어 임시분향소에 모이게 되었을 때 가족들은 모두 모이게 된다. 하지만 결합이 쉽지 않았음은 변희봉이 분향소에서 던진 말을 통해 언급된다. 그리고 분향소에서는 둘째 박해일이 맏형 송강호를 질책하며 분향소가 난장판이 되는 모습을 그린다. 그간 형제 사이, 오누이 간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또 한강 매점에서 저녁 끼니를 때울 때 맏형인 송강호를 두둔하는 언급을 할 때 동생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모래알 같은 가족구성원들의 관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기투합해 나가게 된다. 가족들은 하나하나 현서를 찾을 실마리를 풀어나가게 되고 마침내 결실을 맺는다(?) - 결실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그것까지 밝히면 완전 Spoiler 되니까 생략하겠다.
하지만 가족들이 해결책을 추구하는 방식은 역할분담을 통해 의기투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의 살아오던 방식을 통해 전개해 나간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연락이 끊기게 되면 노심초사 하는 모습은 묘사되지만, 배두나와 송강호, 박해일이 전개하는 해결방식이 의기투합의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종반부에 가서 송강호와 동생들이 어떻게 교류하는지는, 또한 어떻게 우애를 다져갔는지는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 오누이들이 각자 갈 길을 가겠구나 하는 추측만 들게 한다.
- 무엇을 그리고 싶었던 영화일까? -Ⅰ
봉 감독이 가족애가 전부인 영화를 묘사하고팠다면 - 그리고 내가 감독이었다 하더라도 - 영화는 다른 관점으로 묘사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아니 적절히 타협하는 방식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렇다면 그가 그리고자 했던 이야기는 무엇인가? 첫번째는 집단 시스템과 개인의 역학 관계가 아닌가 싶다.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집단과 개인과의 관계는 상호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집단이 개인을 억압하는 시스템이다.
바이러스 감염 우려 때문에 병원에 격리수용되어 있던 차에 새벽에 날아든 현서의 목소리, 송강호를 취조하던 경찰이 송강호의 신고를 정식으로 받아들이고 통화권추적만 하였더라도 가족들이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을 상황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공권력에 도전한다는 식으로 박해일에게 으름장을 놓으면서 송강호의 증언은 묵살 된다.
그 전에 분향소의 유가족들에게 행해졌던 방역당국의 행태를 보라. 가족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원인 모를 바이러스 감염을 우려하여 분향소에서 강제로 송강호를, 그리고 유가족들을 병원에 격리수용하는 작태는 분명 집단의 권력이 개개인의 인권 위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그것도 모자라서 검역소에서 송강호를 마취한 후, 마취가 덜 된 상태에서 강제로 조직 샘플을 채취하는 장면과 - 전두엽을 조사하기 위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강제로 머리에 구멍을 내는(이 장면은 의도적으로 생략기법을 사용한다) 시퀀스는 관객들에게 차라리 고문을 연상케 만든다.
집단의 억압적인 태도가 영화 속 괴물보다 더 악마적으로 느껴짐은 나만의 발상일까? "브이 포 벤데타"와 조지 오웰의 "1984"를 염두에 두고 삽입한 영화적 코드일까?
- 무엇을 그리고 싶었던 영화일까? -Ⅱ
386세대였던 봉 감독에게 前 Chapter에서 묘사한 집단의 억압은 생소함이 아닐 것이고, 그리고 싶었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집단 악에 항거하는 자유의지의 힘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집단 악만 묘사된다면 변희봉 이하 다섯 명의 가족들은 단순히 희생양에 불과했을테니 말이다.
집단이 억압했을 때 - 예를 들면 분향소 유가족들은 격리수용 되었을 때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주인공의 가족들은 시스템 안에 안주되길 원하지 않았고 현서를 찾기 위한 명분 하에 탈주를 감행한다. 이후 송강호와 박해일은 어떠한가? 구속의 수마가 다가올 때, 그리고 Lab室에서 두 형제는 빠져나온다.
뭐하나 내세울 것 없는 변희봉과, 똑똑함과 빠릿빠릿함은 결여되었을지 몰라도 딸을 향한 사랑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지극했던 송강호, 백수건달인 박해일, 전국체전 양궁 동메달리스트인 배두나라는 보통 사람들을 통해, System의 일원이되 그 체제의 억압에는 굴복할 수 없는, 무너지지 않는 인간 자유 의지를 - 잃은 가족을 되찾아야 한다는 당위성 아래에서 묘사하고 있다.
- 무엇을 그리고 싶었던 영화일까? -Ⅲ
집단 악, 인간의 자유 의지와 더불어 눈에 띄는 코드는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는 점을 묘사한다는 사실이다. 맨 처음 장면에 어떤 장면이 나오는가? 영화상 설정에서 4년 전 독극물을 한강에 방류하도록 만든 원인제공자가 미군이다. 한국인 부하는 부당한 명령임을 알면서도 이를 실행한다.
그뿐인가? 바이러스 보균자(?)가 포위망을 뚫고 펄펄 활개치고, 괴물은 잡힐 기미라곤 도무지 보이질 않고... 이런 상황에서 국제사회는 한국에 보건 시스템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개입한다는 작위적 의도가 보인다.
한국 땅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한국인이 풀지 못하면 누가 푼단 말인가? 하지만 영화에서는 괴물의 원인 제공자도, 국제사회의 어설픈 개입자도 한국이 아닌 미국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송강호가 바이러스 감염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실험을 시행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과연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미제국주의? 아니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오만함?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는 설정은 영화 "한반도"하나면 족하다. 한미 FTA협상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코드는 관객들이 어떻게 바라보길 원했던 것일까?
- 정리하면서
가족애가 포함되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닌 영화가 어제 관람한 "괴물"이다. 그리고 필자가 바라본 세 가지 코드를 본론에서 나름대로 기술해보았다. 뭐, 이 세 코드 말고도 다른 몇몇 코드가 숨어있을 법하지만 분명 괴물이 다가 아닌, 괴물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투영케 만드는 영화이다.
글을 맺기에 앞서 이 영화의 단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병원에서 - 연구실에서 - 그리고 추적해오는 형사들의 손길을 매번 미꾸라지 같이 빠져나오는데 - 한두번도 아니고 세 번 이상이나 - 영화처럼 법망을 빠져나온다는 게 그리 녹록치 않은 현실이다. 그리고 수많은 경찰과 군인이라는 공무원은 허구의 장치다. 문제를 해결하는 이들은 가족들 아닌가? 물론 감독이 묘사코자 하는 이야기를 그리기 위해 스토리의 전개를 무사통과 식으로, 혹은 공권력은 호구(?)라는 설정으로 지속적으로 그리는데, 이러한 발상은 현실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위험을 알아차려야 한다. 관객들의 눈은 예리하다.
관객들이 살인의 추억에서의 사회의 부조리함을 실랄하게 표현했던 Well-Made의 향수를 기대하고 이 영화를 바라보는데, 이 영화는 이 영화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그 맛을 비교음미하려 한다면 분명 -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에서 식스센스와 같은 기막힌 반전만 바라고 다른 코드는 뒷전에 두는 관객과 같이 - 이 영화를 본 후 실망하고 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