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이금용 기자]
극중 전국구 밀수왕 ‘권 상사’ 역을 맡아 분량이 많진 않지만 큰 임팩트를 남겼다.
어느 날 류승완 감독님에게서 새 작품에서 두 주인공 ‘춘자’(김혜수)와 ‘진숙’(염정아) 사이에 가교가 되어줄 인물이 필요하다고 연락이 왔다. 류 감독님과 나 정도 사이가 되면 비중이 크고 작은 건 중요하지가 않다. (웃음) 어떻게 해야 영화가 잘 나올지가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조연이라 해서 소모적으로만 쓸 분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고, 또 왜 내가 ‘권 상사’를 맡아야 하는지 분명한 이유를 제시했기 때문에 출연을 결정했다. 사실 분량이 더 많았더라면 스케줄 때문에 출연도 못했을 거다.
당시 스케줄이 어땠나.
코로나19로 <모가디슈>(2021)의 개봉 일정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고, 개봉과 홍보 일정이 계획보다 늦어졌다. 그래서 <모가디슈> 홍보와 <밀수> 촬영이 겹치게 됐다. <밀수>가 끝나자마자 디즈니+ 오리지널 <무빙>을 바로 들어갔고 중간중간 예능 프로그램 <어쩌다 사장2>을 찍었다. 그리고 <어쩌다 사장2> 일정이 끝난 다음 다시 <무빙>으로 복귀했다. (웃음) 다행인 건 <밀수>와 <무빙>이 둘 다 같은 제작사 작품인 데다 강풀 작가님과 류 감독님이 친분이 있어서 서로 양해를 해준 거 같다. (웃음)
<모가디슈>에 이어 류승완 감독과 두 번째 작업이다. 두 사람의 친분이 상당한 듯한데.
<모가디슈> 촬영 당시 4, 5개월 정도 한인 교민이 두어 명밖에 없는 모로코의 외진 동네에서 지냈다. 워낙 한국인이 없다 보니 우리끼리 똘똘 뭉쳐서 지냈다. 힘든 일이 있으면 혼자 먹으려고 숨겨놓은 순댓국이나 소주를 나눠먹기도 하고, 그런 게 다 정이 됐던 거 같다. (웃음) 그때 함께했던 스태프들이 <밀수>에서도 같이 작업해서 반갑고 좋았다.
우선 ‘권 상사’의 강렬한 첫 등장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웃음)
너무 ‘등장!’ 외치는 느낌이라 민망해서 고개를 못 들겠더라. 하하! (웃음) 이런 식의 터치는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비열한 거리>(2006)부터 <더 킹>(2017), <모가디슈>까지 그간 영화에선 얼굴을 신경 쓰지 않거나 오히려 못생겨 보이게 분장하는 경우가 더 많아서 이렇게 빛나는 터치를 받으니 민망하더라. 감독님이 나더러 본인 소싯적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더니, 사심이 반영됐을 수도 있고 그날따라 내 얼굴 상태가 더 좋았을 수도 있다. (웃음) 무엇보다 <모가디슈>가 상황에 초점을 맞춘다면 <밀수>는 인물 중심의 영화니까 그런 연출법의 차이가 ‘권 상사’를 더 돋보이게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멋져 보였다면 감독님의 의도적인 연출, 그리고 김혜수 선배 덕분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권 상사’가 처음 등장할 때,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춘자’의 리액션이 엄청나지 않나. (웃음) 사실 ‘권 상사’는 김혜수 선배가 만들고 키운 캐릭터라고 봐도 무방하다. 당시 코로나19 때문에 회식도 없었고 따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촬영 전날 만나서 리딩하고 촬영을 바로 시작했다. 긴장이 덜 풀린 채로 촬영에 들어가야 했고, 김혜수 선배가 현장에서 계속 독려를 해 주시더라. 김혜수 선배의 사랑을 받으면 없던 것도 나온다. 이상한 힘이 나와서 찍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극중 ‘권 상사’도 ‘춘자’ 없인 존재할 수 없지만 나 또한 김혜수 선배가 없었더라면 그 정도 연기를 못 뽑아냈을 거다. (웃음)
‘권 상사’와 ‘춘자’ 사이의 묘한 기류에 궁금증을 느낄 관객이 많을 거 같다.
김혜수 선배와의 투샷이나 연기하는 모습에서 그런 기운이 보여진 것 같다. 하지만 둘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해서 관객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싶지는 않다.
완벽하고 강력한 빌런은 이미 이 영화에 존재하고 있고 나는 그 캐릭터와 겹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권 상사’에게 좀 허술한 면을 부여한 거다. 등장할 때부터 ‘춘자’에게 못된 짓을 하지만, 그래도 ‘저 사람이 그렇게 악랄한 사람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라는 빈 구석을 만들어 주는 거다. 이런 계산 하에 ‘권 상사’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갔다. 품위 있게, 덜 양아치스럽게, 그리고 매너 있게, 단면적으로 만들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야 관객들이 이 캐릭터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비열한 거리>(2006)의 ‘병두’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도 있다.
둘 다 깡패라는 점에서? (웃음) 만약 내가 ‘병두’를 연기했던 20대에 ‘권 상사’ 같은 연기를 하려고 했다면 그 질감이 절대 안 나왔을 거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어서 좋은 게 이런 점이다. 어차피 나이 드는 걸 막을 수는 없으니 경험과 연륜이라는 세월이 주는 이점을 잘 활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이대에 맞는 향기가 있다고 할까. 최근엔 ‘안티에이징’보단 ‘웰에이징’에 신경 쓰고 있다. (웃음)
나이가 잘 든다는 건 어떤 걸까.
배우로서 나이가 잘 든다는 건, 좋은 경험이 많이 쌓였다는 거다.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관객들과 신뢰를 잘 쌓은 거라고 생각한다. 신뢰가 쌓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왕성하게 활동할 수 없었을 거다. 신뢰가 쌓였기 때문에 내가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됐고, 더욱 자유로워졌다. 작은 역할이어도 가벼운 마음으로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제일 좋다. 또 무슨 일을 하든 여유로워지고 웃음이 많아졌다. 곤란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과거 경험을 떠올리면서 해결해나갈 수 있는 여유 같은 거 말이다. 그 덕에 어떤 순간에도 웃을 수 있다. 이 시간을 위해 30대를 치열하게 산 거 같다.
‘웰에이징’을 위해 인간 조인성으로서 노력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워라밸’을 지키려고 한다. 영양제를 챙긴다든가 10시 이후엔 전화를 받지 않고, 최대한 12시 전엔 잠들려고 한다든가. (웃음) 예전엔 연락이 오면 새벽이라도 뛰쳐나가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만한 체력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웃음) 이젠 내 시간을 내 뜻대로 보내려고 한다.
워라밸을 지킨다고 하기엔 ‘워크’의 비중이 많이 높은 듯한데. (웃음) <밀수>를 시작으로 디즈니+ <무빙>이 다음 달 공개되고, <어쩌다 사장> 시즌3도 곧 미국에서 촬영에 들어간다.
공백에 대한 두려움이나 강박이 있는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웃음) 예전엔 스타들에게서 신비주의가 트렌드였다면 이젠 그 흐름이 좀 달라진 거 같다. 코로나 사태가 터졌을 때 대중과 소통할 방법이 없어지더라. 가만 있을 순 없으니까 내가 먼저 다가갈 방법을 찾았고 그게 예능이었다. 개인적으로 SNS는 너무 어렵고, 예능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제작 기간이 짧으니까 안방으로 얼른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작품으로도 적어도 1년에 한 번, 길어도 2년에 한 편은 선보이고 싶다. 찾아주는 곳이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좋은 작품이 들어올 때는 그렇게 하고 싶다. 어떤 식으로든 계속 찾아봬야지 대중이 내 얼굴을 안 까먹지 않겠나. (웃음)
사진제공_아이오케이 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