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요. 그게 이중고거든요. 어쩌면 저는 고문을 버텨내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요. 하지만 명계남 선배님이나 이경영 선배님, 의성이 형님, 찬희, 중기는 이중고예요, 이중고. 그들 입장에서 제 상태가 왜 걱정이 안 되겠어요. 그런데 걱정하는 게 들켜버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배로 힘드셨을 거예요. 그걸 모니터로 계속 봐야하는 감독님은 더 힘드셨을 테고요. 감독님은 고문하는 사람도 됐다가, 고문당하는 사람도 돼야했으니까요.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30년간 영화해 오면서 이렇게 힘든 작품은 처음이다. 고문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가 없는 이유를 알겠다”고요.
감정을 떨쳐내는데 시간이 필요한 영화인 것 같습니다.
말은 안 했지만 다들 한 씬 한 씬 끝날 때마다 바로 지우려 했을 겁니다. 본능적으로 말이죠. 할리우드 배우들은 작품이 끝나면 정신과 상담을 받는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정신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잖아요. 전보다 인식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부담스러워하는 부분이 있어요. 다행인 건, 배우들이 다들 강하다는 겁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버티는 거, 견뎌내는 거에 강한 유전형질을 지니고 태어난 것 같아요.
스스로가 강하다고 느끼시나요?
제가 O형인데, 그런 면에서는 혈액형이 맞는 것 같아요. 일단 잘 잊어요. 금방금방.(웃음) ‘대사만 잘 외우면 되겠지’ 하는데, 요샌 대사도 깜빡깜빡 합니다.
인터뷰 오기 전에 <부러진 화살>을 다시 봤습니다. 영화에서 박준(박원상) 변호사가 그러더군요. “재판은 이렇게 끝나겠지만 그 부끄러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현 사법부의 오만함도 언젠가 우리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남영동 1985>의 김종태가 이두한(이경영)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잘못한 부분이 분명 있는데, 거기에 대한 정리 없이 그냥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만한 사이즈의 병이라면 이제 넘칠 것 같은데. 아니 넘칠 것 같은 게 아니라 넘치겠죠, 언젠가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럴 겨를이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할 여유 없이 등 떠밀려 살아가고 있는 거죠. 그럴 때 <남영동 1985>가 환기를 시켜주지 않을까 싶어요. 옆구리를 찌르는 거죠. ‘힘들지만 우리 두 시간만 같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어디쯤 가고 있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해서. 그게 없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잖아요. 지나 온 길을 보지 않고 어떻게 앞으로 가겠어요. 감독님이 무대인사할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여러분은 두 시간 힘드시겠지만, 이 작품을 만든 우리는 두 달 힘들었고, 과거의 그 분들은 평생을 힘들어하다가 돌아가셨거나 지금도 아파하고 계십니다. 두 시간만 함께 아파하고 기억해봅시다. 그걸로 그 분들에게 위로가 된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요.”라고요. 그 말에 공감합니다. 그래서 저 역시 유혹의 말은 합니다. 2시간만 함께 아파 해 보자고. 그러면 너무 좋겠다고. 후회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런 부분에서 기자님들을 만날 때마다 유혹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동참해달라고 말하고 있고요
<부러진 화살>로 정지영 감독님과 인연을 맺어서 너무 많은 걸 배웠어요. ‘내 마음의 지표 같은 선생님을 만났구나’ 생각했죠. 그분이 “고문을 다룬 영화를 준비 중인데, 이건 <부러진 화살>을 했던 우리가 함께 넘어와서 해야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그 중에서 원상이 네가 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로서는 놓칠 수 없는 패 아닙니까. 놓아서도 안 되는 패고요.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이게 참 미치겠는 거예요. 고민이 됐죠. ‘고문 연기를 어떻게 해 내지?’하는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건, 머리를 맞대서 방법을 찾으면 되는 거니까요. 그보다 걱정이 된 건, ‘김종태라는 캐릭터를 내가 할 수 있을까’ 더 솔직히 얘기 드리면 ‘이거 내가 해도 되나?’였습니다. 그래서 감독님과 경영 형님께 말씀드렸죠. “감독님, 제가 차라리 이두한 역할을 하는 건 어떨까요?”라고 말이죠.
부담이 크셨군요.
부담, 그리고 흔히 얘기하는 부채의식이 있었던 거죠. 배우가 본인이 맡은 인물의 상황을 직접 경험해야 그 캐릭터를 연기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건 달랐습니다. ‘이걸 내가 감당할 수 있나?’하는 자의식이 발목을 잡았어요. ‘43년간 회색으로만 살아온 내가 이 역할을 맡았을 때, 관객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래서 감독님에게 “제가 차라리 이두한을 하면 어떨까요?”라고 떼를 쓴 거죠. 한마디로 징징 거린 거죠. 하지만 그건 제 몫이잖아요. 김종태를 하기로 한 다음에 감독님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버틸 수 있는 체력하나는 챙겨서 현장에 갈게요”라고 말씀드렸죠.
버틸 수 있는 체력은 어떻게 만드셨나요?
먼저, 서점에 가서 故 김근태 의원님의 수기 <남영동>을 사서 읽었죠. 그 다음엔 거울을 봤습니다. ‘아, 이런!’ 당시 저는 굉장히 방치 돼 있는 몸이었어요. <부러진 화살> 끝나고 야식의 세계에 빠져 있었거든요. 프리기간이 마냥 긴 게 아니라서, 식사량을 확 줄일 수밖에 없었죠. 피폐해져 가는 모습을 연기해야했으니, 옆구리 불룩, 이런 것들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야식 끊고, 음식 섭취량 줄이고, 무조건 걷고, 자전거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해 돌아다녔죠. 촬영 회차가 총 25회였는데, 사실 15회차로 계획된 영화였어요. ‘15회차 정도면 길지 않으니 굶자. 버틸 수 있을 만큼만 먹자.’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상황이 변하더군요. 촬영은 길어지고, 그에 따라 회차는 점점 늘어나고. 그럼 남는 게 뭐겠습니까. 버티는 거죠. 저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인내가 필요한 촬영이었어요. 고문 영화는 감독님을 비롯해서, 선배님들, 기술 스태프들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거잖아요. 아무도 노하우가 없다보니, 연출부 친구들이 고생을 많이 했죠. 스스로 마루타가 돼 가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물 고문장면에서 힘들어하고 있는데, 명계남씨가 “너, 연극했잖아. 숨 쉬는 법 알잖아!” 그랬다면서요. 그런데 그게 말이 쉽지, 연극과 고문 장면을 엄연히 다르지 않습니까.(웃음)
그러니 말입니다.(웃음) 제가 너무 당황해하고 힘들어하니까 선배님이 “야. 인마. 연극하는 놈이 뭐 하는 거냐고.”고 걱정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말했죠. “선배님,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몸이 안 따라 주는 걸 어떡해요.”라고.(웃음) 사실, 처음에는 저도 연극에서 배운 호흡을 쓰면 될 줄 알았어요. ‘들이마시는 호흡을 최대한 이용해서 참아내야지!’ 라는 생각을, 저라고 왜 안 했겠어요. 그런데 이상과 현실은 다른 걸 어떡해. 허허허허. 결국 시행착오를 겪으며 적응 해 나간 거죠. 이제는 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어요. 또 찍을 수 있겠냐고요? 모르겠어요. 또 찍겠냐고 하면 다른 스케줄 핑계대고 도망갈지 몰라요.(웃음) 대신 다른 분이 이런 비슷한 걸 찍는다고 하면, 제 발로 찾아가서 노하우를 전수해 주려고요. 먼저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물론 이런 영화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요.
제가 88학번이에요. 동기들이 데모하다가 붙들려가고 샌님 같던 친구들이 변해가던 그때, 저는 그게 보이는데도 연극반으로 가서 4년 동안 연극만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놈이 ‘이걸 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차라리 제가 이두한을 하면 어떨까요?”한 거고요. 그랬더니 감독님이 “이유를 대 봐!”하시더라고요. 말씀드렸죠. “고문장면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에필로그 장면 있잖아요. 60이 된 김종태가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국무회의 장면에서 다른 배우들은 자기 나이로 앉아있는데, 저만 펜슬로 주름 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어쩌고저쩌고~” 한마디로 칭얼댄 거죠. 그걸 감독님과 경영형님이 왜 모르시겠어요. 다 알죠. 듣고 있던 경영형님이 “쓸데없는 소리 마. 우리 영화 찍는 거잖아. 너 연기할 거잖아.” 그러시더라고요. 정신이 확 깼죠.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됩니다. 고민하는데 시간 허비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했으면 좋았을 텐데.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후로는 감당했던 것 같아요.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마음속의 갈등도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고. 촬영기간 동안 육체적으로 힘든 것도 제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고. 개봉 후에도 감당해야 할 것들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지금도 그 연장선에 있고요.
감당하는데 큰 힘이 된 건, 뭔가요?
선배님들입니다. 고문 연기라는 게 한없이 우울해지기 쉬워요. 그럴 때마다 저희 팀의 왕고죠. 명계남 선배님이 가장 먼저 객쩍은 소리로 분위기를 풀어주곤 했어요. 사실 선배님도 힘드시거든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고문하는 사람은 이중고란 말이에요. 그런데 먼저 웃고, 농담 던져주고. 선배들이 지쳐서 멍하니 있었으면 아마 촬영을 온전히 완주하지 못했을 거예요. 정말 형님들에게 많은 걸 배웠어요. 제가 촬영 초반에는 혼자 이어폰 꽂고 앉아 있곤 했는데, 미친 짓을 한 거죠. 혼자 연기하는 것도 아닌데. 그걸 형님들이 끊임없이 당겨주신 거예요.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같이 앉아서 수다 떨고, 낄낄대고.(웃음) 먹지 말아야 할 간식에도 손이 스윽 가고. 하하하.
88학번이라고 하셨으니까, 1985년도면 16~17살?
네. 그때 제가 고1이었죠.
그 시절은 배우님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그때는 제가 무차별적으로 연극을 보기 시작할 때예요. 자율학습 땡땡이 치고. 가방은 교실에 두고. 몸만 쏙 빠져나와서 소극장으로 향했죠. 호주머니에 늘 연극초대권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제가 청파동에서 나고 자랐어요. 남영역 앞에 있는 선린중학교를 다녀서 그 언저리를 늘 걸어 다녔죠. 그때의 기억들. 숙대 누나들이 백골단에 머리채 잡혀 질질질 끌려가는 모습, 수류탄 냄새, 데모하는 사람들. 그런 걸 보면서 고등학교 시절을 통과했어요. 그러니까 그런 기억이… 아…(짧은 한숨) <남영동 1985>는 기억을 끄집어내는 영화예요. 이건 2002년의 기억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2002년 시청 앞 광장에서의 기억들은 자주 끄집어내잖아요. 그런데 70~80년 기억들은 TV에서 조차 잘 다루지 않아요. 고등학교 때였어요. 선생님 중 한 분이 하루는 선글라스를 끼고 오셨어요. 시위에 합류하셨다가 눈에 멍이 드신 거죠. 그런 시절이 분명히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기억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너무 잊고 살아갑니다. 이런 기억을 매일 끄집어내는 건 힘들겠지만, 일 년에 한 두 번이라도 기억해 봤으면 좋겠어요. 누군가 옆구리를 찔러 줬으면 좋겠어요. <남영동 1985>는 그러자는 의도가 굉장히 강한 영화고요. 그런 면에서 영화가 15세 등급을 받아서 참 반갑죠.
가끔 “15세? 이 영화가? 애들이 뭘 안다고?” 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얘기하는 당신은 뭘 알고 있느냐”고 오히려 물어보고 싶어요. 모르니까 봐야 하는 거잖아요. 그걸 알려주는 게 선배들 역할인데, “얘네들이 뭘 알겠어!” 하면서 자꾸 밀어내 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불편했던 과거에 대해 얘기하길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억하고 있어야 같은 실수를 반복 안 할 테니까요. 요즘 일본의 우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걸 봐요.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의 부재가 문제가 되는 거잖아요. 우리라고 그렇게 안 되리라는 보장이 있나요? 다시 공포의 시대로 안 돌아가리라는 보장이 있나요? 물론, 모든 영화가 진중하면 재미없겠죠. 팝콘 먹으면서 스트레스 풀 수 있는 영화가 분명 있어야 겠죠. 하지만 <남영동 1985> 같은 영화도 가끔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작품을 만들지만, 가끔 작품이 사람을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얘기를 듣다보니 <남영동 1985>가 그런 케이스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영화가 배우님 인생에 적지 않은 변화를 일으키는 느낌이에요.
아마 영화가 개봉하고, 시간이 흐르면 저는 또 친구들과 술 마시며 낄낄대며 살 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남영동 1985>를 통과하며 얻은 생각들, 기억들, 몸에 새긴 감각들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 믿어요. 내 안의 박원상은 조금 달라졌을 거라 믿어요. 인생을 훌륭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평균적인 인생은 살고 싶습니다. 상식적인 인생은 살고 싶어요. 그리고 상식적인 선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부쩍 합니다.
남영동 가까이에서는 얼마나 사신 건가요?
제가 1970년 1월에 청파동 2가에서 태어났어요. 결혼해서 떠날 때까지 청파동 언저리에서 쭉 살았고요.
그렇다면 남영동이라는 곳은 배우님에게 굉장히 편안하고 안락한 공간이었을 텐데요. 영화를 찍고 난 지금은 어떻습니까? 영화를 찍고 나서도 남영동이라는 동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느낌이 전과 같은 가요?
글쎄요. 이런 건 있어요. 이 작품을 하면서 남영동 대공분실이 건축가 김수근 선생님의 작품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굉장히 묘했어요. 제가 첫 연극을 본 곳이 안국동에 있는 ‘공간사랑’이라는 소극장인데, 그게 김수근 건축가의 작품이거든요. ‘공간사랑’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원서공원’이라는 곳은 또 김수근 건축가의 유작이고요. 두 공간 모두 제가 참 좋아하는 곳인데, 참 아이러니하더군요. 씁쓸했고요. ‘아 그렇구나. 그 야만의 시대에도 건축가의 능력을 알아보는 안목은 있었나보구나’ 농담처럼 얘기 하곤 하죠.
이두한이 부르는 휘파람 소리가 ‘클레멘타인’인가요? 영화를 보다보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그 휘파람 소리가 그렇게 공포스러울 수 없습니다. 혹시, 배우님에게도 그런 노래나 작품이 있는지요.
제가 O형이잖아요. 그렇게 예민하지가 않아요.(웃음) 조금 예민해야 하는데, 너무 두루뭉술해서.
혼자 연극도 보러 다니고, 공원도 가고. 감수성 풍부한 학생이지 않았나 싶은데요.
사실 처음부터 연극을 좋아한 건 아니었어요. 처음 연극을 본 게 단체관람을 통해서였는데, 단체관람이다 보니 좌석이 좋을 수가 없잖아요. 세종문화회관 맨 뒷자리에 앉아서 봤으니, 연극이 당연히 재미가 없죠. 처음 연극을 보고, “이게 뭐야?” 시큰둥했던 기억이 나요.
유관순기념관에서 상영한 <베니스의 상인>이었을 거예요. 오현경 선생님이 샤일록이었나? 그런데 좌석이 제일 뒤인지라 제대로 감상이 안 됐죠. 그리고 유관순기념관이 이화여고 안에 있잖아요. 이화여고에 갔는데, 와~ 우리 학교랑 너무 비교가 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고등학교야? 대학교지?’ 하면서 학교 둘러보기에 바빴어요. 우리 학교는 만리동 산꼭대기 쪽에 있었는데, 박정희 아들 박지만 그 양반이 (고교평준화 정책 시범으로) 그 쪽 학교에 진학 안했으면 도로포장도 아마 안 됐을 거예요. 하하하.
하하하. 그렇게 또 연결이. 그럼 연극엔 어떻게 빠지게 된 건가요?
어느 날 우연히 연극 초대권 한 장이 생겼어요. 그날 버스타고 안국동까지 찾아간 걸 보면, 정말 인연인 것 같아요. 초대권이 있어도 ‘이게 뭐냐?’ 하면서 버렸다면,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죠. 그런데 안국동까지 혼자 간 거예요. 그곳에서 만난 소극장은 정말 다른 세계였어요. 그때 본 연극이 <관객모독>.
저도 인상 깊게 본 작품입니다.
작품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그 나이에 뭘 알겠어요? 그 연극에 대한 기억라곤, 무대 위의 배우들로부터 ‘욕(모독) 들은 거’, ‘물세례 받은 거’.(웃음) 그런데 무대의 모습은 생생해요. 내 뒤에 관객으로 김수철 아저씨가 앉아 있었고, 무대가 야트막하게 올라가 있었고. 그 소극장이 아까 말한 ‘공간사랑’인데, 신발을 신발주머니에 담아서 큐빅으로 된 객석 밑에 넣어두고 보는 시스템이었어요. 흡사 사랑방 같았죠. 제가 원두커피 향을 처음 맡아 본 곳도 그곳이에요. 평소 원두 향을 궁금해 하고 있어서 뚜렷이 기억해요. 왜, 피천득 아저씨의 수필을 보면 “낙엽을 태우며 갓 볶은 원두커피 향~” 이런 게 나오잖아요. ‘도대체 이게 무슨 향일까’. 굉장히 좋은 향일 것 같은데, 맡아보지 못했으니 알 리는 없고. 그런데 ‘공간사랑’에 있는 작은 카페에 ‘원.두.커.피!’라는 글자가 딱 붙어 있는 거예요. ‘아, 이거구나!’ 했죠. 그러니까 학교와 동네밖에 모르던 놈이 너무나 새로운 세계를 만난 거예요. 이후 연극을 야금야금 보기 시작했어요. 당시엔 레코드 가게가 예매처 역할을 했는데, 거기에 초대권이 있다는 고급정보를 입수하고는 레코드가게 누나들을 공략하기 시작했죠. 동정에 호소했어요. “연극이 너무 보고 싶은데 돈이 없어요. 초대권 한 장만 어떻게 안 될까요? 저는 한 장만 있으면 되는데” 이러면서.(웃음) 그렇게 스폰서가 생기고, 연극을 무차별적으로 보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대학은 그런데 연극과가 아닌 독문과를 가셨습니다.
연극영화과를 가려고 했는데 원서를 못 썼어요. 집에서 반대했고, 담임선생님도 말렸고.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선생님들이 자기 제자가 어떤 거에 흥미가 있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제자가 뭘 좋아하는지를 어드바이스 하는 게 아니라, “자, 봐봐. 너 모의고사 290점 대지? 그럼 여기가 안전권이란 말이야, 인마. 너 재수할래? 여기 쓰면 무조건 들어가” 이런 식이었죠. 결정적으로 담임선생님이 아버지에게 “원상이가 철모르고 연극영화과 연극영화과 하는데, 아버님 거기가려면 집에 돈이 있어야 해요” 그랬어요. 우리 집엔 돈이 없는데. 아버지에게 그런 얘길 하는 게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아버지 뜻에 따라 연극과를 포기하고 독문과로 방향을 틀었죠.
확신이라기보다는 서서히 물드는 거 있잖아요. 현실을 모르니까 오히려 가능했던 것 같아요. 뭐든 그 안의 세계에 대해 너무 알아버리면 재미없잖아요. 무모해야죠. 특히 이쪽은 미련해야 오래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학교로 달려갔어요. 수소문해서 연극반을 찾았죠. 그때가 입학하기 훨씬 전이었는데, 연극반을 찾아가 보니 79 학번 80학번 선배들이 쫙 있더라고요. 제 눈엔 정말 아저씨들 같았어요. ‘연극하는 사람들이 맞나?’ 그랬던 것 같아요.(웃음) 그렇게 연극반에 들어가서 신입생인데 불구하고, 선배들과 함께 신입생 환영 공연을 준비했어요. 하하하. 그런데 핸디캡이라고 해야 하나?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함께 가자’고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한 동네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갔어요. 걔는 가고, 저는 못 간 거죠. 그래서 그 친구를 만나면 “야, 너네 학교 시간표 좀 줘 봐! 커리큘럼 어떻게 돼?” 살펴보고는 종로 교보문고에 가서 한양대 연극과 학생들이 보는 책을 사서보곤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철이 없었죠.(웃음) 그런데 그게 많은 도움이 됐어요. 결핍 때문인지 몰라도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4년 내내 공연 한 번 안 쉬었어요. 당연히 과 생활은 엉망이었죠. 전공 교수님들도 수업 시간에 보는 게 아니라, 공연 즈음. 연극 프로그램이 나오면 초대권을 들고 교수님 방에 찾아가는 거예요. “교수님, 연극 보러 오세요”이러면서요. 하하하.
하하하. 성적이 궁금하네요.
아우~ 대단한 방어율이었죠. 낙제는 아니었습니다. D만 받아도 패스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친구들은 자꾸 재수강을 하는 거예요. 아니, 그걸 왜 재수강 해? F도 아닌데. 하하하.
한양대에 간 친구는 지금 연극 쪽에 있나요?
유학 다녀 온 후에, 지금은 모 대학에서 학과장을 하고 있어요. 보시다시피 저는 이렇게 배우로 살고 있고요.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죠. 희망이야, 이 바운더리 안에 계속 있기를 원합니다. 재미있게 즐기면서 이 일을 끝까지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연기가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 돼버리면, 그때는 과감하게 접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생각을 하며 살고 있어요. 안 그러길 바라면서.
그 동안 많은 영화에 출연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배우님의 얼굴을 이렇게 깊게 들여다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건 저 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러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런 의미에서 <남영동 1985>는 배우 박원상의 얼굴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키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번 영화는 참 많이 다릅니다. 많은 면에서 다른 경험을 하게 해 준 영화죠. <부러진 화살>때까지만 해도 제 연기를 제대로 못 봤어요. 자꾸 실수한 거, 버벅거리는 것만 보이니까 못 보겠더라고요. 그런데 <남영동 1985>는 달랐어요. 부산에서 처음 영화를 봤는데, 미흡한 부분이 눈에 들어와도 응시하게 되더라고요. 끝까지 집중 하게 만들더라고요. 제가 이 영화를 세 번 봤는데, 그때마다 충분히 가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100% 관객 입장에서 영화를 봤다고는 말 못하지만, 계속 보게 되는 영화라고는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중학생 아들과 함께 <남영동 1985>를 보고 싶어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들이 이 영화를 보고 뭐라고 할 것 같나요?
저도 그게 너무 궁금해요. 그걸 듣고 싶어서 보여주고 싶은 거고요. 아직 이르지 않냐고 걱정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아니에요. 만약 아이가 힘들어하면 제가 풀어주면 되니까요. 인생의 선배로서 끌어주면 되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의 불손한 의도는, 아빠가 이렇게 힘들게 일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거.(웃음) 둘째는 초등학교 2학년이라 아직은 이른 것 같아요. DVD를 집에 두면, 언젠가 보겠죠. 그 아이도 어떤 얘기를 할지 궁금해지네요.
2012년 11월 28일 수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
2012년 11월 28일 수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