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기대 없이 봤나? 얼굴 보니까 아닌 것 같은데.
살짝 기대는 했다.
정말 살짝?(웃음) 영화는 어땠나?
먼저 김과장이라는 캐릭터가 눈에 띄더라. ‘신경쇠약직전의 가장’이라는 느낌이 와 닿았다.
‘신경쇠약직전의 가장’이라. 그 표현도 좋은데. 난 시나리오를 읽고 ‘사방에서 칼을 맞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사방에서 칼을 맞는 남자?
영화 내내 김과장은 계속 시달림을 받지 않나. 비아그라 팔아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고, 북에 있는 오마니에게 생활비도 보내드려야 하고, 암살 계획도 착실히 수행해야 한다. 김과장 가운데에 놓고 사방에서 계속 칼을 찔러 대는 모습이 그려지더라.
<연가시>의 재혁에 이어 이번 영화에서도 가장을 맡았는데, 어떤 차별성이 있나?
재혁이 가족을 살리는 것에만 열중했다면, 김과장은 신경 쓰는 일이 너무 많다. 그래서인지 재혁보다 더 현실감 있는 가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과장은 간첩이라는 것만 다르지 대한민국 가장과 별반 차이가 없다. 영화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공작금을 보내달라는 김과장의 모습이 웃기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물가는 치솟는데 돈 벌기는 어렵고, 그렇게 해서라도 가족들을 부양하려는 노력이 불쌍해 보이지 않나. 연기하면서 역할에 너무 공감되더라.
그런 공감대가 김과장이란 인물을 설정하거나 연기하는데 도움 됐겠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가장이고, 애 아빠니까 연기하는데 도움은 됐다. 하지만 캐릭터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시간이 좀 걸렸다.
직업이 간첩이라서?
그냥 간첩이 아니잖나. 간첩 같지 않은 간첩이지.(웃음) 그뿐인가. 남한의 가족, 북에 있는 부모님, 남한 국정원 등에게 압박을 받고, 팀 리더로서의 책임감도 드러내야 한다. 이 모든 걸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평범하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비범함을 보여주자는 거였다. 상황마다 카리스마와 액션의 강약을 조절해 김과장이 간첩이라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각인시키고, 의도하지 않은 코믹한 연기를 보여주는 구조로 설정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게 바로 지금의 모습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런 김과장의 모습을 잘 보여준 부분은 편의점 강도를 때려잡는 장면이다.
순간적으로 간첩의 본 모습이 나오는 첫 부분이다. 액션도 액션이지만 CCTV에 찍힌 걸 하나씩 지우면서 직원에게 사정사정하는 코믹한 모습이 이어지면서 상황극이 잘 산 것 같다.
한편으론 간첩보다 인정 많은 동네 아저씨 느낌이 들었다.
인정이 많아도 너무 많지. 잘못하면 자기뿐 아니라 가족까지 몰살당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인데 강도를 때려잡으니. 정말 오지랖 넓은 동네 아저씨다.
계기는 아니지만 남한에 처음 내려왔을 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김과장은 신분 위장을 하기 위해 40년 전 남한에 내려와 동사무소(현 주민센터) 동장으로 살고 있는 윤고문(변희봉)을 만난다. 암호가 “주민등록증 재발급하러 왔는데요”라고 하면서 목란꽃을 들고 오는 거였다. 마침 미래의 아내가 되는 주은혜(오나라)가 동사무소 직원이었던 거지. 김과장은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당시 유행했던 전영록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했는데, 주은혜가 전영록 광팬이었던 거다. 그래서 서로 눈이 맞아 결혼에 골인. 뭐 이런 과거사가 담겨있다.
과거 연애담이었군.
연애담도 있었고, 윤고문과의 에피소드도 있었다. 남한에서 의지할 사람이 없었던 김과장에게 윤고문은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윤고문은 김과장이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고, 때로는 호되게 야단치면서 이끌어줬던 사람이었으니까. 윤고문이 최부장(유해진)한테 얻어맞을 때 김과장을 자세히 보면 “감히 누가 우리 아버지를 때려” 하는 듯한 표정이 나온다.
그런 과거 장면들이 없으니까 보는 맛이 좀 덜 했던 것 같다.
이야기의 흐름상 과거 장면을 삽입 하는 게 맞는데, 너무 길어서 감독님이 편집했다. 짧고 임팩트 있게 회상 장면을 구성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김과장과 대립관계를 이루는 인물은 최부장이다. 최부장을 연기한 유해진과 붙는 장면이 많은데 호흡은 어땠나?
너무 좋았다. 원래 해진이 형이 고정 간첩팀은 아니지 않나. 우리를 힘들게 하는 X지.(웃음) 그래도 굉장히 화기애애하게 잘 지냈다. 캐릭터로 놓고 보면 대기 시간에도 계속 인상 쓸 것 같고, 신경 쓰이는 일에 버럭 화를 낼 것도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많은 얘기도 나누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촬영했다.
드라마 <하얀거탑>에서는 수술 하는 모습, <내 사랑 내 곁에>에서는 전신 마비가 된 모습이 캐릭터를 부각시키는데 주요했다. 이번 영화에서는 김과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어떤 무기를 내세웠나?
편의점 장면처럼 간첩 같지 않은 김과장이 간첩의 면모를 순간 발휘할 때의 모습이다. 그게 김과장의 무기라 생각했다. 그 무기를 돋보이기 위해서 이번에는 입을 벌리지 않고 액션을 했다.
입 벌리지 않고?
보통 액션을 하면 막 거친 호흡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22년 전 극한 훈련을 받았던 김과장은 호흡 없이 간결한 액션 동작을 취해야 한다. 그냥 무의식중에 나오는 움직임처럼 말이다. 누구를 위해 내려왔는지 망각한 김과장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간첩이잖나. 싸울 때는 봉인이 풀리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차별화된 액션을 구사해봤다.
호흡을 달리 했다는 건 처음 알았다.
호흡 없이 갔으니까 액션이 잘 살았던 것 같다. 예를 들어 간결한 주먹질도 호흡을 헐떡이면서 하는 것과 호흡 없이 건조하게 하는 것은 다르다. 거친 호흡을 내쉬며 액션을 하는 것 보다 호흡 없이 액션을 구사하면 살인병기 같은 모습이 나온다. 국정원 요원들하고 싸울 때도, 최부장과 대결할 때도 입을 꽉 다문채로 계속 액션을 구사했다. 하지만 호흡을 안 하고 액션을 하기가 참 어렵더라. 격한 운동을 할 때 숨을 헐떡이는 것처럼 액션 할 도 자연스럽게 입이 벌려지니까. 나름 고충이 있었다.
김과장을 향한 감독님의 애정이 너무 과했다는 거다. 이번 영화에서 김과장의 대사 분량이 너무 많았다. 초반부터 감독님에게 분량 좀 줄여달라고 했지만 결국 시나리오에 있는 걸 다 찍었다. 분량이 많다 보니까 되도록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말을 빨리 했는데, 그러다 보니 입이 아프더라.(웃음)
어느 인터뷰를 보니 자신을 다그치고 채찍질 하는 연출자가 좋다고 했는데, <파괴된 사나이>에 이어 두 번째 호흡을 맞춘 우민호 감독은 어떤 편인가?
우민호 감독은 배우를 괴롭히는 연출자는 아니다. 그냥 배우의 의견을 많이 들어주고 이를 반영하는 감독이다. 감독보다는 친한 동료 같은 사람이다.
<파괴된 사나이>의 영수, <연가시>의 재혁, 그리고 <간첩>의 김과장 중 가장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을 꼽으라면?
그거야 김과장이지.(웃음) 무엇보다 가족에게까지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너무 고달파 보인다. 나는 단 하루라도 그렇게 살지 못할 거다.
어떻게 보면 밖에서는 배우, 집에서는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모습이 김과장과 일맥상통하다. 실제 가장으로서의 모습이 궁금하다.
어린이날 놀이 공원에 못가고, 촬영 때문에 휴가철에 놀러 가지 못하는 걸 제외하고는 그냥 보통 가장들과 다를 거 없다.(웃음)
그럼 가장으로서 점수를 매긴다면?
음... 백점.(웃음)
아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걔가 생각이 있겠어. 그냥 장난감 사주면 백점이지.(웃음)
기자간담회 때도 아이들 교육에 관련해서 얘기했는데, 따로 갖고 있는 교육 방침이 있나?
예전부터 생각했던 교육방침은 방목이었다. 막상 아이가 크니까 그럴 수가 없더라. 학원을 안보내면 혼자 놀 수밖에 없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학교 끝나면 학원가고 저녁에야 집에 들어온다고 하더라. 집에 와도 미술, 수학 등 과외 선생님이 오니까 놀 시간이 없는 거지. 요새 초등학생은 학생이 아니라 수험생이라니까.
방목을 주장했던 내가 애를 혼내고 있을 때 사뭇 놀랜다. 어느 날 애 엄마가 언성을 높여가며 아들을 혼내더라. 그래서 “살살 좀 해. 왜 이렇게 애를 잡아” 그랬더니, “자기가 더해. 경기 일으킬 정도로 혼내지나 말어”라고 하더라.(좌중폭소) 아들을 혼내는 이유는 성적 때문이다. 평균 점수만 나오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되니까 엄청 속상하더라고. 우리 아들이 다른 아이들 보다 배움 속도가 느린 편이다. 얘는 뭐가 딱 끝나야 시작하지 그게 안 되면 옆에서 을 들이대도 꿈쩍 안 한다. 이상한 완벽주의가 있다니까. 똥고집이 있어.
그 고집은 유전인 것 같은데.
그런가?(웃음) 아들이 하는 건 고집이 아니라 집착이다. 그런 문제에 봉착할 때 아들에게 고집과 집착은 다르다고 말한다.
<페이스 메이커> 중에서 “넌 좋아하는 거랑 잘할 수 있는 것 중에 뭐 하면서 살고 싶냐?”라는 대사가 있다. 아들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중 어떤 걸 선택했으면 좋겠나?
당연히 좋아하는 거지. 내가 좋아하는 연기를 잘 할 수 있도록 꾸준히 연마하는 것처럼 아들도 좋아하는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한다. 반대로 잘하는 일을 좋아하도록 노력하면 분명 매너리즘에 빠진다. ‘과연 내가 이걸 좋아서 하는 걸까?’라는 배부른 소리를 할 꺼다. 좋아하는 걸 하면 목표가 생기고, 동력이 생기고, 한 계단씩 올라가며 희열을 얻는다. 그 과정을 경험하게 하고 싶다.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겠지만.
최근 작품들을 보면 예전만큼 육체적 고통이 뒤따르는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의도된 선택인가?
<내 사랑 내 곁에> 이후 살 빼는 건 다시 안하겠다고 선언한 뒤부터 심신이 고된 역할은 안 들어온다. 그리고 주변에서 그런 모습을 보는 게 많이 힘들다고 하고,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의식하게 되더라. 그렇다고 상황을 봐서 이번에는 연기하기 편한 역할을 해야겠다,라는 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시나리오에 매력을 느끼면 선택한다.
최근 행보는 결과적으로 득이 될 것 같다. 힘든 역할만 하는 배우라는 이미지가 서서히 없어지고 있으니까.
대중들의 선입견을 깨는 것도 좋다고 본다. 그 쪽으로 이미지가 고착화 되면 안 좋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어떤 이들은 개고생 전문 배우라고 하더라. 뭐 판단은 개인의 몫이니 어쩔 수 없지.
조만간 스크린이 아닌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이후 4년 만에 <드라마의 제왕>으로 컴백한다. 오랜만에 하니까 반가움이 있을 법도 한데.
반갑기는 한데, 피곤하겠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영화와 드라마는 다르잖나. 연이은 쪽대본과 밤샘 작업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인물은 ‘자뻑’ 캐릭터다. 드라마 제작에 관련해서는 최고다. 제목처럼 드라마 성공률 93.1%를 자랑하는 드라마의 제왕이거든.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사람이기에 모든 사람들의 표적이 된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드라마의 성공과 돈을 위해 앞으로만 나간다.
얘기를 들어보니 <하얀거탑>의 장준혁과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가 떠오른다.
일단 야망을 위해서 끝까지 달려가는 건 두 인물과 닮았다. 하지만 앤서니 킴은 장준혁과 강마에 비해 연민을 느낄 수 있는 틈이 거의 없다. 만약 앤서니 킴이 장준혁처럼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다. 그 정도로 악독한 놈이다. 앤서니 킴의 입장에서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시청자들에게 최대한 보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다. 그는 시청자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고 싶어 한다. 질 좋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고, 죽이고, 피눈물 나게도 하지만 이 모든 게 시청자들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명분을 가슴에 새기고 연기 할 예정이다. 잘 표출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2012년 영화로 시작해서 드라마로 마무리 짓는다. 올해 참 바쁘게 활동한 것 같다.
3편의 영화가 개봉했고, 드라마로도 인사드릴 예정이니까. 꾸준히 연기만 할 수 있다면 바쁜 건 문제가 안 된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지. 나는 가장이니까.(웃음)
2012년 9월 25일 화요일 | 글_김한규 기자(무비스트)
2012년 9월 25일 화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