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았나? 예능을 잘 몰라서.
<1박 2일>도 했잖나.
-<1박 2일> 때는 가만히 있었지, 별로 한 게 없다. (김)정태나 다른 배우들이 수고 많이 했지. 난 날로 먹은 거야.
어제 <놀러와>는 변영주 감독의 독무대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선전했다.
-상당히 경(輕)한 모습이었는데.(웃음)
그동안 드라마에서는 ‘꽃중년’ 이미지, 영화에서는 살인범이나 보스 등 강한 이미지로 각인됐었는데, 예능을 통해 색다른 모습을 보여줬다고나 할까.
-참 그런 점을 봤을 때 예능 출연을 잘 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예능을 보고 조성하라는 배우가 저런 면이 있구나하는 걸 봤으면 좋겠다. 매번 꽃중년 이미지로 먹고 살수도 없는 거고. 차후에 재미있는 캐릭터를 맡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됐으면 한다.
아! 방송을 보니, 막내더라. 그렇게 안 보이는데.
-아무래도 이미지가 까불까불해 보이지는 않으니까.(웃음)
<화차>에서도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 나왔다. 극중 첫 등장 장면이…
-그렇지. 분장이 너무 과했어.
-그걸 변영주 감독에게 말해야 한다니까.(웃음) 배우가 매번 얘기해 봐야 안 들어.
분장에 대해 이견이 있었을 것 같다.
-문호(이선균)가 운영하는 동물병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첫 촬영이었는데, 그때는 얼굴이 검고, 누렇지는 않았다. 변영주 감독은 이 장면을 찍으면서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 다음 장면부터 내 얼굴에 검은 분장을 시키더라. 백수생활을 하고 있는 종근이 너무 말끔하게 나왔던 게 싫었던 거지. 감독이 하라고 하면 해야지. 힘이 없으니까. 얼굴이 가장 새카맣던 날이 문호가 사라진 약혼녀 선영(김민희)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 종근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 장면은 지금 봐도 내가 아닌 것 같아.
동물병원 장면에서도 얼굴빛이 검은 줄 알았는데.
-다들 잘 몰라. 이 사실을 몇 사람한테 알려줬는데, 얼굴이 계속 검은 줄 알았다고 하더라. 옥에 티일 수 있는데 인지를 못했다는 건, 그만큼 이야기에 흡입력이 있다는 게 아닐까. 뭐 이렇게 위안을 삼는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가장 끌렸던 부분은 무엇이었나?
-시나리오를 받을 때마다 이 안에 어떤 세계가 있을까 하는 기대감부터 갖는다. 장르를 떠나서 한 호흡으로 읽게 되면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 작품을 하고 싶었던 건, 영화가 현대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담고 있어서였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간다는 극단적인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한 번 쯤 상상할 수 있는 일들이다. 나도 신용불량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라가본 적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해 봤을 거다. 돈을 갚아야 한다는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빚을 갚아본 사람만 안다. 이자가 불어나면, 그걸 갚아나가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굉장히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내가 원하지 않아도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거다. 또 요즘 대학교 등록금 내려고 융자를 받잖나. 빚을 지고 공부해야하는 젊은 사람들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사회적 문제를 담고 있는 영화를 나이 먹은 사람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참여하게 됐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종근은 일단 문호가 돈을 준다고 하니까 사건에 뛰어든 거다. 그러다 큰 사건임을 직감한 거지. 본능적인 형사기질, 도덕적인 잣대가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정의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신념이 생긴 거다. 그리고 문호가 계속해서 선영을 잊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선영은 이런 여자니까 그만 정리해라’라는 답을 주고도 싶었고. 그러다 인생 밑바닥까지 내려앉은 선영의 실체를 마주하고, ‘이 여자도 돈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구나!’라는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선영을 끝까지 쫓아가는 건 그녀에게 새 삶의 기회를 주려고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종근이 선영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는 걸 잘 보여주는 장면을 꼽으라면?
-형사 복직이 됐음에도 선영을 뒤쫓는 장면이다. 그만 둬도 되지만, 자신도 모르게 몸이 선영한테로 자꾸 가게 된다. 그게 바로 선영에 대한 연민인거지.
워낙 유명했던 소설을 어떻게 각색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많았다. 7년 동안 감독님이 갈고 닦은 칼날이 예사롭지 않더라.
-설마 7년이겠어. 4년 정도 썼겠지.(웃음)
정정하겠다.(웃음) 변영주 감독과의 첫 작업은 어땠나?
-<화차>는 배우들이 연기하기 쉬운 작품이었다. 만약 시나리오를 보물이 묻혀있는 지도라고 표현하자면, 보물을 찾는 길을 얼마나 잘 그려줬느냐에 따라서 배우들은 이동하기 편해진다. 감독이 20고를 거쳐 완성한 시나리오는 인물의 감정선이나 행동이 배우가 편하게 연기하게끔 쓰여 있었다. 촬영장에서도 감독님은 배우가 어떤 의견을 얘기했을 때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준비가 다 돼 있더라. 사전에 소통이 잘 되다 보니 테이크도 많이 안 갔다. 거의 두, 세 테이크 안에 O.K 사인이 났다.
-뭐 고생은 다 같이 하는 거니까. 마지막 추격신에서 강북 강변도로에서 용산역까지 구간 구간별로 5일 동안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게다가 5일 중에 하루가 말복이었다. 리얼함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열심히 달리긴 했는데, 그 때 이후로 허벅지가 잘 안 움직인다.(웃음) 그래도 체중 조절에는 큰 도움이 됐다.
처음 사건을 의뢰받는 장면에서는 뱃살이 보였는데, 마지막에는 좀 말라 보였다. 이게 다 달리기 덕분인가?
-감독이 거기까지 계산한 거다.(웃음) 종근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수트를 입어야 하니까 살을 빼기 위해 열심히 달리게 한 거지.
영화를 찍으면서 선영의 비밀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을 것 같다.
-그게 관객과 함께 하는 고리니까. 극중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 놓인 인물이 종근이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문호는 감정적으로 선영에게 접근하지만, 종근은 이성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극의 이해를 돕는다. 나 또한 선영의 비밀을 알고 나서 연민을 느꼈다. 선영은 비련의 여인이다. 사실 선영이 직접적으로 잘못한건 없지 않나. 살기위해 발버둥 치는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현실적인 문제를 극단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일반 관객들이 보기를 좀 꺼려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화차>는 일본 사회보다 한국사회에 더 맞는다고 생각한다. 돈 때문에 망한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대출이나 보증을 잘 못서서 빚을 얻게 된 사람들이 허다하다. 돈에 관련된 사회적 문제가 밑바닥에 깔려 있지만 문호와 선영의 멜로가 비중있게 다뤄진다. 일반 관객들은 사회적 문제보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거다. 우리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는 이유는 사랑의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화차>에도 그런 아픔이 있다.
관객을 불러 모으는 멘트 같다.
-언어의 선택이 중요한 거지. 이걸 변영주 감독님이 알아야 하는데.
-남들만큼 해봤다. 중학교 때 쥐포 장사가 첫 직업이었다.(웃음)
쥐포장사?
-경동시장에서 쥐포 떼다가 화덕에 구워서 100원에 팔았다. 그걸 하면서 왜 사람들이 장사를 하는지 알게 됐다. 정말 많이 남거든. 무조건 남는다. 장사를 잘 하는 방법은 따로 없다. 좋은 물건 고르는 법과 성실함.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된다. 과일 장사를 한다고 치면, 좋은 물건을 고르고, 남들보다 빨리 움직이면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장사를 잘하게 된 노하우가 있다면?
-어려서부터 심부름을 잘 했던 게 밑바탕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21세기는 아무래도 서비스시대이기 때문에 사후처리가 중요하다. 심부름 잘하고 욕먹으면 안 된다. 마지막에 미소 한 번 지어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거기에 ‘누구 엄마 지나가서 인사 드렸어요’라는 말까지 하면 금상첨화지.(웃음)
고등학교 때부터 연기를 했다고 들었는데, 장사를 그렇게 잘 했으면 연기 말고 장사로 나가는 생각을 해봤을 것 같다.
-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와 일을 했었는데, 주인들이 월급 많이 줄 테니 딴 데 가지 말라고 했다. 어떤 걸 팔아도 적극적으로 하니까 마음에 들었던 거지. 근데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게 있다. 친화력 좋고, 말 잘하고. 그래서 그런 것들이 장사할 때 도움이 됐다. 계속해서 장사를 했으면 연기를 못 했을 거다. 그런 걸 뿌리쳤기 때문에 지금 연기를 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조성하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작품은 송일곤 감독의 <거미숲>이다.
-아! 역사적인 작품이 나왔네.(웃음) 나에게는 정말 고마운 작품이다. 그 영화 덕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거미숲> 때문에 드라마 <황진이>도 캐스팅 됐고, 이후 연기를 인정받아서 <대왕세종> <성균관 스캔들> 등 계속해서 얼굴을 알리게 된 거다. <황해>도 출연하고 말이다.
-원래 최종필이란 역은 조경환 선배님이 1순위였다. 송일곤 감독은 최종필이란 인물을 만들 때 조경환 선배님을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더라. 워낙 풍채도 좋고, 카리스마가 느껴지시는 분이라 방송 국장 역에는 딱이었지. 그런데 베드신이 있어서 거절하셨다. 다음으로 당시 잘나가던 선배한테 시나리오가 갔는데, 돈이 안 맞아서 또 거절당한 거다. 어느 날 송일곤 감독이 술 한 잔 하자고 연락이 와서 만났는데, 시나리오를 주면서 그동안 겪었던 캐스팅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리고 나더러 그 역할을 해달라고 하더라. 연기하는 건 별 문제가 없었는데, 나이가 문제였다. 당시 37살이었는데, 50대 방송 국장 역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염색을 한다고 해도 사실감이 안사니까 고민을 했었지. 그래서 직접 캐릭터를 만들어보겠다고 감독한테 얘기하고, 그 날로 시나리오 삼매경에 빠졌다. 그게 아마 <거미숲> 크랭크인 일주일 전이었을 거다. 감독과 의견을 조율하면서 촬영 이틀 전에 미완성이었던 최종필을 만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사과를 베어 물면서 하는 베드신이다. 너무 강렬했다.
-아마 한국 영화 중 가장 쇼킹한 베드신 하면 <거미숲>의 사과 베드신이 아닐까. 그 때 한 대사도 직접 만들었다. 감독이 그 대사를 듣고, OK해 줬지. “검이 짧으면 일보 전진해서 찌르고, 여건이 불비하면 노력을 배가하라” 그 대사를 하고, 사과를...(웃음)
드라마 <욕망의 불꽃> <로맨스 타운> 등 젠틀한 중년 남성을 연기해왔다. 조금은 비슷한 역할을 맞는다는 것에 답답함은 없나?
-글쎄? 다 새로운 역할이라서. <황진이>의 엄수라는 인물은 당시 악기를 잘 다루는 악공이었다. 직접 연주를 해야 리얼리티가 살 것 같아서 6개월 동안 가야금, 북, 장구 등 악기를 배웠다. 그리고 방송에서 직접 연주까지 했다. 1회 이후 인터넷 댓글을 보니 ‘국악인이 참 포스가 있다’라고 쓰여 있었다. 2회 방송이 나가니까 그 때서야 배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더라. <황진이>처럼 맡는 캐릭터마다 공을 들이기 때문에 자신감도 있고, 새로움을 느낀다. 젠틀한 역을 해도 각기 다른 느낌을 주려고 노력을 하니까 그런 생각은 안 든다. 같은 걸 우려먹는다고 하면 나도 지겨울 거다. <성균관 스캔들>에서 정조 역을 했을 때 그동안 정조 연기를 했던 선배님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고, <욕망의 불꽃>의 영준도 젠틀한 모습만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영화에서 맡은 캐릭터는 이미지가 센 역할이 많지 않나. <집행자>의 살인범 용두, <황해>의 태원, 그리고 <화차>의 종근 등 드라마와는 다른 느낌을 주려고 했다.
-딴것보다도 시나리오 상 인물을 향해 내가 들어가기보다는, 작품의 인물을 만들어서 나한테 이입시키려 한다. 새로운 인물이 나오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다음 작품이 박진영 주연의 <5백만불의 사나이>다.
-<5백만불의 사나이>에서는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에, 차기작이라고 하기에는 그렇다. 명실 공히 주인공으로 나온 건 <화차>가 처음이니까.
그러고 보니 포스터에 얼굴이 나왔더라. 그만큼 책임감도 많겠다.
-그렇다. 이제부터 의미가 있다. 주인공으로 이름을 걸 수 있는 작품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감사한 게 <화차> 언론시사회가 끝나고 예전보다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온다는 거다. 시나리오를 잘 골라서 좋은 연기 보여드리도록 하겠다.
오늘 만나보니 위트가 넘친다. 앞으로 작품에서 이런 모습을 자주 봤으면 좋겠다.
-아직 이르다. 더 진진한 모습으로 인사드리고, 재미있는 모습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놔야지. 아직 보여드릴게 많으니까. 영화판에 몸담은 지 10년 밖에 안됐다. 아직 파릇파릇한 신인이야.(웃음)
2012년 3월 2일 금요일 | 글_김한규 기자(무비스트)
2012년 3월 2일 금요일 | 사진_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