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영화는 제도권 영화계에서만 제작되고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최근 들어 독립영화계에서도 장르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흔히 독립영화라고 하면 복잡한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관념적인 이야기나 사회 비판적인 드라마 혹은 형식적인 실험에 치우친 작품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장르적인 재미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작품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추세다. 올 한해 개봉했던 독립영화를 보더라도, 김태곤 감독의 <독>은 행복한 가족의 이면에 숨겨진 비밀을 공포로, 안슬기 감독의 <지구에서 사는 법>은 권태기 부부의 이야기를 외계인 남편과 지구인 부인이라는 SF적 설정으로, 여명준 감독의 <도시락>은 결투가 허용된 가상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남자의 대결을 액션물로 풀어가며 두드러진 장르적 경향을 보여줬다.
이 같은 경향은 12월 10일 개막한 ‘서울독립영화제 2009’(이하 ‘서독제’)에서도 눈에 띄게 발견된다. 서독제 웹데일리를 통해 “장르적인 문법이나 재미를 연출하는 방법이 많이 탁월해진 것 같다.”는 김이환 예심위원(이자 소설가)의 말처럼 장르의 화술에 충실한 독립영화가 요 몇 년 새 크게 늘어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에로티시즘’을 주제로 한 옴니버스영화이자 개막작인 <원 나잇 스탠드>의 두 번째 에피소드는 미스터리 화법으로 여자의 욕망을 말하고, 심명훈 감독의 단편 <드라이브>는 킬러인양 구는 배우지망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느와르의 분위기를 풍기며, 올해 미쟝센 단편영화제 대상 수상작이자 단편경쟁 부문에 오른 조성희 감독의 <남매의 집>은 구체적인 시공간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 독특한 설정으로 SF와 미스터리와 공포를 오가며 복합적인 장르 양상을 보여준다.
2009년 한해 <워낭소리> <똥파리>와 같은 작품의 흥행이 독립영화의 붐을 이끌었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장르적 영화의 출현이 더 큰 사건이라고 본다. <워낭소리>와 <똥파리>가 이룬 성과를 폄하할 의도는 없지만 두 영화의 흥행 이면에는 뭔가 이벤트적인 요소가 기저에 깔려있었다. <워낭소리>는 복잡다단한 도시민들의 삶에서 농촌에 대한 추억이 스펙터클한 볼거리로 화했다는 느낌이 들고, <똥파리>의 경우는 각종 국제영화제에서의 잇따른 수상 경력이 영화의 완성도 이전에 이슈로 작용한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워낭소리>와 <똥파리>가 독립영화의 지속적인 붐을 이끌기에는 애초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장르영화는 아직 독립영화계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최우선적으로 관객의 재미를 담보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독립영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이끌어내기에는 장르만큼 좋은 것은 없다.
할리우드 얘기를 잠시 해보자면, 지금은 거장의 반열에 오른 감독들 중 장르를 적극 차용하며 데뷔작에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우가 적지 않다. 샘 레이미는 <이블 데드>에서 그 유명한 악마의 시점 숏과 ‘인형극’스러운(?) 특수 분장을 통해 코믹호러로 불리는 새로운 경지의 공포영화를 완성했고, 코언 형제는 <분노의 저격자 Blood Simple>에서 하드보일드 소설과 필름 느와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장르꾼이라는 극찬을 받았으며, 쿠엔틴 타란티노는 <저수지의 개들>에서 범죄영화를 끌고 와 특유의 수다와 팝컬쳐에 대한 인용으로 주류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한국영화 역시, 그 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류승완 감독은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4개의 단편을 각기 다른 장르로 구성함으로써 평단과 관객의 호응을 동시에 이끌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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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전설적인 데뷔작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저예산 독립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저예산의 한계를 장르문법에 기반을 둔 이야기의 힘으로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풍잎> <비가 내린다> <생산적 활동> 등으로 독립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오점균 감독은 <경축! 우리사랑>을 발표한 후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이야기를 가장 흥미 있는 방법으로 전달하는 할리우드 장르 문법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야 한다. 단지 할리우드 것이라고 틀에 박힌 이야기, 전형적인 구성이라고 깎아내릴 건 아니다. 저예산영화들도 필요하다면 할리우드 장르를 적극 받아들여 관객에게 어필해야 한다.”
장르는, 영화나 문학에서 쓰일 때 비슷한 소재와 배경, 그리고 전개구조를 지닌 유사 이야기 형태를 의미한다. 특히 장르영화는 감독과 관객 간에 화술과 스타일에서 어떤 규칙을 전제하는 까닭에 마치 게임처럼 인식돼온 측면이 강하다. 하여 장르영화는 굳이 큰돈을 들이지 않아도 제작이 가능할 뿐 아니라 장르 규칙에 대한 강제성이 크지도 않아 이를 비트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이야기로 기능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저예산에 맞는 장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장르가 저예산으로 가능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름난 배우의 섭외, 컴퓨터그래픽의 사용 없이도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용이하고 볼거리를 강화할 수 있기에 장르만큼 적합한 용기는 없는 셈이다. 다시 말해, 색다른 소재와 파격적인 설정에 드라마를 끼워 맞추는 대신 이야기에 장르성을 강화하고 그 속에서 색다른 시도를 해야 독립영화도 좀 더 지속적으로 관객의 관심을 끌기가 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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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에서 발견되는 장르적 움직임은 이런 인식 변화에서 기인한다. 주류 영화계와는 차별된 소재와 이야기를 다루는 것에는 예전과 변함이 없지만 이를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대중친화적인 사고의 폭이 유례없이 넓어진 게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장르적 경향이 강해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지금 독립영화에서 발견되는 장르적 특징은 장르의 화법을 부분적으로 차용한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오로지 장르의, 장르를 위한, 장르에 의한 영화를 볼 날이 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앞서 소개한 <남매의 집>이 <사사건건>이라는 제목의 옴니버스영화에 포함돼 내년 1월 상영을 확정했고 바로 그 다음 달에는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일생 생활 속에 침투한 생계형 좀비라는 설정 하에 연출된 6개의 단편을 모은 <이웃집 좀비>가 개봉을 기다린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전주국제영화제의 간판 프로그램이랄 수 있는 올해 <숏!숏!숏!>의 면모다. 전주영화제가 일찍이 주목했던 디지털을 내세운 단편영화 프로젝트인 <숏!숏!숏>은 그간 우리가 작가라고 부를만한 감독들에게 집중된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올해는 변화를 꾀했다. ‘공포와 판타지’라는 영화형식을 공유하며 제작할 계획인 것. 참여하는 감독의 면면을 살펴보면 장르영화를 통해 두각을 나타낸 감독이 대부분이다. <독>의 김태곤 감독, 의학스릴러로 주목을 받았던 <리턴>의 이규만 등이 그렇다. 장르를 내세운 이번 전주영화제의 <숏!숏!숏!> 프로젝트는 그런 면에선 상징적이다. 뭐랄까, 디지털, 제3세계 영화로 대변되는 전주영화제가 장르에 문호를 개방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를 어떤 신호로 보아도 무방할까. 중요한 건 이제 장르가 독립영화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글_허남웅(장르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