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궁상 맞았지만...
겨우 장편영화 한 편을 연출해 본, 그나마도 재치 있는 전작의 명성에 기댄 흔하디 흔한 속편에 불과했던 〈식인어 피라니아 2〉를 찍은 31세의 젊은 감독의 새 영화에 큰 기대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예산은 부족했고 스타 캐스팅은 당연히 불가능했으며 이야기는 히트와 거리가 있어 보이는 B급이었다. 비슷한 또래의 초짜 프로듀서가 제작을 맡았고, 유명세가 낮은 젊은 배우로 출연진을 꾸렸으며, 낮은 제작비를 최대한 활용해 사람을 노리는 킬러 로봇이 등장하는 B급 SF영화를 찍었다. 부족한 예산으로 영화를 찍기 위해 당초 기계가 지배한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고 싶었던 감독은 배경을 (미래 세계를 꾸미기 위해 예산을 소모할 필요가 없는) 현대로 바꾸어야 했다. 그리고 많은 전설의 시작이 그런 것처럼, 보기 좋게 성공했다. 바로 〈터미네이터〉가 개봉했던 1984년의 이야기다.
기계가 세상을 지배한 미래 세계에서 인간 반란군을 이끄는 아이를 낳을 여인 사라 코너를 맡은 린다 해밀튼은 1986년 화제작 〈킹콩2〉를 거쳐 1989년 TV 드라마 시리즈 〈미녀와 야수〉의 히트로 당대의 스타로 성장한다. 무자비한 킬러 로봇 터미네이터로부터 사라 코너를 구하기 위해 아들 존 코너가 미래에서 보낸 남자 카일 리스 역을 맡은 마이클 빈은, 큰 배우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툼스톤〉〈더 록〉 때처럼 나쁘지 않은 조역 배우로 활약하고 있다. 당시에 초짜 감독이었던 제임스 카메론은 〈터미네이터〉로 자신의 재능을 증명한 후 히트한 SF 공포물 〈에이리언〉의 속편 감독을 제안받았다. 그리고 그는 〈식인어 피라니아 2〉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빼어난 스타일리스트가 창조한 SF 공포영화의 컨셉을 반복하기보다 자신이 훨씬 잘 할 수 있는 액션영화를 찍기로 마음 먹었고 〈에이리언2〉는 전편보다 더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 몇 안되는 영화이자 전편의 흥행을 뛰어넘은 성공작이 되었다. 당초 카일 리스 역을 제안받았다가 터미네이터 역으로 방향을 튼 주연배우 아놀드 슈왈츠네거는 아시다시피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됐다.
속편은 전설이 되고...
좋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야심작 〈어비스〉가 흥행에 실패한 후 감독 제임스 카메론이 추진한 영화는 자신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영화 〈터미네이터〉의 속편이었으니,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실패한 야심작 〈어비스〉에서 사용했던 움직이는 액체 특수효과를 새 작품에 써먹어보기로 한 제임스 카메론은 〈터미네이터2〉에서 액체로 이루어진 새로운 터미네이터를 고안하고, 전편에서 막강한 악당이었던 원조 터미네이터 아놀드 슈왈츠네거를 사라 코너와 존 코너의 조력자로 등장시키는 역할 전복을 선보인다. 전편에 이어 사라 코너 역을 맡은 린다 해밀튼은, 배우로서 필모그래피 사상 최고의 역할을 얻었다. 연약하고 한 남자에게 도움을 받기만 했던 〈터미네이터〉 시절의 소녀는, 아이를 미래에서 온 살인자에게서 구하기 위해 강해진 어머니로 변했고 제임스 카메론이 <에이리언2>의 시고니 위버를 통해 구현한 강력한 여전사 캐릭터의 완성형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그 해 박스오피스와 SF팬들의 기억과 액션영화 팬들의 성감대를 강타한 초특급 SF 액션 영화의 탄생이었다. 그렇게 <터미네이터2>는 <대부2> 이후 전편을 압도하는 속편이 되었고, 시리즈의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제임스 카메론은 더 이상 이 초대박 시리즈에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공표한다. 허나, 영악한 할리우드가 이 근사한 시리즈를 가만 놔둘리가 있겠는가? 전지구적으로 터미네이터 원투편이 쏟아부은 이미지는 너무나 강렬했다. 매력적인 여전사와 미래를 구하는 홈리스 꼬마가 있고, 근원적인 공포를 기계로 만든 인골형 로봇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액체 로봇이 있다. 게다가 인공지능을 얻은 기계가 지구를 지배하고 이를 상대하는 인간 저항군이라는 세계관은 1999년 〈매트릭스〉가 나올 때까지 어떤 주류 영화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이러한 매력이 제임스 카메론이 감독을 맡지 않고 사라 코너가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터미네이터3>가 제작된 배경이었다. 결과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꽝'이었다. 너그럽게 보자면 무난한 범작이자면 첫.둘쨰 형님들이 워낙이 잘 나서리 비교당한 셋째의 서글픈 숙명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시리즈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역할 하나를 했다는 점이 중요한데, 전편 〈터미네이터2〉에서 역사가 바뀜으로써 일어나지 않게 된 '심판의 날'이 결국 벌어졌고,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것. 다시 말해, 속편이 이어서 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완결된 시간의 균열에 시리즈가 생기고...
미래전쟁이 벌어질 미래를 바꾸고 시간을 닫아버린 줄 알았던 〈터미네이터2〉가 〈터미네이터3〉에 의해 다시 미래전쟁이 벌어질 피하지 못할 시간으로 변해버렸을 때, 〈터미네이터2〉에서 안심했던 사라 코너 모자에게도 다시 그들의 목숨을 노린 〈터미네이터〉가 나타났다. 이미 〈터미네이터3〉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홈리스 운명의 아들을 대항군 사령관으로 길러낸 강한 어머니 사라 코너. 장성한 아들이 대활약하는 〈터미네이터3〉이후의 작품에서는 당연히 얼굴을 보일 수 없지만 이미 죽어 관에 들어갔다던 〈터미네이터3〉에서도 시체 대신 무기를 관에 넣어 미래를 대비한 이 여인을 헐리웃이 놔두고 싶어할 리가 없다. 또 다시 터미네이터가 사라 코너 모자를 노리고 나타나는 것으로 출발하는 〈터미네이터2〉와 〈터미네이터3〉 사이의 이야기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 연대기〉는 그런 노림수가 낳은 TV 시리즈다. 생각만큼 큰 인기를 얻지는 못한 탓에 새롭게 시즌3가 나올 수 있는지는 불투명하지만 2008년 시즌 1과 2009년 시즌 2가 흥미진진하게 〈터미네이터〉 세계의 빈 곳을 이어가는 드라마 시리즈다. 미국 TV 드라마인 관계로 한국에서는 (공식적으로는) 보기가 쉽지 않고, 배우도 익숙하지 않은 이가 많지만, 린다 해밀튼보다 훨씬 부드러운 이미지의 (<300>에서 강한 의지를 지닌 왕비를 맡았던) 레나 헤디 버젼 사라 코너도 볼 만 하고 꽃미남에서 원숭이로 크는 중에 있는 토마스 데커 버젼 존 코너도 쏠쏠하다. 그리고 카일 리스 가족과의 생각보다 더 깊은 인연 역시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 연대기〉에서나 볼 수 있는 후일담.
미래전쟁은 벌어지고...
요즘 할리우드에서는 이런 말이 떠돈다 한다. 새롭게 기획되는 액션영화의 주연은 웬만하면 다니엘 크레이그와 크리스천 베일을 염두에 둔다. 그 중 하나인 크리스천 베일에게 존 코너 역을 맡긴 것부터가 반쯤 성공이라는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은 캐스팅과 예고편 만으로도 인간 대항군을 결성해 고군분투하는 존 코너의 영웅담 혹은 고생담이 눈에 선하다.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말숙한 정장을 입고 사람 쳐죽이고, 배트맨 시리즈에서 박쥐 가면 쓰고 고담시를 누볐던 이 남자에게 미래 인간의 운명이 걸려있다는 뜻이다. 이건 분명 그럴싸한 선택이다. <터미네이터2>에서 존 코너를 맡았던 에드워드 펄롱은 그 시절 미소년 흔적은 죄다 실종된 중늙은이로 추락했고, 홈리스 운명을 이어 받은 〈터미네이터3〉의 존 코너인 '영화 다 망치는 원숭이' 닉 스탈은 본의 아니게 미래전쟁을 <혹성탈출>로 이끌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 존 코너 옆에는 〈터미네이터3〉시절의 클레어 데인즈보다는 훨씬 미인이자 현명한 얼굴을 가진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가 아내이자 조력자인 케이트 브루스터를 맡아 함께 하고, 강한 러시아 억양에도 민첩한 두뇌놀림을 보여줬던 〈스타트렉: 더 비기닝〉의 파벨, 안톤 옐친이 존 코너의 오른팔이자 아버지(!) 카일 리스 역을 맡아 사령관을 보좌한다. 그리고 이야기에는 이전 <터미네이터>에서는 다루지 못한 기계와 인간 사이의 복잡한 인연이 담겨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기계인간의 새로운 형태를 선보였던 〈터미네이터〉는 시리즈가 되며 더욱 풍부하게 이야기를 붙이고 있다. 기계인간보다 존 코너를 전면에 내세운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은 〈터미네이터3〉가 욕 먹어 가며 억지로 열어 놓은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새로운 발판이 될 듯 하다.
2009년 5월 25일 월요일 | 글_유지이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