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막이 내린 제 62회 베니스 영화제에서는 작년 김기덕 감독의 ‘빈 집’ 이 감독상을 수상한데 이어 또 한 편의 한국영화가 주목을 받았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 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비록 본 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깐 영화제 감독상에 빛나는 박찬욱 감독의 연출력과 공식석상에서 단아한 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며 영화와는 대조적인 아름다움을 뽐내었던 이영애의 대한 현지 반응은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해외 언론으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친절한 수아씨’ ‘친절한 재석씨’ ....
이처럼 우리는 TV, 라디오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 매체에서 ‘친절한 금자씨’ 를 패러디한 카피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한 편의 영화제목이 주는 영향력치고는 꽤나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여기에서 ‘친절한’ 이란 말은 원래 의미 그대로의 단어가 아님을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 “참 친절하시네요.” 라는 말을 들었다면 이제는 마냥 기뻐할 일 만은 아닐 듯싶다.
이렇듯 각종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친절한 금자씨’ 는 영화 자체도 ‘웰-메이드(well-made) 상업영화’ 라는 칭호에 걸맞게 평단으로부터나 관객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으며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처음 이 영화가 대중들의 시선을 확 끌었던 점은 복고풍 원피스에 썬그라스를 낀 전혀 친절해 보이지 않는 이영애가 등장하는 포스터! 이 흰 종이에 선명하게 찍힌 ‘친절한 금자씨’ 라는 조금은 낯선 영화제목 때문일 것이다.
대중들에게 영화 컨텐츠 그 자체보다 먼저 노출되는 것이 영화제목인 만큼 영화 관계자들은 영화제목을 짓기 위해 유명한 점집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굿을 한다는 속설도 있다. 한 주에 적게는 2~3편 많게는 6~7편이 개봉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각 제작사는 저마다 관객들의 눈길을 한 번에 끌기 위한 제목을 짓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데 그런 영화제목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호기심 자극하기, 제목 한 군데 포인트 주기, 관객과 친숙한 단어 쓰기... 등. 이런 갖가지 영화제목 유형 중 앞서 언급한 ‘친절한 금자씨’ 와 같이 영화내용과는 전혀 상반된 반어적인 제목들이 있다. 이러한 반어적 제목들은 영화를 보기 전 관객들의 궁금증을 유발할 뿐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영화내용과 제목이 충돌하는 묘한 정서적 충격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사랑니>의 정지우 감독의 전작 ‘해피엔드’ 는 실직한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내의 옛 남자. 이 세 명이 서로 다른 욕망으로 인해 파경으로 치닫는 처절한 치정극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해피엔딩을 꿈꿔왔던 그들이었기에 ‘해피엔드’ 라는 영화제목은 관객들에게 더욱 애절하게 와 닿는다.
한국전쟁 당시 참혹한 현실 속 우리 조상들의 자화상을 묵묵히 보여주었던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 영화 마지막에 성민이가 창희의 라이터를 켜보며 어디에선가 그가 살아있음을 희망하듯, 이광모 감독은 고난과 절망의 시대에도 늘 희망의 불씨를 간직하고 사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기에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을 보면 그 당시도 ‘아름다운 시절’ 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추억한다. 비슷한 예로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 할 수 있다.
끝으로 얼마 전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에서는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한 순간에 벼랑 끝까지 몰린 한 남자의 무모한 복수극을 처참하게 보여주는데 그가 한 때 꾸었던 달콤한 꿈이 한낮 일장춘몽과 같은 덧없음이었음에 제목이 더욱 슬프게 느껴진다.
두 번째로는 영화내용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으나 상징적인 ‘메타포’(암시적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그 영화를 반어적으로 표현하는 제목들이다. 주로 이 메타포들은 암울한 절망 속에 비춰진 한 가닥 희망에 관한 은유로 쓰이고 있다. ‘오아시스’ 와 같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과 ‘축제’ ‘소풍’ 등이 여기 속한다.
이창동 감독은 자신이 지금껏 만든 세 편의 영화 모두에서 이런 반어적 제목들을 사용했다. 지긋지긋한 현실을 탈출하여 가족 모두가 함께 살기를 소박하게 꿈꾸었던 ‘초록 물고기’ 의 막동이. 암울했던 시대 상황 속에 자신마저 변해버린 ‘박하사탕’ 의 영호. 사회의 편견 속에서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었던 ‘오아시스’ 의 종두와 공주. ‘나, 다시 돌아갈래’ 라고 외치는 영호의 독백처럼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암울했던 시대와 사회 현실 속에서 희생당하며 순수했던 과거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이창동 감독은 그 순수의 메타포로서 반어적 제목들을 써왔다.
이러한 반어적 영화제목들은 장편영화 뿐 아니라 오히려 단편영화에서 더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소설에서보다 시에서 반어적인 표현이 즐겨 쓰이듯 짧은 시간 안에 영화내용을 보다 함축적으로 관객들에게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영화로 송일곤 감독의 단편영화 ‘소풍’ 을 들 수 있다. IMF 사회현실 속에서 실직한 가장이 가족들과 동반자살을 기도하는 이 끔찍한 영화는 ‘소풍’ 이라는 제목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더욱 잔인하게 와 닿는다.
영화제목을 짓는데 있어 누군가는 관객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제목이 좋은 제목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는 제목이 좋은 제목이라고 한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좋은 영화에는 좋은 영화제목도 있고 나쁜 영화제목도 있겠지만 나쁜 영화에 좋은 영화제목이란 없다. 어차피 영화제목 역시 영화의 일부분 일 테니까.
앞서 나열했던 반어적 영화제목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보석에 아름다운 이름을 붙이듯 좋은 영화에 감명 받은 관객들은 그에 걸맞은 제목으로 그 영화를 기억하길 원한다. 그 점에 있어 반어적 영화 제목은 그 울림이 크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받은 감동은 그 반어적 영화제목으로 인해 다시 한 번 감정선이 증폭된다. 왜 어렸을 적 잘못을 저지른 어린 아이에게 “자~알 한다.” 라는 어머니의 말이 더욱 두렵고 무섭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반어적 불협화음이 주는 묘한 정서적 쾌감!….
그런 정서적 충격이라면 얼마든지 감수할 터이니 앞으로도 좋은 영화에 못지않은 멋지고 낯선(?) 영화제목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