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행 급행열차’를 예약한 건 아닌지
서른 넘긴 싱글녀에게 명절은 ‘지옥의 한철’이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뿐. 나처럼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싱글들에게 명절은 1년 중 가장 유유자적한 기간이다. 이때만큼 여유로운 낮잠과 휴식을 확실히 보증해 주는 기간은 흔치 않다. 물론, 거기에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따른다. 웹툰 <신과 함께>를 보면 명절 때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걸 불효라고해서 ‘한빙지옥’에서 벌을 내리던데, 나는 ‘추석행 열차’를 피한 대신 ‘지옥행 급행열차’를 예약한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올해에도 추석 전에 미리 고향을 다녀오는 ‘새치기 전법’을 운용, 명절 증후근이 찾아 올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가며 시달리는 교통 체증에 대한 피로와, 친척들로부터 받는 결혼 독촉 스트레스와, 남의 연애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주시는 이웃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가 된 느낌
그렇다고 해서 연휴에 딱히 거창한 계획을 세운 건 아니다. 추석이나 설날 같은 민족 대명절에 해외여행을 가는 건, 아까운 ‘돈 놀이’라는 게 내 지론이다. 많은 사람이 빠져나간 서울은 그 자체로 이미 외국 같기 때문이다. <통증>을 보면, 남순(권상우)과 함께 다니는 형 범노(마동석)가 이런 말을 한다. “서울에 서울토박이가 몇 명이나 될 것 같아? 나처럼 촌에서 올라와 대가리 디밀고 한번 붙어보겠다는 놈들이 대부분이야.” 나 역시, 그 ‘놈들’ 중 한명. 아마, 이 글을 읽은 당신들 대부분도 그러하리라. 서울에 거주하는 서울 토박이는 1.5%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이를 확신케 한다. 명절 때면 으레 찾아오는 ‘민족대이동’의 진풍경이 이를 짐작케 하고 말이다. 사람들을 꾸역꾸역 토해 낸 후 속살을 드러낸 서울은, 웬만한 해외 도시보다 더 생경하고 새롭다. 하이라이트는 명절 당일 아침이다. 그때 서울거리를 걸으면, 마치 <나는 전설이다>의 로버트 네빌(윌 스미스)이 된 느낌이 든다.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가 된 느낌말이다. 네빌처럼 타임스 스퀘어를 가로지르며 사슴을 사냥하지는 않지만, 도로 한복판을 미친 척 걸어보는 모험 정도는 시도한다. 그렇게 홀로 로드무비를 찍다가 멀리서 사람의 기척이 들리면, 그 때는 <더 로드>의 주인공 남자(비고 모르텐슨)에게 빙의된다. 나 말고 살아남은 생존자가 또 있구나,하는 반가움과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온다.
30대가 됐음을 알리는 신호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불쑥
먹어도 먹어도 손이 가는 게 ‘새우깡’이라면, 봐도 봐도 눈이 가는 건 <섹스 앤 더 시티>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풍성한 TV상차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번 추석에도 <섹스 앤 더 시티>와 마주했다. 내가 <섹스 앤 더 시티>를 처음 접한 게 언제였더라. 아마, 재수생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스스로의 기억에 확신이 없는 건, 처음엔 이 드라마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칼리스타 플록하트 주연의 <앨리 맥빌>을 즐겨보던 나에게, <섹스 앤 더 시티>는 제목부터 뭔가 거부감을 주는 드라마였다. “미남은 침대에서 별로야. 노력하지 않아도 여자가 많으니까”라는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의 연애철학을 이해하기엔 당시의 내 연애 경력은 너무 초라……(흠!), “그 남자는 정액 맛이 정말 이상해”라는 사만다(킴 캐트럴)의 말에 환호하기엔, 나는 또 너무 순진했다. 그 땐, 그랬다.(응?) 이 드라마를 챙겨보기 시작한 건, 20대 중반에 이르러서다. 그 땐 내 관심사도 지구촌의 뭇 여성들과 다를 바 없었다. 주인공들의 속사정보다, 구두와 드레스와 게이남자친구와 파티와 브런치에 더 열광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들과 같은 30대에 들어서는 순간, 드라마는 내가 이전에 보던 그 드라마가 아니었다. 심심하다 여겼던 고지식한 샬롯의 에피소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미혼모 미란다의 사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 것도, 캐리의 구두보다 그녀의 밀린 월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순전히 나이 탓이라고 하면 지나친 과장이려나. 30대가 됐음을 알리는 신호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그렇게 불쑥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이 드라마는 싱글녀가 명절에 챙겨보기에 그리 유익한 프로그램은 아닌 듯하다. 다음 명절에는 보지 말아야지.
아름답게 퇴장하기의 어려움
세상엔 캐리처럼 사랑에 뜨거운 여자만 있는 건 아니다. 오프라 윈프리 같이 세상에 뜨거운 여인도 있다. 연휴에 만난 또 하나의 프로그램, <오프라 윈프리 쇼> 고별무대는 ‘아름다운 퇴장’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나에게 주문했다. 윈프리는 자신의 은퇴무대를 위해 모인 톰 크루즈, 톰 행크스, 마돈나, 비욘세, 윌 스미스, 마이클 조단, 스티비 원더 등의 초호화 게스트들을 바라보며 ‘언블리버블!’, ‘오 마이 갓’의 표정을 연신 지어보였다. 그건, 떠나는 자가 지어보일 수 있는 최고의 행복한 미소 같았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쓴 이형기 시인이 봤으면 참으로 기뻐할 광경 같기도 했다. 하지만, 떠나는 이의 뒷모습이 아름답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비슷한 시간, 다른 케이블 채널에서는 세금탈루 혐의로 논란을 일으킨 강호동의 은퇴선언 기자회견 녹화 방송이 방영되고 있었다. 뉴스와 트위터에서는 오세훈의 불명예 퇴장이 남긴 후폭풍이 뜨거웠다. 새삼, 세상은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법, 연봉 높은 회상에 입사하는 법, 멋지게 정치계에 입문하는 법만 알려줬지, ‘아름답게 퇴장’하는 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2011 추석이 퇴장하며 내게 알려준, 씁쓸한 교훈이다
2011년 9월 15일 목요일 | 글_정시우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