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4년, 오셀로
지금 이 순간, 바로 지금, 늙고 검은 숫양이,
어르신의 하얀 암양 위에 올라타고 있습니다. 일어나세요. 일어나!
종을 울려서 코를 골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세요.
안 그러면 악마가 어르신께 손자를 안길 겁니다.
당신의 딸과 무어인이 지금 몸을 비비며 짐승을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지금, 늙고 검은 숫양이,
어르신의 하얀 암양 위에 올라타고 있습니다. 일어나세요. 일어나!
종을 울려서 코를 골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세요.
안 그러면 악마가 어르신께 손자를 안길 겁니다.
당신의 딸과 무어인이 지금 몸을 비비며 짐승을 만들고 있습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걸작 『오셀로』에서 이아고가 브러밴쇼에게 그의 딸 데스데모나가 무어인 오셀로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고 무례하게 전하는 장면이다. 이 작품이 쓰여 진 것은 1604년으로 추정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오셀로는 ‘베니스의 무어인’ 즉 흑인이다. 아리따운 백인여성 데스데모나와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유색인종 콤플렉스와 인종차별이 복합적 작용을 일으켜 불러낸 질투와 복수의 서사. 그해 11월 왕실극단에 의해 초연된 이래로 유구한 세월동안 연극과 오페라와 영화로 만들어진 이 작품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고왔던 것만은 아니다.
그중 압권은 시인이자 극작가인 토마스 라이머의 평가인데 그는 “영국 최악의 극작가로 셰익스피어를, 그가 쓴 최악의 희곡으로 오셀로”를 꼽았다. 사실 오셀로의 줄거리는 이탈리아 작가 지랄디 친티오에게서 차용된 것이다. 라이머는 오셀로를 평가하면서,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음직한 거짓말보다 더 불쾌한 것은 없다. 그리고 이렇게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로 가득한 연극은 정말 처음 본다. …” 그는 베네치아 사람들이 자신들의 장군으로 흑인을 뽑을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 그것도 부유하고 아름다운 백인 여자와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이해수준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무어인은 하찮은 매춘부나 흑인 촌년하고 결혼해야 한다. 그런데 셰익스피어는 그에게 고관의 딸이자 상속자를 안겨주었다.” 덧붙여, 셰익스피어가 백인 천사와 흑인 악마의 사랑을 그럴 듯하게 만든 것에 일말의 죄책감도 갖지 않았다고 힐난하기도 했다. 만일 동시대인들이 라이머의 말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오셀로』는 더 이상 공연되거나 번역되지 않았을 것이고, 셰익스피어의 위상 또한 흔들렸을지 모른다. 다행히도 이러한 공격은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잦아들었고 더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1974년, 파스빈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빌려 만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 주인공 에이미가 모로코 출신의 이주노동자 알리와 사랑에 빠지고 함께 사는 동안 겪는 가족과 이웃의 편견가득한 시선과 모멸과 내적갈등을 통해 당시 독일사회에 피어오르던 파시즘의 준동을 경고한다. 영화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폭넓은 지지를 획득한 것은 아니었다. 파스빈더는, 영화의 사실주의적 궁극적 목적이 “너무나 낙관적 우화를 약간 현실 쪽으로 끌어가고, 그것을 관객에게 느끼게 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즉 영화의 기능은 즉각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영화는 변화와 정치적 활동에 대한 사소한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년여성과 유색인 이주노동자 사이의 사랑, 게다가 연하관계를 곱게 보아준 독일인이 몇이나 됐을까?
이 영화의 원전 격인 (파스빈더가 흠모해마지 않던) 더글라스 서크의 멜로드라마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의 주인공들은 환경과 계층만 다를 뿐 모두 백인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에 와서야 계층과 인종이 다른 두 사람을 내세우게 된다. 서크가 활동하던 시절 즉, 당시 미국사회의 정서를 감안할 때 백인과 흑인의 사랑 특히 백인여성과 흑인남성 사이의 로맨스를 그린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체로 유색인종 간의 사랑 앞에서 보수주의자들이 떠올린 것은 고결하고 거룩한 어머니의 형상이요, 백인여성이 지켜야 하는 또 하나의 정절이었다. 검둥이가 내 누이 내 사촌의 흰 살결을 만진다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이렇게 볼 때 포르노가 금기를 가뿐하게 돌파하며 백인보수주의자들의 도그마를 보란 듯이 조롱해왔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하다. 포르노에서 흑인남성과 백인여성의 섹스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거론한 세 영화가 알려주는 또 다른 사실은, 피부색을 초월한 사랑이 생각 밖으로 여러 사람을 숨 가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 외에도 영화 바깥에 위치한 다양한 층위의 이해관계자들과 동시대 관객이 그들이다. <반두비>를 논란의 중심으로 밀어 넣은 모호한 실체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고생과 이주노동자의 관계성을 문제 삼는 일반적 비판과는 달리 영화가 내포한 예민한 사안을 돌려세우는데 골몰하는 부류도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 모방위험’ 따위는 극히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쯤 되면 일상의 파시즘이 준동하던 전후 독일사회와 2009년 이 땅의 모습이 무서울 정도로 유사하지 않나? 그 점이 불편하다손 쳐도 대체 뭐가 그리 두렵단 말인가. 그렇게 배짱이 없어서야. 영화 한 편에 숨을 헐떡이며 불안해하는 이 땅의 문화행정가들이여, 그러지 말기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말, 영화제목에 불과한 게 아니다. 신경정신과 임상실험에서도 입증되었다더라.
2009년, 반두비
여기 손이 있다. 이방인을 흘기는 중년부부의 성경을 잡은 손, 일간지를 움켜쥔 회사원의 손, 잔돈을 바닥에 내려놓는 매장종업원의 손, 고의부도를 내놓고도 계약에 열중인 악덕기업주의 손, 부당한 고용계약서를 들이미는 사무원의 손. 우리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러저러한 손들.
또 다른 손. 가히 ‘마법의 손’이다. 어쩌면 1년 전 촛불을 쥐었을 가냘픈 여고생의 손, 영화가 시작되면 원어민영어학원의 전단지를 집어 드는 손이고 빨래를 너는 손이다. 그런데, 이 손의 역할이 변화무쌍하다. 학원수강료 마련을 위해 주유기를 잡던 그녀의 손이 어느 순간 남성의 성기를 쥐더니 원어민강사의 그것마저 잡아 비틀어 한줌이 안 되도록 만들어버렸을 때, 골프채를 휘두르고 신문을 팽개치며 호통 칠 때, 이 영화 막장이 아니냐고 혀를 내두를지도 모른다. 대체 이 아이는 나중에 뭘 잡으려고 이렇게 대책 없이 막 잡아 흔드느냐고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시라. 최소한 이 소녀가 죽창이나 쇠파이프를 잡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 모든 것은 손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마무리 또한 그러하다. 이를테면 부조리하고 편견 가득한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던 소녀가 마침내 음식을 제 손으로 집어 드는 순간, 방금 전까지 디제시스적 공간을 비집고 들어와 유영하던 영화 바깥의 이야기와 감독이 쉼 없이 길어 올린 갖은 정치코드와 도발적 언술은 한 순간 사라지고 만다. 이것은 참으로 희귀한 경험이다. 100분여를 좌충우돌 종횡무진 달려와 놓고는, 무슨 일 있냐는 듯이 겨드랑이에 두 손을 넣어 비비면서 머쓱하게 미소 짓는 소녀. 그러므로 당신이 안도의 숨을 쉬고 싶다면, 영화에 담긴 이야기를 올곧게 파악할 요량이면 반드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언젠가, 누군가는 그려냈을 이야기. 정직하고 유쾌하며 뜨끔하기까지 한 영화 <반두비>는 ‘화창한 봄날 겨우내 묵힌 빨래를 옥상에 널고 돌아설 때의 개운함’으로 기지개 피게 만들고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삶의 양상을 되돌아보도록’ 독려하는, 그런 영화다. 영화를 둘러싼 논란이 이를 입증해보였다. 신동일이 돌아왔다!
2009년 6월 30일 화요일 | 글_백건영 편집위원(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