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보다 영상에 익숙한 세대라지만, 여전히 스토리텔링에서 영상은 문자를 바라보고 있다. 역사라고 해봐야 기껏 백년을 갓 넘겼을 뿐인 영화가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 문자와 스토리텔링에서 경쟁하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일까. 하지만 영상의 가능성을 확장한 많은 작가들이 새로운 영화를 통해 문자와 다른 영역을 발견해왔다. 가끔은, 두 영역이 흥미롭게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문자를 이용한 스토리텔링, 소설을 영화로 옮긴 경우야 너무도 많아 단순한 나열이 불가능할 정도다. 각색물의 경우, 영화보다 역사가 짧은 컴퓨터 게임이나 역사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만화의 경우와는 비교가 안된다. 보통은 그래서, 각색한 영화가 원작에 못지 않은 경우부터 접근하곤 한다.
원작만큼, 혹은 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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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작자 데이빗 셀즈닉이 진두지휘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감독의 개성을 느끼기 부족하다면, 존 스타인벡의 소설을 영화화한 존 포드 감독의 〈분노의 포도〉같은 작품도 있겠다.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존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 이외에도 제임스 딘 주연 영화 〈에덴의 동쪽〉이나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구명선〉을 비롯한 수많은 할리웃 영화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뛰어나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같은 영화가 너무 멀리 있다 느껴진다면, 가장 최근의 경우를 기억해도 좋겠다. 규모와 환상적인 배경 때문에 영화화되지 못했던 수많은 판타지 소설을 영화화 붐으로 이끈 장본인이자, 원작팬마저 만족시킨 괴력의 작품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능히 ‘원작급’ 포스를 가지는 각색 영화로 꼽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빼어난 특수효과와 프로덕션 디자인이 원작을 잘 이해하고 있는 재능있는 감독을 만났을 때 얼마나 훌륭한 결과로 나올 수 있는지 더할나위 없는 사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작보다 비범한, 특별한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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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까지 합치면 더 많아진다. 스티븐 킹의 중편 소설집 〈사계Different Seasons〉는 많은 스티븐 킹 팬이 좋아하고 때로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꼽기도 하는 이야기로 즐비하다. 소설집에 포함된 작품은 각각 영화가 되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쇼생크 탈출〉이다. 워낙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덕에 영화가 소설을 뛰어넘는 사례로 꼽히기도 하지만, 훌륭한 원작에 더 점수를 주는 경우도 못지 않게 많다. 속칭 ‘한니발 3부작’ 중에 가장 흥미진진한 소설 〈양들의 침묵〉 또한 소설을 뛰어넘는 각색 영화로 꼽히는 경우. 한창 원작자 토머스 해리스가 소설을 쓸 때는 원작 소설을 편드는 경우도 많았으나, 함량이 떨어져 아쉬운 〈한니발〉과 작가 자신이 ‘한니발 3부작’에 함몰된 〈한니발 라이징〉으로 망가진 원작자보다는 안소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 조합이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는 영화 〈양들의 침묵〉이 더 높은 점수를 얻는 추세다.
영상과 문자 사이에서 초점을 찾다
장르 컨벤션을 가지고 기품있는 드라마를 만들어낼 줄 아는 페르난도 메이렐레스가 줄리언 무어, 마크 러팔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같은 안정감있는 배우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면 기대할 만 하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깊고 안정적이었던 전작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원작이 노벨문학상 수상자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라면 좀 갸우뚱하다. 이번에 개봉하는 (할리웃 제목은 심플하게 바꾼 〈Blindness〉였지만) 동명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이야기다. 단순히 스토리텔링 뿐 아니라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은유와 상징을 영화에도 옮겨 놓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행간에 지적인 조각을 심어놓았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스릴러로 옮긴 영화판이나 원작의 서정성을 잃고 액션활극이 되어버린 〈저주받은 자들의 여왕〉같은 경우가 그랬다. 메이렐레스의 전작 〈콘스탄트 가드너〉 역시 원작소설이 있었지만 첩보물의 대가 존 르 카레의 작품이었고, 감독은 이 차가운 이야기를 멜로드라마로 접근했다. 상징과 은유가 넘실대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페르난도 메이렐레스의 감각이 통할까?
세상 모두가 이유없이 눈이 머는 악몽, 영화관에서 이 악몽이 얼마나 밀도 높게 영상으로 옮겨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콘스탄트 가드너>처럼 원작에 버금가는 영화로 재창조 됐으면 좋으련만..아니면 어쩔 수 없고...
2008년 11월 25일 화요일 | 글_유지이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