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서생>이 시나리오의 형태로 충무로를 떠돌 때부터 이미 이 작품이 뭘 해도 한 건은 할 것임은, 알만한 이들은 모두 아는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만큼 <음란서생>은 마치 영화 속의 '흑곡비사'처럼 "장안의 화제작"이었고, <정사>와 <스캔들>을 통해 휘발성 강한 화두를 던지는 데 베테랑이 된 시나리오 작가 김대우는 마침내 쇼킹한 감독 데뷔작과 함께 충무로에 입성했다.
일단 <음란서생>은 과거의 어느 선에 놓여 있지만 엄연히 현재를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윤서의 '흑곡비사'는 선풍적인 신드롬을 일으키며 수많은 추종자를 낳는다. 이 와중에 이른바 '흑곡비사' 폐인들이 생겨나고 이들은 대여한 서책의 여백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한다. 이 의견들 중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내용도 있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한 팬덤이 아닌 인터넷 댓글 문화의 반영으로 읽힌다. (영화는 그것을 노골적으로 읊는다.) 이처럼 <음란서생>은 윤서와 광헌, 황가 등이 일구는 소극의 변두리에 현대 문화의 이미지를 투영시킴으로써 보다 복층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재치있는 수법을 사용한다. 딱히 시대의 고증을 요구하지 않는 사극일수록, 반대로 가장 모던한 현대극이 될 수 있음은 이미 <형사 Duelist>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음란서생>은 과거의 틀에 현재의 쇳물을 담근 혼합물이다.
내용적으로 <음란서생>은 충돌에 의한 폭발을 가진 영화다. 이 때의 충돌은 가치관의 충돌일 수 있고 욕망과 절제가 부딪치는 충돌일 수 있다. 이로 인한 폭발은 비극을 내포하며, 파국의 씨앗을 널리 퍼트리는 행위이다. 이를테면 정빈은 윤서의 배신적인 행위에 대한 분노가, 그 이전에 품어진 윤서에 대한 연정과 충돌하여 스스로 정인의 몰락을 이뤄낸다. 조 내시 역시 윤서에 대한 질투와 정빈에게 품은 연모의 감정 등의 충돌로 인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 끝에 죽음을 맞고, 주인공인 윤서 역시 공맹의 도리를 따르는 사대부 정신과 음란에 끌리는 본능의 충돌, 거기다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와 정빈에 대한 호감 역시 또 하나의 복합적인 충돌을 일으키며, 대가는 그 자신이 몸으로 고스란히 치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한가운데 설명이 되지 않는 인물이 두엇 있다. 허나 왕은 그 내면에 억압된 애정과 (안내상의 연기에서 적잖이 기인한) 냉소적인 태도가 윤서와 정빈의 내연관계로 인해 폭발했다는 식의 억지춘향이 가능하긴 하다. 또한 황가 및 장이 등의 인물은 웃음을 주거나, 내러티브의 전개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지만, 결국 기능적인 역할로 소모되고 마는 영화의 구조적 희생자로 남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광헌이란 인물은 사실상 이 대칭 구도 안에 끼어들어 목숨을 잃을 뻔하고 관직을 잃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인물이다. 말 그림을 통해 영화는 광헌의 내면적 욕구를 얼핏 보여주고는 있지만 이것이 광헌이란 인물의 질주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즉, 폭발은 있는데 그 도화선이 될 만한 대척점은 실종된 것이다. 때문에 비교적 사극이 어색한 이범수가 보여주는 호연에도 불구하고 광헌의 캐릭터는 얼마간의 의문점을 갖는다.
결과적으로 <음란서생>은 과연 이처럼 유쾌한 소극이 어째서 신파의 종착점으로 달려갈 수 밖에 없느냐는 풀리지 않는 질문을 남긴다. 전반부의 소극은 웃음 가운데도 이 콩트의 끝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암시를 넌지시, 그러나 꾸준히 던진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신파, 그것도 사랑의 패배자가 모두를 갈라놓는 뻔하디뻔한 도식적인 결말로 향해야 하는가는 생각해 볼 일이다. 다중적이지는 않지만 따사로운 소극의 끝을 산뜻하게 끝내 소품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 성취를 <아는 여자>가 해냈고, <야수>가 비록 장르의 법칙에 기댈지언정 비극의 씨앗이 잉태하는 파멸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음란서생>은 그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채 쉽고 안전하지만 신선함이 결여된 마무리를 짓는 우를 범했다. 감독에게 있어서는 전반부와 후반부를 농밀하게 꿰어매는 연출력의 부재를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가 다음 작품에 던져진 것이다.
전체적으로 <음란서생>은 행복을 논하려는 영화이다. 인물들은 저마다의 행복을 추구하지만, 가혹하게도 행복은 치명적인 출혈을 감수해야만 하는 통증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윤리를 버리고, 지위를 버리며, 정조를 버리고 심지어 남성을 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행복을 얻은 자는 결국 누구인가? 그 답은 제목이 말하고 있다. 심지어 정사 중에도 갓 이상의 의복을 벗지 않았던 '선비' 윤서는, 종내에는 이마에 '음란'의 낙인이 찍히고 만다. 그러나 상소문을 놓고 고민하던 사헌부 장령 김윤서보다, 새로운 작품을 탈고한 '음란' 작가 추월색이 더욱 '서생'의 풍모를 풍기는 것은 진정 행복을 취한 이가 누구인지 명확히 가리키고 있다. 유난히 제목을 중시하는 김대우는 그 자신이 단어를 구제하고 싶어하는 작가이다. 이를테면 '반칙'이란 네거티브한 단어에 '왕'이라는 구제어를 붙이는 것 말이다. 윤서는 비록 음란서생이 되었지만, 음란이 서생을 옭아매지 못하고 도리어 서생이 음란을 구제한다. 윤서는 "음란한" 서생이 아닌 음란한 "서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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