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스포일러 일수도......
한없이 무거운 검은색과 뜨거운 불꽃을 감춘 붉은색이 교합하다.
상반된 둘의 합이란 그 열정만큼이나 질곡이 있기 마련이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행위는 올리는 사람의 의도가 어떻든간에 다른 사람이 봐 주기를 바라는 소망이 기저에 깔려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구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자신이 직접 작성한 글을 올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봐 주기를 바라고 많이 회자되기를 원하기도 한다.
사대부 집안의 당대최고의 문장가지만 소심한(정말 소심한......) 윤서가 난잡한 소설이 많은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릴 만큼 장안의 화제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 하는 것도, 작품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것이 널리 회자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십분 이해된다. 이처럼 영화는 요즘 인터넷 세대의 글쓰기를 여러 가지 조선시대 버전으로 보여준다.
윤서가 우리의 아이디처럼 필명인 추월색을 쓰는 것, 추월색의 소설이 폭발적 인기를 끌자 책 뒤편에 감동을 주체 못한 독자들이 댓글을 다는 것, 한권의 완성 단행본이 아닌 연재를 하는 것, 영화의 맨 마지막에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어 동영상이라는 부르는 것 동성애에 SM까지 섞어 놓은 작품을 구상하는 장면(인터넷에서 널리 유행하는 팬픽이나 야오이소설을 인지하는 이 영화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랄까)까지 영화는 21세기형 글쓰기를 통째로 패러디한다.
<음란서생>은 내가 최근에 본 영화들 중에 각각의 캐릭터가 가장 뚜렷한 영화였다. 어쩌면 이다지도 알기 쉽고 재미있고 사랑스런 캐릭터들일까. 특히, 소심한 캐릭터의 면면을 보여준 윤서(한석규). 이런 캐릭터를 잘 살려준 배우들도 정말 두 손 힘차게 들어 박수쳐주고 싶다. 주연들은 물론이거니와, 조연들까지 어느 누구하나 어색하거나 어긋나는 연기를 하지 않는다.
배우들의 연기와 함께 정말 좋았던 또 한 가지는 대사. 대사들이 대체로 길지 않은데도 꼭 해야 할 말을, 이상하게도 신선하게 들리는, 그런데 왠지 그것이 더 리얼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적재적소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섬세함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윤서와 정빈의 사랑이 매끄럽지 못 하달까. 시작도 진행도 결말도 제대로 표현되지 못해 어물쩡 절절한 사랑으로 넘어가는 느낌.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섬세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영화의 캐릭터상으로는 분명 최고 권력자인 왕이 그 권위 그대로 영화에서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만한 권력에다 가장 가슴 아픈 캐릭터였기도 했기 때문에 후반에만 잠깐 등장하여 힘 좀 써 보려다가 허무하게 사라지지 말고 다른 등장인물들을 쥐락펴락하며 활약을 해 줬다면 영화는 한층 구조적으로 탄탄해 졌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분명 약해보이는 마스크임에도 불구하고 눈가나 입가를 보면 강해보이는 안내상이 연기한 왕의 한줄기 눈물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약자니까. 언제나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니까.”
나를 이렇게나 폭소하게 만들고 또 복받치게 울게 해 준(사실 내가 복받치게 울었던 건 내 개인적 경험과 영화대사 한 줄이 정면으로 부딪쳤기에 일어난 사고이므로 울고 싶다고 이 영화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마음껏 웃고 싶다면 이 영화를 적극 추천한다) 이 영화 <음란서생>에게 나는 내 소중하고 또 소중한 토요휴일을 정중히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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