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빨리 극장 개봉하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어둠의 루트로 이 영화를 봐 버리고 난 지금, 나는 현재 세 가지를 상대로 원망을 퍼붓고 싶다. 이 좋은 영화를 여태까지 개봉하지 않고 꼬불쳐둔 수입사(분명 수입은 되었던 걸로 영상물등급위원회 검색결과 알고 있다)와, 이렇게 멋있는 연기를 해낸 짐 캐리를 수상은커녕 후보에도 올려놓지 않은 아카데미, 그리고 이 좋은 영화를 이왕 어둠의 루트로 볼 거면 빨리 좀 보지 이제서야 보게 된 나 자신을 향해 말이다. 이 영화, 정말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영화 속 주인공들의 대사처럼 '멋있는(nice)' 영화다. 독창성에 있어선, 그 어떤 영화들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이고, 로맨틱한 따뜻함에 있어서는 <러브 액츄얼리>와 맞먹을 정도이다. 거기다 캐스팅도 화려한데다 하나같이 연기도 빼어난데, 이 영화를 우리나라에선 개봉도 하지 않다니, 막말로 정말 제정신인가? 결국 이 좋은 영화를 극장에서가 아닌 어둠의 루트로 봐야 되게끔 만들고 싶은가?
못보신 분들을 위해 내용을 설명드리자면 대략 이렇다. 우리의 주인공 조엘(짐 캐리)은 현재 연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과 의도하지 않은 이별을 겪은 후로 심하게 정신적 데미지를 입은 상태다. 아니나 다를까, 첨단 의료기술에 힘입어 클레멘타인이 조엘과 관련된 기억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렸지 않은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인데 자신에게 그저 '네, 손님'하며 쌀쌀맞게 대하는 연인의 모습에 조엘은 가슴이 찢어진다. 이에 조엘은 자신도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기로 결심한다. 담당 의사에게 클레멘타인에 대한 인상과 기억 등을 설명해주면 기억의 지도를 만들어 밤이 되면 조엘이 자고 있는 사이에 뇌에 존재해 있는 기억을 지도를 바탕으로 모두 삭제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문제는 조엘이 잠을 자면서 그 기억이 사라져 가는 과정을 모두 목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지우는 게 쉽지, 그래도 생각하면 너무 애틋하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광경을 지켜보는 조엘의 마음은 더 찢어진다. 결국 조엘은 기억 속의 클레멘타인을 붙잡고는 기억 삭제 경로를 벗어나기로 결심하는데...
사실 찰리 카우프먼이 각본을 쓴 영화를 제대로 본 건 이번 영화가 처음이다. 그러나, 이 한 편만 보고도 그의 진가가 녹용 엑기스 마냥 진하게 느껴졌다. 그의 상상력은, 영화라는 것이 허용할 수 있는 가장 최대치의 상상력인 듯하다. 기억상실증이라는 병을 이유로 기억을 잃은 사람들을 많이 봤어도, 기억이 삭제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다니.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함께 했던 장소에서 건물들이 하나둘씩 무너지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지워지는 풍경은 정말 입이 떡 벌어지지 아니할 수 없다. 누가 기억이 지워지는 걸 눈 앞에서 목격할 수 있다고 상상했겠는가? 거기에 조엘이 보다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갈 수록 함께 아이가 되는 광경은 어떻고. 네살 무렵의 기억으로 돌아간 조엘이 겉모습은 어른 모습 그대로지만 크기와 정신상태는 네 살 적으로 돌아가 징징거리는 모습은 정말 웃기면서도 상상력이 감탄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또 기억의 지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인공이 자신의 기억 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헤매는 모습까지... 그만큼, 이 영화의 상상력이란 최근의 다른 어느 영화들보다도 절대적으로 놀랍다.
배우들의 연기는 또 어떤지. 이 화려한 배우들을 모두 모아놓고는 그들에게서 훌륭한 연기 또한 쏟아내게 만드는 제작진의 힘이란 대단하다. 짐 캐리의 연기는 말 그대로 영화만큼이나 '판타스틱'하다. 그렇게 오버하고, 지금도 코미디 영화에선 맘껏 날뛰시는 코미디의 황제께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소심하고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사람의 모습을 선보일 수 있다니. 그의 연기는 마치 연기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의 평소 모습같았다. 기름기와 힘이 잔뜩 빠진 현실 그대로의 모습. 때론 절박하면서도 때론 안타까운 현실 앞에 절로 소심해지기도 하는 조엘의 모습은 짐 캐리의 연기에 완벽하게 들어맞아 최고의 조화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 속 그의 연기에서 과거의 코미디 연기에 대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환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사람을, 뭐? 아카데미는 후보에도 안올려? 도대체 아카데미는 짐 캐리가 얼마만큼 연기를 해야지 관심이라도 가질 건지... 안타까운 현실이다.
함께 극을 이끌어가는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도 좋았다. 기분에 따라 머리 색깔이 변하는 충동적인 여성, 'F'로 시작되는 욕설을 거리낌없이 내뱉으면서도 감정이 여린 면도 있는 쿨한 여성의 모습이 어울릴 것 같지 않았는데 왠지 참 잘 어울렸다. 그동안 다소 우아하고 점잖은 역할을 많이 해온 그녀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약간의 변신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게 참 매치가 잘 됐다. 덕분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오르지 않았는가.(그런데 짐 캐리는 왜!!) 이외에도 커스틴 던스트, 일라이저 우드 등의 연기는 두 주연 배우만큼 두드러지지는 않아도 담백한 맛이 있는 부담없는 연기여서 참 괜찮았다. 두 사람 모두, 연기 경력에 있어서 꽤 성숙한 모습의 연기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일라이저 우드가 의외로 꽤 여자를 밝히는 듯한 역할로 나온 것도 인상적이었고.
이 영화는 기억을 말 그대로 '삭제'한다는 설정에서 시작해 참 창의적인 구성으로 나아가는 영화이지만, 그만큼 따뜻한 온기도 가득 배어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노래 가사나 영화, 드라마 내용에서 '기억을 지운다'는 얘기는 참 많이 나온다. 물론 이별의 아픔이 오죽 쓰렸으면 흔적도 없이 모두 지우고 싶겠지. 그러나 만약 영화 속 조엘의 경우처럼 자고 일어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 기억이 지워져 있는 것도 아니고 자는 동안 그 기억들이 눈앞에서 지워져 가는 걸 봐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연인과 언제 뭘 어떻게 했다는 식의 사실을 머리에서 지우는 거야 영화 속 삭제 작업처럼 쉬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과거의 기억들이 마음에 새겨놓은 황홀하고 은은한, 생각하면 쓰리면서도 한없는 행복에 젖어들 수 있었던 파장들까지 걷어내는 건 장난이 아니게 어려운 일일 것이다. 포스터 속 카피처럼, 누군가와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것과 그것들을 마음 속에서 내보내는 것, 즉 'mind'에서 지운다는 것과 'heart'에서 내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말이다. 특히 클레멘타인처럼 충동적인 사람보다 조엘처럼 충동적이지 않은 사람에겐 더욱 더.
아무리 아픈 데를 건드린다 하더라도, 모든 기억은 언제까지나 '내 기억'이다. 누군가에게 줄 수도 없고, 물리적으로 지워낼 수도 없다. 물론 영화 속 매리(커스틴 던스트)의 '축복받은 자는 망각하는 자이다. 자신의 실수조차 망각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처럼, 망각은 안좋은 기억들로부터 포위되어 있을 경우에 도피의 수단으로 참 좋은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 속 조엘과 클레멘타인, 매리처럼 자신이 어떤 기억을 지워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쓰라린 고통과 불쾌한 인상을 남겼을지언정, 그것들은 이미 우리 심장 한 구석에 지워내기 힘든 얼룩을 남겼을터인데, 그걸 다시는 꺼내볼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 기억때문에 아파할 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우리에게 줄지도 모른다. 영화 제목처럼 어떤 흠도 사라진 깨끗한 마음에 공허하게 영원한 햇빛만 비춘다면, 어떤 얼룩도 향기도 없는 삶이 그 무슨 가치가 있을까? 아픈 기억보다 더 아픈 건, 아파할 기억조차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옷감의 경우에는 얼룩이 마땅히 지워져야 할 것이겠지만, 적어도 사람의 기억에 있어서는 얼룩이 되는 슬픈, 나쁜 추억도 그걸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삶의 가치를 높일 수 있음을 영화는 설명해주고 있다. 적어도 그 추억들을 아파도 곱씹어본다면, 지금까지의 삶에서 쌓아온 성장의 보따리가 보다 풍성해질테니. 헐리우드 어느 로맨틱 코미디, 어느 멜로 영화에서 이렇게 기억에 대해서 진지하게 접근했겠는가? 이렇게 멋진 영화를 아직도 우리나라에선 개봉도 안하고, 아카데미도 고작 각본상 밖에 주지 않았다니.(하지만 각본상을 준 건 확실히 잘한 일이다.) 정말 기억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툭하면 등장하는 기억상실증처럼 그렇게 하루 아침에 지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영화는 그 사실을 너무도 쓸쓸하면서도 발랄하게, 너무 독창적이면서도 애틋하게 증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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