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트=박은영 기자]
지난봄 <레슬러>에서 아들 바보 ‘강귀보’로 관객을 찾았던 유해진, 이번엔 일곱 명의 주인공 중 소심한 비밀 소유자이자 무려 서울대 출신 변호사로 가부장적이고 권위 의식 가득한 ‘태수’로 분해 웃음 팡팡 터트리며 블랙코미디의 세계로 인도한다. 핸드폰 분실하지 말고 꼭 잘 잠그고 다닐 것을 관객에게 조언하는, 최근 가장 행복한 일로 <완벽한 타인> 본 것을 꼽는 유해진을 만났다.
살이 빠진 것 같다.
아닌데, 머리를 자른 후 여위었다는 소릴 종종 듣는다.
<완벽한 타인>(이하 완타)의 완성본을 시사에서 처음 봤다고 하던데, 감상 소감은.
보통 한번 보고 마는데, 이번엔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편하면서 재미있고 이런저런 생각해 볼 점이 많았다. 참여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좋은 작품인 것 같다고 느꼈다. 뭔가 세련됐다고 할까.
서울대 나온 아주 똑똑한 변호사 ‘태수’(유해진)를 연기했다. 역할 제안받고 떠오른 생각은.
변호사도 좀 그랬는데 게다가 서울대 나온? 과연 관객들이 받아들일까, 웃으면 어떡하지 뭐 이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변호사 앞에 서울대라는 수식어는 좀 떼면 안 되겠냐고 건의하기도 했었다. 좀 오글거리지 않나.
윤계상과 함께했던 <소수의견>(2013)에서도 변호사를 연기해서 아주 잘 어울렸는데? <완벽한 타인>의 어떤 점에 끌렸나.
그랬나? 완타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든데 자기만의 색을 가지고 있더라.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아주 화려하고 멋있고 예쁜 건물도 필요하지만, 아기자기하고 멋스럽고 정감 있는 주택도 필요하지 않을까. (창밖으로 보이는 한옥을 가리키며) 밖에 한옥이 보이길래 하는 말이다. 스릴 넘치고 웃음 터지는 영화도 좋지만 가끔은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영화도 있어야지. 또, 시나리오가 개성 넘치면서 톱니바퀴 맞물리듯이 잘 짜여 있었다.
이재규 감독님은 당신에게서 ‘태수’와 비슷한 면을 봤다고, 그게 캐스팅 이유라고 하던데.
음, 그렇게 디스를? (웃음) 내 세대 혹은 윗세대만 해도 ‘태수’같이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은 정말 흔하다. 나에게도 어딘가 그런 모습이 있겠지. 그렇지 않으려 해도 나도 모르게 나이 먹을수록 자꾸 꼰대 같이 돼가는 것도 있을 거다.
죽마고우 네 친구와 그 배우자들이 함께하는 저녁 모임에서 갑자기 ‘핸드폰 잠금 해제 게임’을 한다는 설정이 신선하다.
이탈리아 영화가 원작인데, 우리 정서상 이 게임을 지속할지가 의문이었다. 왜 술 마시며 게임을 하다 보면 중간에 안 하겠다고 일어서면 그만 아닌가. 막말로 중간에 엎으면 되는데 저렇게 자기 비밀이 까발려지면서까지 지속하는 이유가 필요했다. 이재규 감독님께 말했고, 거기에 따른 장치를 마련했다.
가령…
중간에 불리한 상황에 놓인 ‘준모’(이서진)가 그만하자고 하니 ‘태수’(유해진)가 넌 그렇게 끈기가 없어서 문제라고, 끝까지 하는 일이 없다고 타박한다. 그러니 자존심 상한 ‘준모’가 ‘그래 갈 데까지 가보자’며 덤비게 된다. 또 친구들과 배우자들이 돌아가면서 순차적으로 일이 터지는 데 덜 어색해 보이는 것도 핵심이었다. 너무 작위적이면 흥미가 사그라드는 건 시간문제이고, 관객이 수긍하고 끝까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하니 말이다. 감독님과 작가님이 그런 부분을 영리하게 잘 헤쳐나간 것 같다.
한정된 공간과 식탁 위의 대화라는 게 리스크 있는 설정일 수 있다. 연기적으로 고민한 부분은.
일단 리스크를 이길 수 있는 각본이 있었다. 한정된 공간과 시간이라는 핸디캡이 있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는 맛이 쫄깃하더라. 하지만 너무 밋밋하면 안 되니 웃음 포인트가 필요했고, 이를 만들어보자고 스스로 과제를 냈었다.
미션 클리어! 극 중 웃음의 상당 부분이 ‘태수’(유해진)에서 유발된다. 고지식하고 다소 꼰대스럽고 무뚝뚝한 변호사인 ‘태수’가 얼핏 보면 웃음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데 말이다. 애드립도 많았을 것 같다.
대부분 대본이었고, 촬영 들어가기 전에 충분히 얘기해서 수정한 부분은 있다. 카메라 돌아가는데 막 던지면, 그걸 받는 상대역이 얼마나 당황하겠나. 평소 블랙코미디를 좋아한다. 상황에서 유발되는 웃음이 재미있거든. 완타의 경우 그런 요소가 많았고, 그렇게 발굴한 웃음 포인트들이 꽤 있었다.
예를 들면.
영화 봐서 알겠지만, ‘태수’(유해진)와 ‘영배’(윤경호)의 대화 중 열두 살 연상녀가 등장한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열두 살 차이라고 하면 흔히 연하를 생각하지만, 그건 너무 뻔하지 않나. 역으로 연상이면 어떨까 한 거지. 그 장면은 사전 협의해서 B 안으로 촬영했던 건데, B 안을 선택하셨더라. 그리고 (헬로) 키티를 대가리 하얀 고양이로 표현하는데, 다행히 이 장면에서 웃음이 터지더라. 이런 것들이 블랙 코미디 요소라고 본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우리가 흔히 알지만 생각해 볼만한 물음들인데 대놓고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는 게 아니라 중간 중간 잘 녹여 넣었더라.
영화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말했듯, 거창하고 새로운 건 없다. 다만 살면서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이 꽤 있다. 예를 들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라는 것, 또 인간의 못된 측면을 잠깐은 속일 수 있어도 결국엔 드러난다는 것 등. 영화를 본 후 ‘아, 그래 그런 게 삶이지’ 이런 느낌이 들었다. 지금의 내 생활과 주변과 관계를 반추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자세하게 질문 못 하겠는데, 영화의 결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묘하게 여운이 남더라.
좀 전에 한 얘기의 연장선이라 본다. 어느 정도 덮어가며 사는 거 아닐까. 그렇게 사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하얀 거짓말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느 순간엔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한 것 같다. 큰 것을 위해서 작은 부분은 묻어두고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단, ‘작은 거’라는 게 전제다. 무조건 덮으라는 게 아니니 오해는 말길!
극 중 파트너 없이 유일하게 혼자 온 친구 ‘영배’(윤경호)와 ‘태수’(유해진)가 그야말로 찰지게 웃음을 생성해 낸다. 실제 호흡은 어땠나.
어제 라디오 방송 ‘한예리의 영화음악’에 염정아 배우와 출연해 몸이 안 좋은 후배(한예리)를 대신해 우리가 진행했었다. 어제도 말했는데, ‘윤경호’는 정말 좋아하는 후배다. 내가 어떻게 던져도 잘 받아주고 발산하는 에너지도 대단하다. 평소 TV를 틀어 놓은 채 잠을 자는 버릇이 있는데, 얼마 전에 소리만 듣는데 아주 귀에 쏙 들어오는 배우가 있어서 일어나 보니 <미스터 선샤인>의 경호더라. 경호를 만나서 그 얘기 해주니 아주 좋아하더라.(웃음) 연기도 잘하지만 인간성도 참 좋은 친구다. 이번 완타를 통해 더 많이 대중적으로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부로 호흡을 맞춘 염정아 배우와도 아주 잘 어울렸다.
그게 다 염정아 배우 덕분이다. 정말 극 중 인물처럼 연기하면서 은근하게 자기 색을 묻힌다. ‘수현’(염정아)은 남편이 면박 줘도 시를 읊으며 그 상황을 정리하는 등 참 지혜롭게 대처한다. 그녀를 보고 있자면 성격 지랄(?) 맞은 남편과 살다 보면 그렇게 자기만의 다스리기 노하우를 터득했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염정아 배우와는 예전 <전우치>(2009), <간첩>(2012)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로 만난 건데, 원체 나이스하고 군더더기 없는 사람이다. 깍쟁이 같을 것 같은데 전혀 안 그렇다.
극 중 설정이 ‘속초 출신의 40년 지기 네 친구’ 다. 친밀함을 다지기 위해 한 달 이상 거의 합숙처럼 같이 지내며 촬영했다고 들었다.
사실 한 달 세트 촬영이라기에 처음엔 지겹지 않을지 걱정했었다. 계속 같은 장소인 데다 그간 여러 번 작업해 온 익숙한 배우가 아니라서 말이다. 이서진 배우의 경우 예전 예능 <삼시세끼>하면서 잠깐 스친 적은 있었지만, 솔직히 잘 몰랐거든. 좀 까칠하고 바른말만 할 것 같았는데, 마음이 참 따뜻한 사람이더라. 완타는 촬영할 때도 좋았는데, 이렇게 완성된 후 영화를 보며 그 시간을 추억하니 더 좋고 각별하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작업은 드물 것 같다.
좋은 배우들과 함께하며 즐겁게 촬영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을 꼽는다면.
촬영할 때 보다 영화 보면서 느낀 건데 ‘석호’(조진웅)와 ‘예진’(김지수) 두 사람이 욕실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이 좋았다. 거울을 통해 잡은 화면과 앵글이 좋고 그때 두 사람이 나누는 대사가 영화의 쉼표 같은 느낌이었다. ‘석호’(조진웅)가 딸에게 하는 말을 들으며 과연 현실에서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하면서도 참 현명한 대처인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한 장면이다.
완타를 본 첫 느낌이 촬영하면서 참 재미있었을 것 같다는 거였다. 우문이지만, 연기하기 좀 수월하지 않았는지.
들어가기 전엔 좀 편할 거로 생각했는데, 힘든 정도는 비슷했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이게 말로 터는 거라 더 꽉 짜여 있어야 하거든. 눈빛 하나 말투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아이디어를 제안하더라도 내 대사를 받을 상대 캐릭터와 조화를 이뤄야 하니 여러모로 생각해야 했었다. 다만 함께한 배우들과 어울리는 게 특히 좋았고 추억을 많이 쌓았다.
머리를 자르고 콧수염을 길렀는데, 차기작 때문인건가. 소개한다면.
원신연 감독의 <전투>를 촬영 중이다. 봉오동 전투를 모티브로 한다. 엄유나 감독과 윤계상과 함께한 <말모이>의 경우 촬영이 끝났고 후반 작업 중이다. <말모이>는 조선어학회에서 허드렛일 하면서 말에 눈뜨는 까막눈 ‘김판수’를 맡았는데, 어떻게 나왔을지 궁금하다.
평소 작품 선택 기준은. <토지>(2004) 이후 드라마 출연을 안 하고 있는데, 혹 영화만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을까.
작품 선택 기준은 시나리오다. 일단 이야기가 흥미로워야 한다. 영화만을 고집하는 건 아닌데, 어느덧 영화에 익숙해져서 (드라마에) 적응할 수 있을지 두려운 마음이 크다. 영화와 드라마는 촬영 환경이 꽤 차이가 나거든.
앞으로 어떤 배우로 남고 싶은가.
이런 종류 질문에 내 레퍼토리 같은 대답이 있다. 앞에 다른 수식어 필요 없이 그냥 배우면 된다. 또, ‘그 사람이 무슨 배우야?’ 이런 소리 안 들을 정도까지 배우 생활을 하고 싶다.
독서와 다큐멘터리를 즐긴다고 알려졌는데, 혹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그런 질문을 좀 전에도 받았는데, 과대포장이다. 독서하고 클래식 듣고 와인을 즐긴다고 알려졌다는데, 좋아는 하는데 지식은 없다. 와인은 있으면 마시고 소주를 좋아한다. 클래식은 가끔 라디오 듣는 거고, 다큐멘터리는 EBS를 자주 봐서 그렇다! 하하. 사실 대본을 주로 읽다 보니 책을 읽을 시간이 별로 없고 특히 소설은 멀리하게 된다.
완타를 보고 가슴 뜨끔할 관객이 많을 것 같은데, 수많은 ‘태수’(유해진)에게 한마디 한다면.
음, 핸드폰 분실하지 말고 잘 잠그고 다니시길!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웃음 주는 당신인데, 당신에게 웃음을 주는 건 뭘지 궁금하다.
흠, 별로 없다. 우리 겨울(기자 주 유해진의 반려견)이 보고 웃고, 촬영장 가서 인근에 자전거 탈 만한 좋은 곳 발견하면 기분 좋고 그렇다. 현장에서 연기 꼬였던 게 풀리면 순간 희열이 느껴지고, 가끔은 코빅(코미디 빅리그) 보며 웃는다.
마지막 질문! 최근 행복한 순간이나 인상적인 일이 있다면.
이건 홍보와 상관없으니 오해 말라. 진심으로 완타보고 행복했다. 또 촬영장 다니며 충주 비내섬 자전거길을 달리곤 하는데, 정말 풍경이 좋다. 요즘 가을가을 하잖나. 한번 단풍 물든 풍경을 상상해봐라.(웃음)
2018년 10월 29일 월요일 | 글_박은영 기자 (eunyoung.park@movist.com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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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_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