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피면 긴장이 좀 덜 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보통 일할 땐 하루에 한 갑 반 정도 피는데 그냥 집에서 쉬는 날엔 이틀에 한 갑 정도 핀다. 아무래도 일하는 시간에 많이 피는 편이지. 대신 술을 끊었다.
술도 많이 마시는 편인가 보다.
거의 매일 마셨다. 그런데 요즘은 웬만하면 안 마시려고 하지.
난 담배를 끊었는데. (웃음) 의외로 긴장하는 편인가 보다. 사실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은데. 긴장되니 인터뷰보다 사진을 먼저 찍자는 이야기에 의외라고 생각했다.
사진에 긴장하는 편이다. 인터뷰는 그냥 있는 대로 얘기하면 되는 거고, 그러다가 얘기가 잘 되면 재미있게 덧붙이면 되는 거라서 부담은 전혀 없다. 오히려 말하는 건 즐겨 하는 편이니까. 그런데 사진은 가끔 가다 막힐 때가 있더라. 가끔 가다 안 맞는 사진작가랑 만나게 되면 그렇다. 보통 찍으면서 ‘오케이! 좋습니다. 하나 더! 오케이! 하나 둘, 하나 둘!’ 이런 식으로 술술 진행되면 나도 덩달아 업 되는데, 첫 장 딱 찍고서, ‘음, 이거 아닌데~’ 이러면 더 안 나오는 거다. 솔직히 기분이 살짝 상하는 탓도 있고. (웃음)
그럼 우리 사진 기자는 편했을 것 같은데.
아, 최고! 근데 너무 빨리 끝낸 거 같은데. (웃음)
일단 믿어보시라. (웃음) 종종 스크린으로 웃는 얼굴 뒤에 쓸쓸한 무표정이 교차하는 걸 발견한다.
음, 그건 만든다고 나오는 건 아닌 것 같다. 만약 연기로 그런 게 나왔다면 자신감 만땅이겠지! (웃음) 근데 연기가 아니니까. 나도 모르게 그런 게 나오는 거 같다. 그리고 날 캐스팅하신 감독님들은 그런 면을 좋아해주신 것 같고. 어쩌면 나한텐 유일한 장점이지 싶다.
제2의 이병헌이다, 리틀 이병헌이다. 이런 말 듣게 되는 것도 그런 표정 덕분이 아닐까? 이런 말 듣게 되면 어떤가?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지만 전혀 나쁘지 않다. 이걸 빨리 빼내야겠단 생각도 없고. 만약에 오늘 아침에 그런 기사가 그렇게 났다고 해도, 전혀 기분이 상할 것 같진 않다. 이병헌 선배는 알다시피 워낙 연기 잘 하는 배우잖아. 사실 데뷔 초기에는 롤모델로 삼았을 정도로 너무 존경하는 선배님이다. 그러니 제2의 이병헌이다, 이런 말은 내게 칭찬이었다. 결국 제2의 이병헌은 방해가 되는 것 같진 않다.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지금도 그가 롤모델인가?
물론 지금은 연기자로서 롤모델이 없다. 한편으론 이젠 선배님을 언젠간 올라서야지, 라는 생각이 있긴 한데. 물론 그건 존경의 의미다.
<비열한 거리>의 종수가 진구란 배우를 사람들에게 많이 인식시킨 거 같다.
사실 <비열한 거리>가 진구란 이름을 알릴 수 있는 대표작이 될만한 작품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냥 마지막에 주인공을 죽인다는 그 포인트 하나만 잘 잡아서 연기를 잘 하는 조 단역으로 일단 어필하자는 생각으로 했을 뿐인데. 감독님께서 원하시는 게 많아서 이전 작품들에 비해 공부도 많이 했고, 현장에서 감독님의 디렉팅을 처음으로 받아본 작품이다. 그 전에는 감독님들이 굉장히 어려웠고 무서워했기 때문에 감히 ‘감독님, 저는 이 장면 이렇게 생각하는데, 감독님은 어떠세요?’ 이런 말을 못했다. 감독님들과 대화하는 방법을 몰랐던 거지.
그런데 어떻게 디렉팅을 받은 건가?
유하 감독님께서 오히려 먼저 나한테 오셔서, ‘진구야, 여기서는 이렇게 하는 게 어떠냐?’ 그러시더라. 물론 아마 답답해서 그러셨을 거다. 워낙 못하니까. (웃음) 그러다가 나도 점점 말문이 트이기 시작해서 나중엔 ‘저는 이렇게 생각해서 이렇게 했는데 어떠십니까?’ 이렇게 되묻기도 했다. 그리고 ‘그래, 그럼 그게 맞는 거 같다. 그렇게 가자!’, 이렇게 서로 의견을 잘 조합하다 보니 아마 내 연기가 튀지도 않고 영화 속에 잘 묻어난 거 같다. 그리고 그걸 보고 사람들은 연기를 잘 했다고 하더라. 사실 감독님께서 정말 날 살려주신 거지.
그런데 <달콤한 인생><비열한 거리><사랑따윈 필요없어>에서 연속으로 건달 이미지를 맡았는데 풍기는 느낌은 제 각각이더라.
그것도 다 감독님들께서 잘 잡아주셔서 그런 거다. 정말.
그래도 본인이 각각의 캐릭터를 찾아가는 방식은 있을 것 아닌가?
영화마다 틀리지. 작품마다. 그리고 상대 배우마다 틀리고. 상대 배우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서 많이 틀려지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배우들을 잘 만난 운도 있는 것 같고. 확실히.
<기담>은 어땠나?
<기담>도 전적으로 감독님들의 디렉팅에 의해서 나온 연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잡아간 건 한 30%정도라면 동료 배우들과의 호흡이 20%였고, 감독님께서 가르쳐 주시거나 숙제처럼 준 그런 것들이 50%, 절반 이상?
사실 먹물 묻은 캐릭터는 처음이다.
먹물 묻었다는 게 어떤 의미지?
의대 실습생이잖아.
아, 좀 지적인 거? 사실 전혀 지적이지 않은데! (웃음)
음, 아직 <기담>이 공개되지 않은 상태라 잘 모르지만-이 인터뷰는 <기담>의 기자시사 전에 진행됐다.- 쨌든 외면적으론 그렇잖나. 생각해보면 공포라는 장르도 처음이고, 시대극 자체도 처음이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실 지금까지 했던 거와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일단 의대 실습생이라니까 ‘아, 쟤 공부 좀 했나 보다.’ 이렇게 막연히 느끼나 보다. 그리고 시대극이지만 특별히 어미가 두드러진 조선 시대 식의 대사를 한 것도 아니다. 시대극을 하며 배우로서 준비한 게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그런 준비는 거의 분장팀하고 의상팀, 미술팀만 많이 했던 거 같고, 배우들은 그냥 연기만 했던 거 같다. 유약하고 섬세한 의대실습생이 시체실에서 당번을 서다가 시체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시대가 2007년으로 옮겨졌다고 해도 난 분명 <기담>하고 똑같이 연기를 할 것 같다. 복장이나 환경만 틀릴 뿐이지. 그래서 별로 다를 건 없었다.
어차피 사랑 감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으니까. 때리면 아픈 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사랑에 빠지는 연기도 처음이다.
음, 그렇지! 그 동안 TV 단막극에서조차 사랑이 없었으니까. 가족간의 사랑이나 그런 것 밖에 없었지. 처음이네. 사실 듣고 보니 이제 알았다.
그런데 첫사랑이 좀 특이하다. 상대가 시체라니. (웃음) 감정을 끌어내는 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쉽지 않더라. 그런데 시체가 하도 예뻐서. (웃음) 시체에 하얀 천을 덮어놓은 씬에서도 진짜 배우가 들어갔다. 솔직히 실제 사람이 들어갈 필요 없이 마네킹을 써도 괜찮을 것 같은데, 늘 내 앞에 눕혀놓았다. 아무래도 감독님이 내 연기를 끌어내는데 도움을 주려고 한 것 같다. 그리고 대본 중에 ‘마치 여고생 시체는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라는 지문도 있어서 그에 충실 하려고 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살아있는 사람 같은, 그것도 예쁜 시체를 봐서인지 그렇게 어렵진 않았던 거 같다. (웃음)
시체이니 말도 없고, 표정도 없었을 텐데. 그런 상대를 앞에 두고 연기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대사도 표정도 없는 시체가 내 연기 상대이다 보니 혼자서 연기를 끌어가야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런 연기적 고민을 함께 공유할 사람이 없었다. 선배님들과 함께 하는 장면은 거의 없었으니까 내 씬은 혼자 끌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상대 연기자가 없다 보니 연기에 대한 고민을 직접적으로 나눌 사람도 없었다. 그게 어려웠던 거 같다. 한편으론 외로웠던 것도 같고. 아무래도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조금 있었던 거 같다. 그래서 사실 숙소에서 혼자 술도 많이 먹었다. (웃음)
촬영이 디테일하게 이뤄졌다고 들었다. 그러다 보니 일정이 지연되는 상황도 많았고, 그런 부분에서 느껴지는 어려움은 없었나?
촬영이 지연되고 일정이 늦어진 건 어쩔 수가 없었던 일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촬영 분의 대부분이 안성병원세트였는데, 그 세트에 문제가 약간 있었다. 미술 감독님께서 미장센에 신경을 많이 쓰셔서 상당히 디테일하게 만들었는데, 막상 영화 촬영에 용이하지 못했다. 조명을 달아야 하는데 조명 설치가 어려운 복도가 있었고, 응급 침대를 이동하는 데도 벽에 걸려서 커브가 안 되는 곳도 있었고. 그래서 세트 공사를 다시 해야 했다. 물론 나를 비롯한 배우들보단 스텝들이 불편한 문제였다.
듣는 바에 의하면 한 씬을 세 버전으로 찍기도 했다는데.
똑같은 장면인데 카메라를 이렇게 들어가보고, 저렇게 들어가보면서 여러 각도에서 찍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장면은 2컷 찍는데 24시간 넘게 걸릴 때도 있었다. 솔직히 기다림에 대한 고통도 약간 있었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위한 배려였으니 참고 견디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아버지께서 오래 전부터 영화계에서 활동하신 진영호 촬영감독님이라고 들었다. 영화배우가 된 건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을 것 같다. 그것이 직접적인 유전이던 간접적인 영향이든.
여러 가지가 있다. 아버지의 피 때문인지, 어렸을 때부터 남들 앞에서 뭔가를 보여주고 박수 받고 싶단 생각을 많이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배우나 가수, 하다 못해 백댄서라도 좋으니까 남들 앞에서 뭔가를 보여 주고 싶은 게 내 꿈이었고 장래희망이었다. 결정적으로 군대에서 ‘나가서 뭘 하면 남들보다 나을 수 있을까.’란 생각을 차차 하게 됐다. 그러면서 하나씩 잘라가게 됐지. ‘가수? 그렇게 잘 할 거 같진 않아.’ 이런 식으로 하나씩 잘라가다 보니까 결국에 배우가 하나 남더라. 물론 배우를 만만하게 봐서가 아니라 나랑 가장 잘 맞을 거라고 혼자 생각을 했던 거지. 아버지께서 처음엔 반대가 심하셨다. 현장을 많이 겪어보신 분이시니까. 너 같은 애는 배우로서 성공 못한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하시더라.
아버지께선 상당히 회의적이셨나 보다.
그래서 <올인>을 몰래 했다. 근데 <올인> 촬영 감독님께서 아버지의 아주 아래 후배였던 거다. 결국엔 그래서 걸렸는데 나름대로 그 촬영 감독님께서 전화 통화로 아버지께서 내가 열심히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한시름 놓으셨던 거지. 그런데 <올인>이 방영되기 전에 사람들의 반응이 나오지 않은 당시에도 나한테 항상 ‘다른 길도 생각해봐라. 만약 네가 방송 나왔는데 사람들이 널 별로 안 좋아할 수도 있고, 아니면 네가 한계를 느낄 수도 있으니까 다른 길도 생각해보거라.’라고 말씀하셨다.
본인도 그런 말에 고민 좀 하지 않았을까? 한편으론 경력자의 조언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 난 전혀 그런 생각 안 했다. 사람들이 안 좋아하면 좋아할 때까지 하면 되고, 내가 연기를 못 했으면 다음에 잘 하면 되는 거니까. 아버지는 촬영을 했던 스텝이고, 난 배우이기 때문에 영화를 사랑하는 마인드는 같지만 아무래도 분야적인 시각이 틀리다.
그럼 이제 배우로서 자리잡아가고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께서 조언해주시는 건 없나?
물론 지금은 예전같이 반대는 하지 않지. 그렇다고 연기에 대해서 터치하시는 것도 없다. 다만 내가 점점 비중이 커진 역할을 맡으니까 거만해지거나 뻔뻔해지지 말라고 이야기해주신다. 인사성이나 스텝들한테 어떻게 하라는 인간적인 부분에 대한 조언을 많이 해주시지. 내가 잠시 놓칠 수 있는 인간적인 것들이나 내적인 걸 많이 잡아주신다. 스텝들은 이런 배우 좋아한다는, 그런 거. 그리고 나도 아직 현장에서 막내니까 막내 스텝들 챙기라는 말도, 그리고 그런 말씀은 나도 충분히 맞는다고 공감하니까 새겨 듣는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나 보다. 살가운 사이 같은데.
전혀. 사실 세상에서 2번째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버지라면, 제일 싫어하는 사람도 아버지다.
어렸을 때 사연이 좀 있어서.
음, 아픈 부분은 건드리지 않겠다. 아버지께서 유하 감독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나가라>의 촬영감독이라고 알고 있다. 세대를 이어서 유하 감독하고 인연을 맺은 셈인데, 어쩌면 <말죽거리 잔혹사> 때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사실 그 때, <말죽거리 잔혹사> 오디션에 갔었다. <올 인>이 ‘빵!’ 터지고 나서. (웃음) 그때는 정말 멋모를 때였지. 배우로서 데뷔를 한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머릿속에 똥만 가득 찼을 때. (웃음) 사실 거만은 몰랐다. 어떻게 하는 게 거만한 건지 몰랐으니까. 그러나 캐스팅이란 게 굉장히 쉽구나, 라고 착각했던 거 같다. 사실 <말죽거리 잔혹사>는 김인권 선배가 했던 찍새 역할로 갔는데, 감독님과 PD님이 보시더니 이정진 씨가 맡았던 우식이 시키자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또 그렇게 캐스팅된 건 줄 알았지. <올인>때도 그렇게 됐으니까. 그런데 투자자들한테 신뢰가 없으니까 결국엔 떨어졌다. 그러다가 <낭만자객>을 하게 됐고, <논스톱>도 했고. <낭만자객>을 하면서 조금씩 배우게 됐지. 나한테는 굉장히 의미 있는 작품이다.
첫 현장 체험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기담>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뭔가?
난 공포영화를 안 좋아한다. 너무 사람 놀래 키려 하는 게 장난치는 거 같아서. 오히려 그럼 오기로라도 더 안 놀래고 겁 안 먹거든. 개인적으로 공포영화를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안 보는 것도 있다. 공포영화를 잘 만드시는 감독님들이나 배우 분들에겐 죄송한 이야기지만 난 그래서 개인적으로 공포영화를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기담> 시나리오에서 그런 냄새가 났다면 난 결단코 누가 시켜도 안 했을 거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아니면 주인공 원 톱을 시켜줘도. 그런데 난 공포보단 멜로를 느꼈다. 그리고 이동규 선배나 김태우 선배, 김보경 선배랑 같이 할 수 있는 작품이라서 또 끌렸다. 주인공의 부담이 많이 덜어지니까. 확실히 뭔가 배울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결국 정말 많이 배웠다. 감독님 두 분도 이제 입봉하시는 분들이라지만 내가 봤을 땐, 손꼽히는 프로라고 생각한다. 그 분들한테도 굉장히 많은 걸 배웠고. 육체적으로 참는 건 <비열한 거리>를 하면서 배웠지만, 정신적으로 참는 건 <기담>을 통해서 배웠다. 그리고 장르의 모호함, 겉으로 보면 공포지만 그 안에 뭔가 숨겨진 탄탄한 드라마 때문에도 하게 됐다.
공포 영화를 싫어한다고 했지만 재미있게 본 공포 영화도 있지 않나?
아주 어렸을 때 본 것들은 재미있었다. 최근에는 <쏘우>가 기억에 남는데 스릴러적인 측면이 좋았다. 잔인한 슬래셔는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요즘 스릴러 영화에는 잘리거나 내장 나오는 건 꼭 나오는 것 같더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보게 된다. 또 머리 풀어헤치고 이런 귀신 나오는 것도 너무 싫다. 좀 지겹다.
그럼 특별히 좋아하거나 애착이 가는 장르가 있나?
공포를 제외한 대부분의 장르는 모두 좋아한다! 생각해보니 공포를 싫어하는 건 아니고, 안 좋아하는 거네. 다시 번복한다. 안 좋아하는 거다. 싫어하는 건 아니고. (웃음)
<기담>은 공포영화지만 예상 밖의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진구 씨의 역할이 그런 예상 밖의 무언가를 끌어내는 역할이 아닐까 싶다. <비열한 거리>에서처럼.
이제 그게 역이지. 원래는 안 그런데 그걸 기대했다가 또 뒤통수 맞게 되는. (웃음) 그러니까 감독님께서 처음에 주문하셨던 게, ‘지금까지 진구가 맡았던 역할들은 뭔가를 감추다가 나중에 뻥 터트리는 건데, <기담>에서는 끝까지 감춰라’ 였다. 겁이 많고, 소심하고, 유약하기 때문에 가슴에 있는 분노도 밖으로 못 나오고, 슬픔도 밖으로 나와서는 안됐다.
그럼 상당히 절제된 연기를 많이 했을 것 같은데.
평생 비밀을 안아야 하는 캐릭터다. 나의 내레이션을 통해서 영화가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물이라는 소리인데.
그렇게 큰 건 줄 전혀 몰랐다. (웃음) 시나리오 받을 때도.
시나리오도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
난 그냥 대충의 이해는 했었다. ‘아, 이거 반전이 있구나. 재미있다.’ 이정도 생각으로 어려울 거란 예상은 못했지. 그리고 감독님들과 이야기할 때도 신뢰가 생겨서 믿고 갔지. 그런데 막상 찍어보니까 어렵더라. 얕봤던 거지.
지금까지 스스로를 누르는 연기를 많이 했다. <아이스케키>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숨긴 채, 그것이 분노인지 연민인지 모를 속마음을 지녔었고, <비열한 거리>에서도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역할 탓도 있지만 배우의 기질 탓 때문도 아닐까 생각했다.
원래 그런가 보다. 평소에도 내가. 사실 난 아까도 말했었지만 연기할 때 그걸 의도하고 연기한 적은 한번도 없으니까. 사실 <비열한 거리>에서도 종수는 본심을 감췄다기 보단 정말 병두(조인성)를 좋아해서 목숨까지 걸겠다는 충직한 캐릭터였다. 그런데 나중에 병두가 ‘친구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넌 건드리지마’ 했을 때, ‘우리 식구보다 그 새끼가 정말 중요합니까’라고 하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건드리지마’ 이랬던 거다. 죽어도 자기 식구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안 한 거지. 그래서 종수는 ‘어?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네, 알았어.’ 결국 그렇게 배신하게 된 거지. 쉽게 말하면 단순한 거다. 대단히 단순해서 믿음이 바뀐 것뿐이고 난 그렇게 연기했지. 근데 그게 원래 그런 속내를 감추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 거지.
다르게 보면 우직하단 인상에 가깝다. <달콤한 인생>에서도 그랬고.
상황 상황에 맞게 자꾸 변해야 했으니까. 여기선 드러내야 맞는 거고, 저기선 감춰야만 맞는 거라는 걸. 그건 사실 감독님들이 진짜 나를 캐릭터에 잘 붙여놔서 그렇지. (웃음)
그런 면에서 <기담>의 캐릭터가 궁금한데.
내가 생각할 땐 가장 평면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싶은데, 안 드러냈으니까. 솔직히 영화를 아직 못 봐서 어떻게 됐을지 잘은 모르겠고. (웃음)
예고편을 너무 잘 만들어서 기대되나? (웃음) 어쨌든 이번이 6번째 영화다.
아, 그런가? (손가락으로 세보더니) 아, 그렇네! (웃음) 6개 맞네. 와~ 많이 찍었다. (웃음)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6번째 영화까지 왔는데, 처음과 지금은 뭔가 달라졌을 것 같다. 3자 입장에서 보기엔 마치 계단을 밟아가고 있는 것 같다.
분명 계단은 밟고 있겠지. 전에 대한 반성과, 복습과 예습을 철저히 하려 하니까. (웃음) 그리고 장르가 거의 다 틀렸기 때문에, 이제 첫 계단일 수도 있다. 나한테 맞는 옷을 못 찾았을 수도 있고. 욕심이라면, 맞는 옷 따윈 필요 없이 어떤 옷이든 잘 맞추고는 싶다. 모든 장르를 해보고 이 장르의 내 약점은 이거다, 이 장르의 강점은 이거다, 이런 걸 많이 분석해보고 싶다. 그럼 아마 다음 공포나 다음 조폭 영화에선 <기담>이나 <비열한 거리>보단 더 업그레이드된 무언가가 생기겠지. 아직은 경험하는 단계? 아직까진 데뷔다. 아직도 난 신인.
함께 출연한 김태우나 김보경, 이동규는 모두 경험 많은 선배이자 인정받는 연기자다. 나름대로 배울 점도 많았겠다.
뭐, 세분이 연기 잘 하시는 건 다들 아니까 거기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런데 카메라 밖에서, 연기자가 아닌 모습에서 세 분 다 배울 점이 아주 많다. 일단, 이동규 선배 같은 경우는 되게 진지하다. 스텝들의 고민까지 들어주시고. 또 그래 줄 수 있을 듯한 큰 형 같은 느낌이다. 오히려 김태우 선배가 막내 삼촌이나 작은 형 같다. 나한테만 일부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사실 내가 굉장히 어려워할 선배인데 내게 먼저 와서 장난쳐 주고, 방금 전처럼(인터뷰 현장에 있던 김태우 씨가 도중 종종 장난을 걸어 왔음.). 덕분에 난 현장에서 기 죽어서 연기하지 않아도 됐다. 김보경 선배도 되게 장난 많이 쳤다. 김태우 선배랑 편 먹고. (웃음) 그런데 짓궂을 정도로 장난쳐도 나한텐 고마운 거니까. 김태우 선배의 가정적인 모습도 좋고. 롤 모델로 삼고 싶을 정도로. 연기는 롤 모델이 없지만 인간적으로 생활하는 건 선배님들을 롤 모델로 삼고 싶을 정도로 많이 배웠다.
그런데 항상 남자배우들과 엮이더라. 여자 배우와도 엮일 만 한데. 제대로 된 사랑 연기도 한번 해봐야 하지 않겠나?
아직 부족하다. 아직 큰 자신은 없는데, 언젠가는 해야지. 정통 멜로보단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나 그런 쪽부터 밟고 싶다. 물론 정통 멜로도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거면 얼마든지 하고 싶지만. 장르는 안 가린다. 어떤 장르를 하고 싶다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은 거지. 정말 크고 백 씬 중에 팔십 씬 나오는 역할도 내가 못할 거면 안 하고. 단역이거나 한 씬밖에 안 나와도 간당간당 내 그릇에 넘칠 듯 말 듯 채울 수 있겠다, 싶을 정도면 욕심내서 하고. 무리하진 않고 싶다.
<논스톱> 시절 생각하면 코믹도 나름 어울리던데.
아니다. 솔직히 난 어색하던데. (웃음)
좋지! 굉장히. 처음부터 남들한테 박수 받고 싶고, 호응을 얻고 싶어서 생각했던 일이니까. 물론 결국엔 돈 벌기 위한 직업으로 배우를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론 관객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연기하는 거잖아. 그니까 그런 사람들이 날 알아보고 좋아해주고 그러면 좋지. 굉장히 신난다. 그리고 그럴 때 ‘나 아직 안 죽는구나. 다음 작품 또 들어오겠구나’ 하는 희망도 생기고. (웃음)
연기자 진구와 일반인 진구 사이엔 어느 정도의 간격이 있는 것 같나? 본인 생각에.
거의 차이가 없다. 연기할 때도 양면성을 갖고 있는 것 같고, 실제 생활에도 그렇다. 굉장한 이중 인격까지는 아니어도 양면성이 있지. 밝고 어두움이 확실히 있어. 극과 극의.
앞으로 <기담> 이후에 정해진 차기 계획 있나?
홍보팀에서 ‘<트럭>에 출연 예정 중입니다.’ 정도만 말하라던데? (웃음) <호로비츠를 위하여>의 권형진 감독님 작품이고 유해진 선배님과 함께 한다.
촬영은 시작했나?
프리 프로덕션은 들어갔고. 본격적인 1회 차 촬영은 내일 모레, 목요일(6월 19일)부터.
첫 주인공으로서 <기담>에 대해 어필한다면, 앞에 있는 나까지 포함해서.
생각해온 건 아니고, 아까 인터뷰 중에 문득 생각이 났는데, 이번엔 이 카피로 밀고 싶다! (웃음) 차가운 공포영화가 아닌 따뜻한 공포영화다. 보통 여름에 피서용으로 에어컨 나오는 극장가서 시원한 공포영화나 보자, 이런 분들 많은데 그런 시원한 공포영화는 아니다. 방에 에어컨 세게 틀어놓고 나중에 추울 때, 두꺼운 이불을 덮으면 따뜻함과 시원함이 공존하는 오묘한 상황이 된다. (웃음) 그런 느낌을 관객 분들께서 받아주셨으면 좋겠다. 만약 <기담>이 내 생각에 맞는 느낌으로 나왔다면 분명히 그럴 수 있고 흥행도 잘 될 거라 생각한다.
그럼 다음주에 나도 확인해보겠다.
나도 아직 못 봐서 장담은 못하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내 잘못만은 아닙니다! (웃음)
2007년 7월 24일 화요일 | 글: 민용준 기자
2007년 7월 24일 화요일 | 사진: 권영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