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작품들 중 가장 큰 규모로 개봉한다더라.
(홍보사 직원에게)규모가 어떻게 되지?
(홍보사 직원)300개요.
교차 상영하는 거 아냐? 요즘은 통 믿을 수가 없어. (웃음) 그래도 최소한 대체 어디서 영화 상영하냐고 전화는 안 오겠네. (웃음) 예전엔 다들 나한테 전화해서, 도대체 어디서 하는 거야? (웃음) 그러다 보니 다 다운받아서 본다더라.
전도연과 하정우에게 캐스팅 제의를 던진 시점은 각각 <밀양>과 <추격자>가 공개되기 전으로 알고 있다. 원래부터 대중들에게 어느 정도 신뢰감을 주는 배우들이었지만 우연 같은 시의성이 겹쳐서 더 큰 화제가 발생했다.
하정우는 캐스팅하니까 <추격자>가 흥행질주를 달리면서 여기저기 거론되고 전도연에게 제의를 하니까 나중에 깐느에서 상 타더라. 물론 그 전부터 이미 알려진 배우들이었지만 상대적으로 매스컴의 관심을 더 받게 됐다는 건 좋은 거 아닐까.
<아주 특별한 손님>과 마찬가지로 다이라 아즈코의 단편을 원작으로 해서 <멋진 하루>를 연출했다. 그 이전에 <여자, 정혜>도 단편 원작이 있는 작품이고, KBS에서 연출한 <내가 사랑한 집>도 원작이 있다. 개인적으로 원작을 바탕으로 둔 각색을 선호하나?
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 그게 나와 맞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내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안 쓰는 건 아니지만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했을 때 안정감이 확보되니까, 그런 면에서 접근이 편안하다고 할까. 그리고 장편보단 단편이 더 접근하기 편한 것 같고, 명쾌한 주제를 전달하고 끝내잖아. 디테일은 내가 붙이면 되고. 좋은 작가들의 아이디어를 채용하는 셈이지. 물론 앞으로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안 쓰겠다는 게 아니라 확실히 여러 가지 면에서 단편을 영화화하는데 장점이 있다는 말이다.
단지 텍스트를 이미지로 만들고 싶어서 단편을 영화화하는 건 아닌 거 같다. 다만 맥락이 잡힌 문장에 다른 수식어를 붙여보고 싶은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 내가 해석하는 여지들이 있다. 단편은 그런 것들이 끼어 들어갈만한 여백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작업이 가능한 것 같다.
<멋진 하루>는 같은 원작자의 작품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아주 특별한 손님>과 유사한 면모가 많이 엿보인다. 어떤 생경한 길 위에서 시점이 시작된다거나 예측하지 못한 지점으로 주인공의 동선이 이동된다던가, 그리고 일단 그 사연들이 뜬금없다. 개인적으로 같은 원작자의 작품을 연속해서 영화화했다는 건 그만큼 그 두 작품에 당신의 취향이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당긴다. 우연함 속에서 어떤 깨달음을 찾아간다는 것? 혹은 찾아내진 못해도 찾아가는 여정, 이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행태 속에서 누구나 한번쯤 꿈꿀만한 일이다. 그건 부정적인 일탈이 아니라 긍정적인 일탈이니까. 다만 용기가 없어서 누구나 실제론 못하겠지. 그래서 우연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런 게 가능하면 참 좋겠다 싶더라. 그건 내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렇게 영화를 따라가는 거지.
우연한 과정 속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는 여정이 결국 필연처럼 느껴진다. 그 우연한 여정을 거친 인물들은 스스로 어떤 미세한 변화를 감지한다. 그건 거대한 변신이 아니라 소소하게 느껴지는 변화다. 그런 작은 변화에 대한 호감이 본인의 영화에 존재한다.
그게 현실적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영화가 꼭 현실적이어야 될 필요는 없다. 다만 이런 소재가 지닌 장점은 상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던지면서 그것이 엄청난 변화를 부여하진 않더라도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작은 변화가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 것인가 얘기한다. 큰 변화보다 작은 변화가 훨씬 더 힘들다는 거지. 꼭 영화가 그런 얘기를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할 수 있지만 일단 어떤 매체로든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중요한 게 아닐까. 우리 대부분은 엄청난 것을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싸여있다. 누구나 1등을 해야 되고, 엄청난 성공을 해야 되고, 많은 돈을 벌어야지, 그런 강박이 부질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작은 것을 먼저 느끼고 받아들이는 게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350만원이라는 액수가 그런 의미를 내포하는 것 같다. 350만원이 적은 액수는 아니더라도 그 액수는 희수의 내면적 여유가 어느 정도 너비인지 물질적으로 구체화한다. 그만큼 350만원이란 액수를 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지금 현실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애매한 액수가 어느 정도일까를 생각했다. 많은 것 같지만 별 거 아닌 돈 같기도 할만한, 그 정도의 논란이 생길 수 있는 액수를 정하는 게 좋겠다 싶더라. 너무 명확하게 돈이 많거나 적으면 속셈이 드러나버리니까. 그래서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조율을 했다. 얼마 정도가 적절할지, 그리고 그 중간을 선택했다.
그 액수만큼 희수의 애매한 태도도 관건이다. 희수는 자기 입으로 원래는 돈 없다고 하면 잔뜩 욕해주고 오려고 했는데 병운이 돈을 준다고 하니까 동행하게 됐다고 말한다. 결국 희수를 이끈 건 호기심에 가깝다.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의 보경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 그런 예기치 않는 상황에서 예측할 수 없게 진전되는 상황에 대한 호기심을 즐기나 보다.
실제로 내게 그런 상황이 생기면 용기가 없어서 못할 거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서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겠지. 그만큼 영화 속 여주인공들은 용기가 있는 거다. 대부분 피상적으로 내 영화 속 캐릭터들이 약하고 여린 사람들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내가 그리는 사람들은 가장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그걸 드러내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일 뿐이지. 그리고 마지막엔 자기가 원하는 걸 다 성취해간다.
원작의 남자는 때가 묻은 느낌이지만 병운은 좀더 순수하게 묘사된다.
의도적으로 순수한 느낌을 준 건 그게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다. 나쁜 놈 같지만 보다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인간처럼 보이는 거지. 그러려면 소설보단 순수한 어린애 같은 쪽으로 가는 게 맞을 거라 생각했다.
사실 당신의 영화에서 남자들은 대부분 무례하다는 느낌을 준다.
사실 실제로 한국 남자들이 무례하지 않나.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 특성 자체가 무례함이라 본다. 자신은 무례하지만 남의 무례함을 참지 못하는, 그게 우리나라 사람의 전형이 아닌가. 다만 그걸 남자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지. 사실 여자들도 무례하다. 그래서 이번엔 희수가 만나는 여자들도 다 무례한 거다.
어쩌면 어떤 남자캐릭터는 좀 더 악한처럼 묘사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여자, 정혜>의 삼촌이라던가, <러브토크>에서 써니(배종옥)의 전남편은 맘만 먹으면 정말 사악하게 그릴 수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건 사람에 대한 전형적 태도를 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된다. 충동적인 상황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믿음이랄까.
정확히 캐릭터가 이렇다고 설명하는 건 힘들다. 예를 들어 병운의 캐릭터를 두 줄로 얘기해달라면 할 수 없는 거다. 사람은 복합적이니까 단순히 어떤 인물이다라는 식으로 규정이 안 된다. 그리고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주변인물도 규정할 수 없는 거다. 단지 그 순간 극한 행동을 하느냐, 아니면 선한 사람처럼 보이느냐 차이일 뿐이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왜 내영화에는 일관적으로 무례하고 여주인공을 고립시키는 남자들이 나오냐고 할 수 있지만 어쩌면 그건 그 상황만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는 거다. 그 사람들도 어디선가는 좋은 사람들일 수 있는 거니까. 실제로 착한 사람도 많이 나오는데 착한 사람들은 잘 안 보인다. 반대로 너무나 무례한 인간들은 눈에 잘 띈다.
오프닝 시퀀스의 시선은 어떤 대상을 찾는 것 같은 느낌이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느낌인 거 같기도 하고, 우왕좌왕하는 느낌인데 희수를 발견한 카메라가 그 뒤를 쫓기 시작할 때는 조심스럽게 뒤를 밟는 느낌이다.
훔쳐보는 느낌이 희수의 캐릭터를 알려주는 거다. 희수는 경마장에서 철저한 이방인이 되는데 자기가 남들에게 이방인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사람들 있지 않잖아. 어디 가도 사람들 눈에 안 띄었으면 하는, 두리번거릴 수 없는 거지. 슬쩍슬쩍 곁눈질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고 싶은 캐릭터인 거지. 그리고 난 그 정도만 얘기하고 그 다음은 뛰어난 배우가 있으니까 알아서 맡기는 거다.
<아주 특별한 손님>과 마찬가지로 <멋진 하루>도 생경한 이야기지만 각자 그런 생경함을 중화시키는 요소들이 있다. <아주 특별한 손님>은 시골의 이미지가 그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에 반해 <멋진 하루>는 배우들의 연기가 그 역할을 하는 게 아니었나 싶다. 배우들이 영화에 능동적인 느낌을 준다고 할까.
소재 자체가 굉장히 경쾌하고 움직임이 많은 영화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거기에 맞게 캐릭터들도 운율에 따라서 움직여주는 거다. 영화의 음악도 그래서 재즈여야 된다고 생각했다. 저 사람의 움직임이 프리 재즈 같다가도 어느 순간엔 2박자의 구닥다리 재즈 같은 느낌도 있고, 좀 더 뒤로 가면 브라질 리듬이 가미된 음악도 나온다. 더 뒤에 가면 애잔한 느낌이 더해져서 멜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 자체가 멜로처럼 다가오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그에 맞춰서 캐릭터들은 다같이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업 되는 거다.
영화마다 사람들이 모여서 왁자지껄해지는 광경이 한두 번씩은 꼭 나오더라.
원작과 상관없이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부분이 있다. <여자, 정혜>에 호프집에서 TV보면서 떠드는 패거리의 장면을 넣은 건 그것이 일상에서 가장 흔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멋진 하루>같은 경우는 두 사람을 군중 속에 집어넣고 싶었다. 그래야 두 사람의 존재가 더 명확해지니까.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병운이 말하지 않았던 병운의 과거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드러난다던가, 희수가 그런 얘기를 듣고 갑자기 여유를 찾았다는 듯이 담배를 피고, 이런 건 군중 속에서만 벌어질 수 없는 사건이 아니었을까. 나름대로 하나의 효과적 장치라고 생각했다. 군중 속에 인물들을 놓여졌을 때 캐릭터가 생경해지는 순간이 있다. 혹은 뜬금없이 엉뚱해지거나 그로 인해 웃기는 상황도 발생하고. 물론 그게 대단히 웃기진 않고 심심한 느낌이 더불어 나타난다. 그렇게 우리 주변의 캐릭터들을 넣어보는 게 나름의 재미라고 생각했다.
<여자, 정혜>나 <아주 특별한 손님>의 주동인물인 정혜나 보경은 식물적인 여자들이었다. 그에 반해 그녀들의 주변인물들은 상대적인 생동감이 있다. <아주 특별한 손님>에서 김영민 씨가 그런 역할을 했는데 <멋진 하루>에서도 한몫 하더라. 역시나 무례하기도 하고.
(웃음) <아주 특별한 손님>의 기용(김영민)이 <멋진 하루>의 병운 같기도 하다. 그런데 어쨌든 결국 미워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단지 우리 주변에 있는 한심한 사람일 수 있는 거지.
영화에 나오지 않고 예고편에만 등장하는 장면이 있더라. 희수가 카페에서 누군가에게 병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던데, 후일담 아닌가?
맞다. 희수가 그 날의 이야기를 거짓말 반, 진심 반으로 얘기하는 후일담 장면이다.
말미에 에필로그 형식으로 병운의 스페인 막걸리 집 간판이 등장하기도 한다. 전작에서는 그 상황 이후, 즉 인물들의 후일담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예전엔 시나리오 단계에서 그런 장면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시나리오 자체에 그게 있었고.
전작들에서는 인물의 어떤 변화가 감지되는 지점에서 이야기가 끝나곤 했다. 결국 <어떤 하루>를 통해 처음으로 후일담을 묘사한 셈이다.
이전의 얘기는 그 전에 멈추는 게 맞을 거라 생각했지만 <멋진 하루>는 거기까지 얘기해주는 게 맞을 거라 생각했다.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린 거지. 사실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긴 하는데 대부분 시나리오 단계에서 판단을 내린다.
그런데 왜 희수의 후일담은 영화에서 누락된 건가?
원래 두 가지 버전을 생각했었다. 지금 극장에서 상영되는 버전 외에 또 하나의 버전. 지금 버전은 굉장히 스트레이트한 진행이지만 사실 조금 복잡한 편집을 해보고 싶었다. 굉장히 위험한 시도라면 시도일 수도 있고. 원래 후일담 말고도 제3자들이 희수를 이야기하는 장면도 찍었었다.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다른 버전을 안 만든 건 아니고 내가 생각한 다른 버전을 만들기에 내 스스로 몇 가지 결여된 지점이 있다고 판단됐고 이 상태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편집하는 과정에서 다른 버전을 포기했다.
말을 듣고 나니 그 후일담이 그저 서사적인 에필로그 정도로 배치될만한 사안이 아니었나 보다.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굉장히 복잡한 거였다.
어쩌면 좀 교차적인 배열 같기도 하고,
약간 모던한 형식의 배열을 취해보려 했는데 그 씬들의 완성도가 떨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결과물의 형태가 불만족스러웠나 보다. 생각해보면 전작들에서 주인공 여성들이 자신의 사연을 스스로 말하는 경우도 없었다. 그런데 희수는 스스로 입을 열더라. 그 덕분에 이 영화에서 좀 더 적극적인 느낌이 발생하는 것 같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희수는 이전에 내 영화에 나왔던 여자 캐릭터들과는 다른 인물이다. 희수가 과연 병운이를 왜 찾아갔을까, 물론 자기 하소연까진 아니더라도 희수에겐 확실히 누군가 기댈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던 거다. 그리고 병운이가 그 역할을 해준다. 개입하는 인물이 아니라 희수에게 필요한 걸 들으면서 모른 척 해줄 수 있는, 희수에겐 정말 완벽한 대상인 셈이다. 이유를 딱 떨어지게 설명하진 않지만 희수가 그래서 병운을 찾아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야, 이 나쁜 놈아, 이렇게 욕도 하면서 자기 하소연도 슬쩍 던질 수 있는 편안한 대상이 필요했던 건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녀석 밖에 없는 거지. 그런 목적을 숨기고 갔다.
빚을 남긴다는 건 인연의 고리를 남기고 싶다는 희수의 속마음이기도 하다.
말을 하지 않을 뿐, 그런 느낌이지. 그리고 그건 관객만 아는 비밀이고. 만약에 이 영화를 좋게 느끼는 관객이 있다면 그런 비밀을 공유한다는 기분을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말부에서 빚을 둘러싼 두 여자의 구도가 흥미로웠다. 병운을 대신해 빚을 갚겠다는 그 여자에게 희수가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그 여자는 ‘물러서지 않으실 거죠?’라고 묻는다. 마치 신경전처럼 보였다. 여자들은 병운에게 경쟁적으로 빚을 주려고 한다.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그 장면은 원작을 거의 그대로 재현한 장면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장면들은 뉘앙스를 조금씩 바꿔나갔는데 말미에 그 장면에서 등장하는 그 여자는 원작과 거의 똑같다. 소설을 봤을 때, 엉뚱하지만 그 장면이 여러 가지로 복합적인 감정들을 완성해주는 순간 같았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여자 같기도 하고. 어쩌면 관객에겐 제 정신이 아닌 여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희수에겐 시사하는 바가 많다. 단순히 착한 여자를 봤다기 보단 자신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놓치고 살고 있다는 걸 그런 엉뚱한 사람을 통해서 느낀다. 하루가 아이러니의 연속이랄까? 마치 이렇게 살지 말아야 돼, 라고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딱히 교훈을 주는 건 아니지만 인물들을 통해서 희수가 알아서 느끼는 거다.
지금까지 4편의 영화를 찍으면서 항상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녀들은 항상 어떤 상처를 지닌 듯 보이고, 영화 속에서 그것들을 점차 치유해 나간다. 그런데 <러브토크>에서 박희순이 연기한 지석은 그 여성들과 심리적으로 유사한 느낌이 있다. 중요한 건 성별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측면이다. 다만 당신이 여성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는 건 남성보다 여성을 대상으로 둘 때 감성적으로 부합되는 측면이 많기 때문에 여성을 선호하는 것 같다.
소소한 묘사 같은 면에서 좀 더 활용할 수 있는 여지들이 많다고 할까. 그래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두는 쪽을 선택한 면이 있다. 사실 남자가 주인공이 돼도 좋다. 다만 그런 소소한 부분들이 달라지겠지.
(웃음) 전에도 그랬다. 특별히 전도연이라서 간섭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정우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작업했던 배우들한테도 필요할 때만 개입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거다.
하정우의 능청스런 대사도 좋았지만 전도연의 리액션이 훌륭했다. 전도연의 리액션이 이 영화의 활력을 원활하게 순환시키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대사량이 상당히 많아졌다.
아마 전부터 대사가 많은 영화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소재 자체가 대사가 많이 필요 없으니까 못했지만 이번에는 수다스러운 영화라고 규정짓고 수다와 리액션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디 알렌 영화같이, 인물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가 있길 바랬다. 항상 같은 배경에서 배우만 바꿔서 똑같은 짓을 시키는데도 재미있지 않나. 어쩌면 그렇게 배우들도 우디 알렌 영화에만 출연하면 코믹 연기를 생동감 있게들 잘 하는지. 그건 감독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주는 나이브(naive)함과 모던함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걸 이번에 시도한 거지.
본인이 생각하는 결과물의 예상 범위에서 벗어나거나 모자라다 생각되는 부분이 있나?
내 스스로 완성도에 대해서 만족한다고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정말 가져가고 싶은 것 하나는 가져간 거 같다. 이 영화를 보고 났을 때 한가지 관통되는 느낌은 있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 여행 끝에 느껴지는 쓸쓸한 기운 속에서 마음이 편안하다는 느낌. 그것만큼은 살렸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그건 배우들의 아우라에서 영향받은 느낌도 있을 거고, 나와 배우들의 호흡이 잘 맞아떨어진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 하나조차도 못 가져갔겠지.
쉽게 말해서 영화의 말미에 보여지는 희수의 웃음을 관객이 정서적으로 수긍하지 못하면 <멋진 하루>는 실패한 영화가 된다.
그래서 그것까진 된 게 아닌가 싶더라.
매 영화마다 전작의 주연여배우들이 차기작에서 카메오로 출연했다. 사실 어쩌다 한번 해봤는데 이어지게 된 건가, 아니면 애초에 작정하고 시작한 건가?
그냥 철학도 없이 어쩌다 해본 거지. 굉장한 의미는 아니지만 전작의 배우들이 나를 도와줬다는 의미도 있다. 물론 현장에 와서는, 이거 시키라고 오라고 했어? 이렇게 투덜투덜하기도 한다. (웃음) 배종옥 씨 같은 경우는 자기 집으로 와서 목소리 따라고 해서 캔맥주 사 들고 쳐들어가서 녹음기 들고 빨리 하라고 재촉했다.(웃음)
사실 그게 배우들과 원만한 유대감이 없다면 힘든 일이다.
대부분 좋았지. 김지수 씨, 배종옥 씨, 박희순 씨, 한효주 씨, 그 외에도 조연으로 출연했던 배우들도 계속 출연해주시고. 좋으니까 같이 또 하는 거 아닐까. 그 사람들도 내가 싫으면 안 해줄 테고, 나도 그 배우가 맘에 안 드는데 굳이 출연시키려 하지 않을 테고. 서로 즐거우니까 하는 거지.
사실 관객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알고 보면 재미있지. 그런데 모르고 보면 그냥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를 거다. 한효주가 어디 있어? 막 이럴 수도 있고. (웃음)
어쨌든 처음에 의도한 건 아니라도 이렇게 계속 이어지게 된 만큼 이젠 이걸 계속적으로 밀고 나가야 될 것 같은 의무가 생기진 않았을까 싶다.
글쎄, 계속 해볼까? (웃음) 지금에 와선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엔 안 되겠지. 만약 내 다음 영화가 사극이라면 전작의 주인공이 사극에 카메오 출연한다는 게 이상할 테고. 그런 건 의미의 연결이 없으니까 잘못하면 장난이 돼버리는데 공교롭게도 지금까지의 영화 4편은 동시대라서 그 인물이 그 자리에 존재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는 상황이니까 했지. 억지로 넣을 수는 없다.
그건 관객을 위한 서비스 같지만 오히려 스스로를 위한 위안처럼 느껴진다. 그녀들이 잘 살고 있으리라는 안도감이랄까.
맞다. 정확하게 얘기했다.
그냥 헛소리 하나 한다면 그 중간지점의 이야기를 해봐도 재미있겠다.
배우들이 안 할걸. 너나 가서 해라, 우리가 무슨 네 욕망의 도구냐, 이러면서.(웃음) 아마 창피해서 배우들한테 얘기도 못 꺼낼 거다. 창피해서.
사실 그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때 좀 더 생명력이 느껴질 수도 있고.
그걸 의식적으로 하면, 지가 무슨 대단한 짓이나 한다고 배우들 불러서 쇼하고 있냐는 소리 나올 거다. 이전에 내 성격상 못할 거고. 마음으론 하고 싶다고 해도 배우들한테 말도 못 꺼낼 거다. 전도연이나 김지수, 배종옥은 다들 장난 아닌 애들이라 내가 얻어맞을지도 몰라. (웃음) 여배우들이 종종 누나처럼 나를 걱정한다. 그런데 어떤 매체에서 인터뷰 기사의 뉘앙스가 반대로 나왔더라. 여배우들이 나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걱정한다고 했는데 기사에는 내가 배우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쓰였더라. 반대로 여배우들이 날 걱정하지. 제발 좀 돈 좀 벌어라. 제발 좀 극장에 많이 걸리는 영화 좀 하라고.
전도연 씨도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감독한테 마음 편히 가지라는 말을 많이 했다던데.
전도연 씨가 걱정 많이 했을 거다. 내가 프리 작업에서 방황을 많이 하거든. 혼자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다니니까 배우들이 많이 불안해하지. 저걸 믿고 내가 영화를 찍어야 되나, 걱정 많이 했을 거야. 헛소리하면서 밤새 술 먹고 다음날 정신 없고 그러니 얼마나 신뢰가 안 가겠어.
준비 단계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을 철저함으로 상쇄시키려다 보니 고민이 많아지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내가 하는 영화가 대단할 게 없잖아. 이슈를 가지고 하는 영화도 아니고, 어쩌면 너무 평범하고 소박하다 보니 대단한 걸 보여줄 수 없다면 뭔가 세심한 뭔가를 해야 되고, 기왕에 완성도도 높여야 하니까. 만약 내가 다른 장르 영화를 했다면 특별히 신경 쓸 부분이 있으니 괜찮을지 모르지만 이건 그렇게 해야만 되잖아. 어쩌면 이건 아무것도 아닌 얘기가 되거든. 그래서 불안하니까 내 속이 많이 썩지.
말 그대로 평범한 것이라 디테일을 살려야 한다는 게 관건이었을 것 같다. 그만큼 프리 작업이 고민스러웠을 테고. 영화를 찍을 때보다 영화를 찍기 전에 시행착오도 많을 것 같다.
아무도 영화화 안 할 것 같은 얘기들이니까 투자 받기도 힘들고, 누구한테 기댈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이것도 맞을 거 같고, 저것도 맞을 거 같고, 특별한 정답이 없으니까. 준비 다 해놓고 생각해보면 아닌 거 같아서 다시 뒤집고, 또 뒤집고. 남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닌 듯 하지만 그런 과정이 있어서 만드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좀 더 편치 않은 영화다. 그만큼 같이 준비하는 사람들은 더 피곤해지는 거고.
<멋진 하루>는 동선의 변경이 잦다. 물론 <아주 특별한 손님>도 동선의 변화가 있지만 그건 점을 찍고 오는 개념이므로 계속 랠리 포인트가 변경되는 <멋진 하루>가 보다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 같다.
거의 대작 수준의 로케이션이었다. 이건 미치지 않고 할 수가 없는 일이랄까.(웃음) 보통 멜로 영화에서 이렇게 많은 장소가 나오진 않지 않나. 그런데 이건 한번 가는 장소는 다시 안 가니까 난리가 아니었지.
기시감을 느낄만한 장소들이 제법 등장한다. 하지만 카메라의 앵글이나 자연광의 느낌이 이국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그게 목표였다. 촬영팀이나 촬영 감독하고 많은 고민을 했지. 리얼리즘 영화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공간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판타지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게 목표였다. 판타지가 아닌데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어떤 장치들이 있어야 된다는 게 촬영팀의 관건이었다. 빛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연구하기도 하고, 마땅한 장소를 수없이 찾아 다니면서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고민했고. 일반 관객들은 눈치 챌 수 없을 만한 부분이지만 전문가들이 보면 아마, 더럽게 고생했겠구나,(웃음) 느낄만한 지점이 있을 거다.
장소의 고유한 특성을 지우고자 하는 느낌이 있다.
내 영화에서 고집하는 공통점은 무국적성이다. 내 영화에서는 표지판이 거의 안 나온다. 여기가 어느 동네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고. <러브토크>때도 로스앤젤레스라는 말은 한마디도 안 나온다. 길거리 표지판도 안 나오고. 물론 마지막에 ‘베이커스필드’가 나오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이 카메라에 잡힌 거다. 가능하면 카메라 앵글을 잡을 때 최대한 지역성을 감춘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많을 거다.한남 오거리에서 촬영을 몇 번 했는데 카메라를 뒤로 빼면 한남 오거리가 너무나 확연히 드러나서 재미없었다. 그래서 치고 들어가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이런 무국적성을 살려야 거기서 오는 미묘함이 살아난다.
낯설음과 익숙함 사이에 인물을 내려놓고자 하는 건가?
애매모호한 지점에 주인공들을 던져놓는 거지.
영화에서 나오는 정서적 애매함은 그 장소의 속성에서 기인되는 바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낯선 풍경을 찍어내는 것과 일반적인 풍경을 낯설게 찍어내는 건 다르다. 어느 것에 중점을 두고 촬영하나?
두 가지 다 해당이 된다. 우선은 장소를 찾을 때 후보들을 올리고 그 다음엔 그 장소들로 이동해서 가장 근접한 느낌을 얻을 수 있는 장소로 선택한다. 물론 가끔, 왜 여기서 했을까, 라는 실패한 느낌을 얻기도 하는데 결국 두 가지를 통해서 가장 탁월한 걸 얻는 거다.
가장 좋을 거라 생각했던 장소가 생각보다 별로였다거나 별로라고 생각했던 장소가 생각보다 괜찮았던 경우도 있지 않던가?
경우의 수가 워낙 많았지만 로케이션은 몇 번을 빼고 대부분 만족스러웠다. 노력한 만큼 되는 거라 열심히 하다 보면 실패해도 후회되진 않는 거지. LA에서도 그랬다. 미국 로케이션 매니저가 <러브 토크>는 미국에서 학생 졸업작품 수준의 적은 예산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 예산으로 할리우드 수준의 로케이션 투어를 하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 하더라. 보통은 그 정도 예산이면 집 하나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한다는데 우린 LA를 다 돌아다녔다.
저예산이기 때문에 걸리는 부분도 있을 거다.
저예산이라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게 너무 많지. 대부분 포기의 과정이다.
반대로 저예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렇다. 이런 얘기를 큰 예산으로 시켜주지도 않을 거고.
<아주 특별한 손님>에 이어서 HD카메라로 찍었다. <아주 특별한 손님>은 HD카메라를 이용한 의도적 기획이었지만 <멋진 하루>는 굳이 HD를 선택할 이유는 없었을 것 같은데.
필름으로 찍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기동성 면에서 디지털이 훨씬 도움이 됐다. 필름 쪽은 아무래도 한자리에서 공을 들일 때 유리하다. 디지털에 더 유리한 어떤 외적 요소들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HD카메라는 필름과 달리 필터링이 없어서 적나라한 느낌을 준다.
강렬하게 느껴지지. 그래서 조명치기가 더 힘들다. 지금도 디지털은 계속 바뀐다. 기종도 바뀌고, 점점 나아지고, 데이터도 맨날 바뀌니까 매번 그 데이터에 익숙해져야 한다. 카메라를 다루는 사람들에겐 굉장히 곤혹스러운 일이다. 필름은 이미 완성된 형태라 나름대로 변주가 가능한데 디지털 카메라는 1년이 다르게 바뀐다. 우리가 쓴 기종도 가장 최신 기종이었다.
같은 HD로 찍었지만 <아주 특별한 손님>과 <멋진 하루>의 이미지는 다르다. 단지 시골과 도시의 대조적 환경 때문만은 아닌 거 같다. 이미지의 색감 자체가 달라졌다.
이번에 더 공을 많이 들인 거다. 같은 촬영 감독이고, 비슷한 디지털이었지만 이번에 좀 더 최소한 자연광을 살리면서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걸 많이 했다. 상대적으로 <아주 특별한 손님>은 짧은 기간 안에 게릴라처럼 찍어서 거칠게 나온 결과물을 노리고 간 것이었고. <아주 특별한 손님>은 가능한 한 자연광 중심으로 갔지만 <멋진 하루>는 인위적 라이팅을 많이 했다. 그런 것들이 아마 좀 더 로맨틱한 느낌을 주더라. 옛날에는 필터를 이용해서 뽀샤시한 느낌을 줬지만 우리 촬영감독이나 내가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최대한 자연광의 느낌을 살리되 크게 드러나지 않는 수순에서 인위적인 라이팅을 가미해서 이것이 로맨스처럼 보이는 효과를 주고자 했다.
사실 로맨스적 행위는 없는데 로맨스의 기운이 느껴진다. 육체는 없는데 정신이 느껴진다고 할까. 그건 마치 남녀의 로맨스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로맨스 같기도 하다.
그렇다. 자기 연민에 관한 것이다.
당신의 감수성에 대해 배우들의 감정적 동의를 얻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내가 다룬 소재 안에서 등장하는 캐릭터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 같은, 혹은 자기 주변에 있을 것 같은 인물들이라 접근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걸 통해서 내가 뭘 하려고 하는지 배우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어렵다. 물론 너무 친숙한 캐릭터를 연기해야 한다는 건 연기자들에게도 부담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하정우가 <추격자>의 지영민을 연기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되려 병운이 더 어려웠을 수도 있겠지.
평범한 연출이 힘들듯이 연기도 되려 것이 어렵다?
뭘 보여줄 게 없어 보이니까.
전도연 씨가 말하기를, <밀양>이후로 자신에게 들어온 유일한 시나리오가 <멋진 하루>였다고 하더라.
시나리오가 하나밖에 없어서 내 영화를 했구나. (웃음)
전도연 씨는 시나리오가 너무 좋았다고 했다. 당신의 전작에서 출연했던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다들 시나리오가 재미있었다란 이야기를 한마디씩 하기도 하던데.
그것 참, 의외지?(웃음)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재미있다라기 보단 기특하다는 게 맞는 말 같다. 이런 얘기를 영화화하려는 철없는 애가 있다니 내가 도와줘야겠다, 라는, 배우들의 감정을 건드리는 면이 있는 거 같다. 사실 내 영화가 대단할 것 없이 너무 평범하지만 그만큼 별로 없는 영화다. 배우들은 그런 걸 캐치하는 거 같다. 이런 영화 하나쯤 있어도 될 것 같아 보이는데 없으니 내가 한번 해볼까, 이런 감성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을 것 같다.
배우들은 그만큼 감성이 풍부하기 때문에 더 그럴 수도 있고.
연기 잘하는 배우일수록 시나리오 보는 능력은 가장 뛰어나니까. 내가 같이 작업했던 배우들은 연기라면 둘째가도 서러운 분들이니까 말할 것도 없을 거다. 감독보다도 오히려 시나리오를 더 잘 알지도 모르고. 시나리오를 보면서 스스로 캐치하는 거지. 이미 자기들의 연기패턴이 서있는 배우들이지만 자신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이야기라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여백이 많기도 하고, 그런 장점이 있었을지 모르겠다.
독특한 캐릭터에 대한 욕심이 있다. 병운도 아마 그런 캐릭터라고 할 수 있고. 어딘가에서 봤음직한데 따져보면 실제론 별로 없는 캐릭터. 만약 남자들이 주가 되는 영화를 한다면 내 욕심으론 상당히 독특한 뭔가를 하려고 할 거다. 특이한 코미디가 될 수도 있고.
슬슬 차기작에 대해서 막연하게라도 구상해 볼만한 시간이다. 현재 본인에게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게 뭔가?
사실 가장 나를 당기는 건 스릴러다. 항상 강렬한 스릴러를 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지만 예기치 않게 우선순위가 좀 바뀐 거다. 물론 지금까지 할 수 없이 했던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일관적으로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해버렸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살 떨리는 스릴러 한번 해보고 싶다. <추격자>를 능가하는? (웃음)
예전에 100억 규모의 블록버스터를 준비했다가 무산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했다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무산됐다. <모던보이>같은 영화였는데 스케일이 더 컸다. 어쩌면 경성을 배경으로 한 기획은 내가 제일 먼저 했을지도 모른다. 원래 먼저 기획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인지 다른 영화는 다 됐는데 나만 안 됐잖아.(웃음)
아직 그 이야기에 미련이 있나?
버리진 못했다. 다만 지금은 시기가 좀 아닌 거 같다. <로드 투 퍼디션>에 <카툰 클럽>을 섞어놓은 갱스터 영화를 생각했었다. 그것도 실은 판타지다. 일제 시대에 무슨 갱스터가 있겠어, 없지. 가공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갱스터의 암투였다.
규모가 큰 영화를 찍게 된다면 그 자체가 새로운 도전이 아닐까 싶다. 사실 저예산 규모의 영화만 했는데 어려움이 없을까?
안 해봤으니 당연히 이질감이 느껴질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작은 걸 운용하다가 큰 건 할 수 있지만 큰 예산으로 영화를 찍던 사람이 나처럼 작은 건 못 할거다. 큰 예산으로 할 때는 가능했던 것들이 저예산에서는 아무것도 안되잖아. 다만 적응하기가 어렵겠지. 사실 더 엄청난 것도 있었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있었는데 그건 2백억 정도 들어야 될만한 스케일이다. 몇 사람한테 얘기하니까 듣는 척도 안 하더라. (웃음)
요즘은 영화계 사정이 좋지 않아서 자금 운용에 무리가 있을 거다.
그걸 타계할 방법이 막연하지. 해외와의 관계 발전도 항상 말로만 하지 실제론 활발한 움직임이 없다. 맨날 똑같은 밥솥 하나 들고 밥은 없으니 누룽지만 긁고 앉아있는 셈이다. 조금만 위축되면 큰 예산 들어가는 건 못한다고 하고 조금만 풀리면 아무 영화나 만드는 것 같고. 이렇게 되면 한국영화의 미래는 없는 거지.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가는 셈이다. 이런 류의 영화를 하는 것 자체가 내 나름의 타협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조차도 운 좋게 가는 것일지도 모르지. 다 외면했던 시나리오이기도 해서 영화화하기도 힘드니까. <멋진 하루>도 전도연 덕분에 가능했다.
전도연 씨를 캐스팅하기 전까지 확신이 없었나?
물론 전도연이 못했다 해도 다른 좋은 배우들이 있긴 하니까 아마 섭외를 했겠지. 다만 전도연이 <멋진 하루>를 선택해주지 않았다면 그 외에 우리가 거론할 수 있는 배우가 많지 않고 심지어 그들마저 외면해버린다면 못하게 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시장은 어렵다고 하지만 반대로 대작엔 자본이 몰리는 경우가 생긴다.
영화계의 현실은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전에도 힘들었고 지금도 힘들기 때문에 영화계가 나빠졌다고 해도 특별히 느끼는 바는 없다. 나한테 예전엔 좋은 환경이었나? 마찬가지로 어려웠기 때문에 새삼스레 나빠졌다 말할 것도 없다. 맨날 떠드는 얘기지만 2차 부가판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온 나라가 다운로드의 천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뭐가 해결되겠나. 영화라는 게 부가판권도 있고 해외 마케팅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되는데 우리는 그런 가능성도 잡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 작은 영화는 점점 힘들어지고 큰 영화는 사회 현상에 따라 술렁이는 거 아닌가. 차근차근 넓게 보는 눈이 필요한데, 그걸 아직 깨닫지 못하는 건가 보다.
2008년 10월 8일 수요일 | 글: 민용준 기자(무비스트)
2008년 10월 8일 수요일 | 사진: 권영탕 기자(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