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검색
검색
<박쥐>를 보고...천재가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스타일
2009년 5월 11일 월요일 | 백건영 편집위원 이메일


웬만한 사람들은 다 보았고 두 번이나 본 사람도 심심치 않을 정도로 논란의 중심에 선 영화 <박쥐>를 이제 서야 보았다. 박찬욱으로 말하자면 ‘복수 삼부작’에 관한 글을 썼을 정도의 개인적으로 애정과 호감을 가진 감독 중 하나였고, 또 적지 않은 평자들이 ‘장난질’이 지나쳤다고 비판한 <친절한 금자씨>마저도 그간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오프닝 신과 정교한 미장센을 이유삼아 호평의 대상에서 놓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박쥐>의 경우는 달랐다. 한마디로 실망스러웠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도 도무지 아무런 감정이 생기질 않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인데, 그 배경은 간단하다. 영화에서 인간이 실종되었고, 자기복제마저 실패했으며 죽음을 너무 가볍게 다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박찬욱의 영화라는 점에 기인한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아마도 박찬욱이 <올드보이>에서 보여준 이후가 아닐까 한다.) 극한의 이미지가 영화미학의 하나의 준거가 되고 있다. 이는 내러티브가 아닌 시각적 효과의 극대화에 의지한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자기복제의 위태로운 전조를 보일 때까지도 이러한 경향이 현실이 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나 <박쥐>에 이르러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망치로 이빨을 뽑고 상대의 머리를 깨부수는가 하면 가위로 혀까지 잘라 심장 약한 관객을 힘들게 만들었던 박찬욱의 영상미학. 박찬욱의 영화가 장도리로 머리를 내려치고 이빨을 뽑아서 칸의 그랑프리를 차지한 거라 생각한다면 대단한 오해다. 그러한 장면이 꼭 필요한 상황에 등장하면서 심리적, 정서적으로 잔혹함을 느끼게 한 드라마구조가 바닥에 깔려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감독 자신이 서구의 관객이 열광한 영화적 근본을 너무 빨리 망각해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적어도 박찬욱의 영화라면 잔혹성이 선정성과 상징성 사이를 줄타기하며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로 연결되는 과정을 통해 미학적 가치를 확보했어야 했다. 다시 말해 ‘이미지의 과잉’이 주인공들의 ‘내부 과잉’과 균형을 이뤄야 하고, 박찬욱이라면 이 정도는 능히 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쥐>는 시각적 물리적 잔혹성 수준에 머문 영화가 되고 말았다. 심리적 정서적 잔혹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대명제를 외면한 채 오로지 잔혹함과 유희 사이에서 키치적 감성으로만 승부하려는 우를 범해버린 것이다. 혹자는 상현과 태주의 대극으로 라 여사로 상징되는 부르주아 집단을 놓음으로써 계급성을 고수한다는 말로 박찬욱의 화법을 옹호하지만, 그런 이들이라면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에서 잔느와 소피에게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장면을 먼저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영화에 인간이 실종되었다는 점이다. 흡혈귀가 된 상현과 태주는 물론이고 라 여사와 강우, 그의 마작 동료들 역시 사람다움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박쥐>에서 사람이라 불릴 만한 이는 찾아보기 드물다는 것이다. 이는 죽음을 가볍게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사실 영화 초반 순교와 자살을 혼동하지 말라는 의사의 충고를 듣는 순간까지만 해도, 삶과 죽음, 성과 속의 꽤나 진중한 드라마로 흘러가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대사에 불과했다. 그러니 순교는커녕 살인을 일삼다가 끝내 자살로 마감하는 불꽃같은 삶, 그 틈새에 로맨스가 스며들었다고 해서 이것을 B급 멜로드라마의 코드라 오인해서는 안 된다. 순교를 이루지 못하고 흡혈귀가 되었기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죽음을 낭만적으로 미화시키지 말란 얘기다. 대체 낭만적 죽음이란 게 있기나 한다는 말인가. 거칠게 말해 <박쥐>의 마지막 장면은 노을 진 바닷가를 배경으로 클라렌스와 알라바마를 앉혀놓은 <트루 로맨스>의 엔딩 신을 뒤집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대체로 <박쥐>에서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지점은, 죽음의 이미지가 비추는 장면들이다. 예컨대 상현은 “인터넷 자살사이트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도와주면서” 흡혈을 한다는 말로 자신의 행위가 태주의 살인과는 격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 지점에서 관객은 폭소를 터뜨린다. 박찬욱 특유의 유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인가? 그러나 제 아무리 장르를 비틀고 전복시키고 이종교배를 단행할지라도 삶과 죽음을 다룸에 있어 최소한의 엄숙함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적어도 죽음이란 희희낙락거리면서 논할 정도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쥐>에 드러나는 죽음은 단순한 흡혈의 결과로 전락할 뿐이다. 상현과 태주의 흡혈은 생존의 문제도 아니고 순교의 때를 기다리기 위한 것도 아니요, 오로지 그들의 욕망을 지속시키기 위한 유희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한 인간의 숭고한 죽음이 아닌 죽어 마땅한 인물의 객체화. 이는 박찬욱이 즐겨 쓰던 수법인 동시에 논란을 피해하기 위해 영리하게 사용된 기제의 다른 이름이다.

생명의 탄생은 인간의 의지로 억제할 수 있지만 죽음은 인간의 의지 밖의 영역이고 그래서 죽음은 탄생보다 인간적이면서 방법과 행태에 있어 탄력적이다. 때문에 많은 예술 분야에서 그래왔듯이 탄생은 하나의 아이콘으로 고착된 반면 죽음은 그것을 다루는 작가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로 변형되거나 심하게는 풍자의 대상으로까지 다루어지곤 했다. 그런데 <박쥐>에서 박찬욱은 넘어선 안 될 선을 보란 듯이 넘어가버린다. 그것들을 희석시키기 위한 현란한 미장센을 가림막 삼아서 말이다. 무릎으로 박박 기면서 포월(匍越)까지는 아니라도 좀 더 조심스럽게 넘을 수는 없었을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나왔을 때, 김영진 평론가의 주관으로 황진미와 박찬욱이 격론을 벌인 일을 기억해보자. 이름조차 반가운 『필름2.0』의 특집기획이었는데, 나름 까칠하게 조목조목 물고 늘어졌음에도, 이 대담은 황진미의 영화적 안목의 한계와 비평적 자산의 빈곤함을 실토하는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황진미가 박찬욱을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고 수읽기에서 비교가 되질 않았다는 것이다. 느닷없이 지나간 얘기를 끄집어낸 이유는 <박쥐>를 두고 호불호가 갈리는 이 상황을 박찬욱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상황을 천천히 느긋하게 즐기고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 아무리 비판과 비난에 악평을 쏟아낸다고 한들 박찬욱의 영화화법이 쉽사리 변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것이 그의 스타일이고, 감독에게 스타일이란 필요에 따라 갈아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닌 피부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찬욱이 개별적 비평에 일희일비할 인물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영화에는 메시지와 메타포, 이미지가 있다. 그것들은 영화 밖 세계관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세계관이 불안정할 때 재현된 삶은 온전하게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거듭 말하지만, 모름지기 분출하는 힘을 붙잡아 절제미를 구하는 사람만이, 어떤 참혹한 상황일지라도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깃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만이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위대한 작품은 이성이 분별없는 환상을 누르고, 형식이 소재를 누르며, 천국이 지옥을 누른다. 여전히 박찬욱의 영화는 관심의 대상이고 흥미롭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들에 대한 총체적 판단을 유보한 채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일일 테다. 천재가 죽으면 스타일이 남고, 시대성이 사라지면 풍속만 남는다.

2009년 5월 11일 월요일 | 글_백건영 편집위원(영화평론가)

18 )
shelby8318
글 잘 봤음   
2009-05-11 18:49
kwyok11
웬만한 사람들은 다 보았다고 하기에는 아직 안본 사람 많죠~~   
2009-05-11 15:07
1 | 2 | 3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다음으로 다음으로

 

1일동안 이 창을 열지 않음